"책의 내용들을 확인하는게 우리의 놀이였다"

  • 등록 2013.02.25 09: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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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신개념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7)

30 나는 과거를 떠올렸고 과거 안의 가족을 떠올렸고 가족 안의 사랑을 떠올렸다. 이것은 모두 집안에서 이뤄졌다. 과거도, 가족도, 사랑도 규정지으며 갇혀있었다. 별로 상쾌하지 않은 미끈한 갯벌에 적신 맨발의 찬기에 스며들어온 밀물의 온기, 그 때처럼 멈추게 하는 시간의 혼합이 과거며 가족이며 사랑이었다. 갯벌에서처럼 자연히 눈을 감았다. 멈춰선 정지된 순간이 아득하게 복사뼈에서 찰랑거렸다.

 

오빠의 두 손이 내 발목을 감쌌다.

 

“곧 온 몸이 따듯해질 거야.”

 

몸이 으스스했다. 감기가 올 것 같았다. 집에는 엄마가 없었다. 오빠에게 감기약을 찾아달라고 했다. 오빠는 의사가 돼주겠다며 오빠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누워봐.”

 

오빠가 하라는 대로 했다. 오빠의 침대에 누워 보는 천장이 하늘같았다. 내 방처럼 온통 하늘색 벽지로 입혀져 있기도 했지만 내 방의 침대에서와는 달리 천장이 높아보였다. 그래서 하늘 아래에 누워있는 기분이 들었다.

 

“오빠 방은 높아.”

 

오빠는 내 발목을 연신 문질렀다.

 

“오빠, 정말 따듯한 것 같아.”

 

나는 오빠를 올려다봤다.

 

“그럴 거야. 그럴 거라고 책에서 그랬어.”

 

“어떤 책인데?”

 

“병은 마음으로 고친다는 책.”

 

“나도 삼년 후에는 그 책을 읽게 되겠네.”

 

오빠 책을 고대로 물려받아왔다.

 

“아니. 그 책은 우리 집에 없어. 친구 집에서 봤어. 그러니까 귀희는 못 볼 거야.”

 

“오빠 친구 책?”

 

“아닌 것 같아. 부모님이 보는 책 같았어.”

 

오빠가 얼굴을 붉혔다. 몸이 따듯한 듯하더니 이내 마음도 포근했다.

 

“오빠, 나 졸려.”

 

오빠가 내 발등과 발바닥을 문질렀다. 간지러움에 졸음이 사라졌다.

 

“간지러워, 오빠.”

 

발바닥을 손가락이 콕콕 눌렀다. 간지러움이 누그러지자 오빠한테 물었다.

 

“오빠는 학교 가는 거 재밌어?”

 

 

초등학교에 입학한지 두 달쯤 된 나는 학교가 재미없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부가 시시했다. 다 아는 것이다. 처음엔 즐거웠다. 신이 났다. 선생님은 나만 시켰다. 나는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다 할 수 있었다. 친구들한테도 ‘척척박사, 문 박사’ 라는 별명을 얻을 즈음 친구들은 차츰 나를 싫어하기도 했다. ‘잘난 척은 혼자서 다해.’ ‘밥맛이야.’ 나는 잘난 척을 한 적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잘한 모범생이었다. 친구들은 나를 피했다. 나는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어 선생님이 물어도 ‘모르겠는데요.’ 하며 친구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결국 선생님은 친구들 앞에서 ‘엄마 오시라고 해.’ 했고 친구들은 깔깔깔 웃어댔다. 나는 다시 처음처럼 선생님 앞에서 고분고분해야만 했다. 엄마를 학교까지 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엄마가 없어 학교가 좋았다. 학교에서는 엄마를 보고 싶지 않았다. 점점 친구들과 멀어졌다.

 

“오빠도 동생도, 어쩌면 남매가 다 이렇게 똑똑하니.”

 

다른 담임선생님들도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래서 ‘학교 좋아?’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는 의외로 ‘응’ 이라며 끄덕였다.

 

“정말?”

 

나는 오빠의 학교생활이 궁금했다.

 

“난 우표를 봐. 우표는 나를 아무 데나 다 데리고 가거든. 교실도 떠나게 해줘.”

 

오빠는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럼, 오빠는 우표가 친구야?”

 

“응. 그런 셈이지.”

 

나도 우표를 학교에 가져가 본 적이 있다. 첫날 남자애들에게 몇 장을 빼앗긴 후로는 가지고 가지 못했다.

 

“나도 오빠처럼 힘센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

 

이때였다.

 

“우리, 의사놀이 해볼래?”

 

놀이라는 게 흥미로웠지만 의사를 어떻게 놀이하지 싶어 오빠한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내가 환자가 되고 오빠가 의사가 되면 된다고 했다.

 

“나는 지금부터 오빠가 아니라 의사님이다. 귀희는 내 동생이 아니라 환자가 되는 거구.”

