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장마로 전국이 물로 흠뻑 젖었다. 대륙의 찬 공기와 태평양의 습한 공기가 한반도 상공에 대립하며 연일 억수를 쏟아냈다. 장마전선은 반도의 위아래를 오가며 국지성 폭우를 쏟아 붓고 있었다. 어제는 전남지역이 홍수로 2000억 원의 재산피해를 입히더니 오늘은 영남지방으로 옮겨 모내기를 마친 농토를 휩쓸었다. 도시에선 산사태로 아파트 단지의 주민들을 위협했다. 후텁지근한 무더위도 함께 계속됐다.
카페 <The>의 주방 내실에는 작은 창이 하나 있다. 가슴 위로 문규범의 땀방울을 받아들이며 이선희는 창을 매섭게 때려대는 장대 빗소리를 평화롭게 듣고 있다.
“장마가 다음 주엔 그친다는데...”
선희는 장마 내내 규범이 카페를 찾아왔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그녀가 부쳐주는 빈대떡을 좋아한다.
“어머니가 비 오는 날이면 부추와 신김치 부침개를 종종 해주시곤 했는데.”
긴 가뭄으로 세상이 온통 타던 어느 날 규범은 비를 고대했다.
“비 오면 내가 해줄게.”
장마가 시작되면서 카페는 문을 닫았다. 규범이 요구했다.
“우리의 사랑을 어떠한 것으로도 방해 받고 싶지 않아.”
내부가 모두 새카만 카페 안에 엉켜 붙은 남녀의 몸은 하나가 되어 더 유별나게 희다.
“검정색을 좋아하나봐.”
“밤을 좋아하는데, 밤은 기다림이잖아. 아침을 기다리게 하고 빛이 기다려지고. 하지만 기다림을 채워주는 것은 아침도 빛도 아니었어. 사람이었지.”
“남자는 말이지?”
“남자? 아니. 사랑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아.”
“같은 말이잖아.”
“아니. 사랑으로 채워준 남자는 없었어.”
“우리가 아직 사랑을 나누지는 못하고 있단 말로 들리네. 그저 몸이었나?”
선희는 다 벗고 있는 규범의 상체를 역시 다 벗은 몸으로 누워 올려다본다.
“그 고운 손으로 페인트칠은 해봤을까?”
“왜?”
“이제 흰색이든 다른 색으로 바꿔도 될 듯해서.”
“기다릴 필요가 이젠 없다는?”
가슴을 더듬는 그의 손을 잡으며 그녀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다. 채워지면 기다림은 사라질 줄 알았는데... 채워지니 더 기다려질 것 같은데. 그냥 이대로 놔둬야 할까봐.”
그가 몸을 수그려 그녀의 입술로 다가간다.
“우리 결혼할까?”
“나하고?”
“그럼?”
“안 되잖아. 아니 안 돼.”
“왜 안 돼? 결혼해서? 이혼한 거나 다름없다며.”
그가 그녀의 몸 위에서 나와 다 벗고 누운 그녀 곁에 정색하고 앉는다.
“결혼했으니까 이혼은 할 수 있겠지. 결혼해야만 이혼하는 거니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어. 그런 형식이 말야.”
“가끔 선희는 도인 같은 말을 하더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산이 있으니 오른다, 그 따위 같은 말. 도사연하는 이런 따위,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 같이 들려. 떳떳해 보이지 않아. 당당해 보이지 않는다고. 스님이나 도인들 같은 비현실적으로 사는 사람의 말에 유혹 당하는 거 난 아주 싫어해. 무소유의 삶 같은 류의 말 말이야. 속세를 떠난 스님이 세속에 대고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 이건 현혹이야. 이런 현혹도 혹세무민일 뿐이라고. 아무튼 이혼하지 못하는 이유라도 있어? 선희도 남의 이목에 신경을 쓰며 사는구나. 아닌 줄 알았는데.”
“읽진 않았는데 한 여자가 두 남자와 결혼해서 산다는 그런 소설도 있더라.”
“난 영화로 봤는데 한 마디로 쓰레기지. 소설도 그런 사랑도 다. 그 영화에서 줄곧 월드컵 축구 얘기가 나오던데, 축구사랑을 어찌 인간사랑에 빗댈 수 있는 건지. 작가의 철학부재가 흠씬 드러나더군. 가볍게 살려는 요즘 세태를 소설화한 것이겠지만 내겐 허섭스레기 같았어. 소설은 그럴 수 없는 것을 쓰는 것이고 그래서 영어로는 픽션이라고 하잖아. 그래서 한자로도 작은 소자를 쓰고 있는 것이고. 현실과 다른 꾸밈의 작은 이야기쯤으로 낮춰서 아니면 삶이나 생활과 구별해서 본 게 아닐까. 근데 그건 소설도 아니었어. 말로 하는 유희라고나 할까. 단지 오락. 그래, 현대인, 적어도 요즘 여자의 바람을 표현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겐 불가능한 얘기였어. 아니지.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고.”
“법적 판단으로 불가능한 거겠지. 검사다운 생각이겠고.”
“근데, 그렇구나. 선희, 네 심경? 네가 그러고 싶은 거로구나. 정말 그런 거니? 남편하고 나랑도 동시에?”
선희가 몸을 세워 일어난다.
“나, 담배 한 대 피워도 돼?”
“안 피우잖아.”
“피우고 싶어. 지금.”
“담배 사다 줘?”
“홀 어디에 있을 거야. 손님이 피우고 두고 간 거.”
그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담배의 흰 연기가 검은 벽 배경 앞에서 더 두드러지게 돋보인다. 그는 움직거리는 흰 색이 순결한 향연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담배향이 달게 코에 와 닿는다.“
“나도 하나 줘 봐.”
함께 내뿜은 담배연기가 천장 쪽으로 휘돌아 오른다.
“우리가 굴뚝 같네.”
“그러네. 비에 젖은 굴뚝을 보고 벗겨진 인간의 몸을 떠올린 적이 있는데. 우리 지금 벗고 있잖아.”
그녀가 얼굴을 돌려 그를 바라본다.
“십 수 년 됐겠다. 남편과 그거 안 한지 말야.”
“섹스? 내가 지금 그것만을 얘기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베개가 두 개 놓여있는 너의 잠자리를 보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우리의 관계가 불륜이란 생각을 하게 됐어.”
“그럼 아니었어? 적어도 규범은 아니어도 나는 불륜인 게 맞지.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 검사인 규범이도 다분히 이미지에 천착하는 거 아냐?