 

오빠는 환자복을 대신해서 잠옷을 입게 하고 다시 침대에 눕혔다. 체온계라며 내 겨드랑이 안에 나무젓가락을 끼웠다. 오빠는 일분 후에 오겠다며 오빠 방을 나갔다. 우리 남매는 한 집에 살아왔지만 철저히 각방에 고립돼 있었다. 엄마가 짜놓은 스케줄대로 오빠와 내가 할 일이 달랐다. 그 일이란 모두 책상 맡에서 이뤄지는 공부다. 세 살 공부 여든까지 간다며, 엄마는 시간을 나눠 오빠 방과 내 방을 드나들었다. 일찍이 계획된 생활에 묶여 오빠랑 함께 따로 놀 시간은 전혀 없었다. 외식 때나 외출 때에도 말을 별로 하지 않았다. 논다는 게 어색했다. 노는 걸 몰랐다. 책이 놀이개였으며 책의 내용들을 확인하는 게 우리의 놀이였다. 엄마가 사회자이거나 질문자가 되었다. 또는 해설가도 되었다. 이러니 우리에게 잠깐 쉬는 일은 몰라도 노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빠와의 의사놀이는 우리끼리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책 없이 노는 것만으로도 그저 좋았고 황홀하기까지 했다.

 

방으로 다시 돌아온 오빠가 겨드랑이에서 가짜 체온계를 뺐다. 간지러웠지만 재미나고 신기했다.

 

“체온이 삼십구도나 되는군요. 입원하셔야겠습니다.”

 

오빠는 진짜로 나를 어린애도 동생도 아닌 어른 환자로 취급했다. 오빠 목엔 누란 금메달이 걸려있었다. 메달을 내 가슴에 갖다 댔다. 공부 잘해 오빠가 받은 메달이 청진기로 둔갑한 사실이 나를 웃겼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오빠의 표정이 진지해서 나는 큰 병에 걸린 건 아닌가 걱정이 됐다. 오빠는 내 가슴 앞의 옷 단추를 풀었다. 오빠가 진짜 의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누런 금메달이 내 가슴에 닿는 순간 차가워서 움찔 놀랬다. 오빠가 메달을 입 앞으로 가져가 호호 불고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다시 내 가슴에 청진기를 얹었다. 의젓한 의사. 초등학교 사학년 오빠가 의젓했다. 의사가 뭐라 할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겁을 먹고 눈을 감았다. 소심한 환자. 초등학교 일학년 나는 불안했다.

 

‘간호사가 없어 아쉽네.’

 

혼잣말을 하더니 약을 처방해주겠다고 했다. 오빠는 밖에 나가 평소 식사 후 씹어 먹는 영양제인 에비오제 두 알과 물컵을 들고 들어왔다. 식사 후 삼십분 후 복용한 뒤 푹 자두라고 했다. 나는 병원에서처럼 의사가 하라는 대로 했다. 오빠는 의사놀이를 자주 해본 듯 자연스러웠고 나도 덩달아 어색함을 몰랐다. 그저 신기하고 즐거울 따름이었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어린 나이지만 자유의 의미를, 그리고 필요를 어렴풋하게 알 듯했다. 다른 환자를 보러 간다며 오빠가 또 방을 나갔다.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누워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얽매이지 않는 것이 자유이며, 스스로 하는 것이 자유이며, 남들로부터 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라는 것이 아닐까, 어린 아이의 머리에 막연한 생각들이 지나갔다.

 

희망의 색 하늘색으로 온통 도배된 방 안에서 한 번도 희망을 꿈꿔본 적이 없었다. 내게 하늘색은 가둠의 색, 속박의 빛이었다. 방 안에서만이 아니었다. 바깥에 나와 실제 하늘을 보고 있을 때마저도 하늘은 갑갑했다. 하늘색은 나를 종일 옭아매고 있는 비닐랩과 같은 것이었다. 음식에게 그러하듯이 나를 상하지 않게 보호할지는 몰라도 숨을 쉴 수 없게 하는 압박감으로 하늘색이 나를 가뒀다. 나는 청진기를 대느라 풀었던 앞가슴의 단추들을 잠그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자유는 평온이라는 것도 어설피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좋아하는 색을 빨간색이라고 대답했다. 빨간 꽃들이 많아서다. 아이가 의외라며 소극적인 반응을 했지만, 다음 가장 싫어하는 색을 파랑색이라고 했을 때는 유치원 선생들은 모두 나를 이상한 눈으로 쑥덕대며 극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이 사실은 어김없이 엄마에게 전해졌고 엄마 손에 이끌려 정신과 의사 앞에 앉았다. 언뜻 노란색으로도 보이는 밝은 갈색 염색을 한 짧은 파머머리에 흰 금속테 안경을 쓴 여의사는 근엄을 내비치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린 꼬마에게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맘대로 그려보라고 했다. 은하수가 박힌 까만 밤하늘 그림액자가 노랗게 보이는 그 여의사 머리의 배경으로 내 눈에 들어왔기에 머뭇거림 없이 노란 달맞이꽃을 그렸다.

 

의사는 배경색도 그리라고 주문해왔다. 갈색머리가 창문으로 스며든 빛을 받아 빨갛게 보였다. 검정색 대신에 빨간색으로 달맞이꽃 배경으로 칠을 했다. 의사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지만 일부로 동요하지 않는 점잔을 피우며 다시 해바라기를 그릴 수 있느냐고 했다. 그림으로 바로 대답해줬다. 그림에 나는 자신이 있었다. 역시 배경색을 넣어보라고 했다. 해바라기 배경도 내가 좋아하는 색인 빨간색을 넣었다. 그녀가 물었다. 하늘은 무슨 색이지? 파랑색이라고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세 번 정도 정신과 의사에게 갔던 것 같다. 내 방의 벽지에 대해서는 물어오지 않았다. 물었다 해도 곧이곧대로 하늘색이라고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 방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의사는 엄마에게, 갓난 아이 때 파란색 장난감에 놀란 적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오빠가 갖고 놀던 파란색 책이나 장난감을 끝내 갖지 못한 기억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며 나이가 들면서 없어질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림에 소질이 있다며, 화가로 키우면 잘 할 것 같다고 했지만 엄마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후 그 여의사에게 나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

 

오빠 방, 오빠의 침대에 누워 이년 전 그 때를 떠올리고 있는데 오빠가 들어왔다.

 

“오빠가 더 의사야. 진짜 의사야.”

 

나는 하늘색이 이젠 싫지 않을 것 같았다. 잘 웃지 않는 오빠가 씨익 웃었다.

 

“그럼, 내가 진짜 아니면? 돌팔이인 줄 알았어? 귀희도 환자가 아니게?”

 

어깨를 과장해서 으쓱해보였다. 더 검사해야 한다며 누워 있는 내 배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손가락 끝으로 톡톡 쳐보기도 했다. 내 맨 살 위에서. 어린 나에게서도 느껴지는 작은 아이의 앙증맞은 손이 내 발목을 감싸고 내 발등과 발바닥을 어루만질 때처럼 내 몸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오빠는 가끔 눈을 감기도 했다. 나도 따라 눈을 감았다. 때로는 멈췄다가 움직이는 오빠의 손길에 기분이 좋았다. 오빠의 손으로 전해오는 느낌이 부드러웠고 따듯했다. 잠이 쏟아졌다. 자유는 평화라는 것도 몸으로 느끼고 있을 즈음 오빠 앞에서 내 몸은 거의 풀려있었다. 단추도 마음도 모두 다. 아주 편했다. 부끄러움이 끼어든 때는 한참 뒤 칠년이 지난 후였다.

 

“오빠, 나 잠이 또 와.”

 

오빠가 내 볼에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나를 안았다. 마치 ‘잘 자’라고 말할 때처럼. 먼 훗날 중학교 이학년 때쯤, 이것이 사랑이지 않을까, 사춘기 여학생은 그제야 얼굴을 붉혔다. 사랑은 내게 아련하고 아릿하다. 이 느낌은 오빠의 손길에서 느낀 기분과 아주 같았다. 사랑은 내게 잠이 들고 싶은 마음이고, 깨어나서도 졸린 기분이다. 사랑은 몸이며 마음이며 모두를 풀리게 하는 이완의 힘이다.

 

초인종이 울렸을 때, 더 누워 쉬고 싶었던 나를 좀 전의 아련하고 아릿하던 손길과는 다른 거친 손으로 오빠가 서둘러 깨웠다.

 

“엄마가 왔어. 빨리 네 방으로 가. 어서 가란 말야. 공부하는 척하라구!”

 

오빠 방에서 황급히 밀려나온 나는 그 때 못 본 것을 중학생 사춘기 때야 볼 수 있었고 알 수 있었고 느낄 수 있었다. 다급하게 당황해하던 오빠, 손을 떨고 있던 오빠를 그 뒤 칠년쯤 지나서야 나는 봤다. 우리가 자유를 찾은 그 날 이후 오빠는 나를 피했고, 나는 칠년 뒤 오빠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우리의 평화를 깬 것은 엄마의 초인종 소리였지 오빠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건 한참 후 서른을 넘긴 어른이 된 뒤였다. 내 나이 서른여섯이 되는 해에 나는 오빠에게 마음을 열었고 아직도 닫혀 사는 오빠의 가슴을 이젠 내가 열어주고 싶었다. 편지는 오빠와의 추억으로 이어졌다.

 

 오빠,

 

나는 내가 힘들 때마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 오빠 방에서 오빠와 나눈 의사놀이를 생각하곤 해. 내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거든. 어른이 되면서 그 순간이 부끄러웠고 쑥스러웠던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편안했던 때는 그 때뿐이란 걸 나이 들며 점점 실감나게 해.

 

삼십 중반에 확실히 깨닫게 된 게 하나 있다면 자유는 순수하다는 것이다.

 

오빠,

 

갯벌이 긴 바다에서 물이 들 즈음 다 벗어던지고 바다 깊숙이 걸어 들어가 오빠랑 발바닥 물장구치며 노는 꿈을 종종 꾸곤 해. 언젠가 이렇게 오빠랑 하고 싶다, 꼭.

 

다시 복사뼈가 따듯하다.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오동명 작가 momsal2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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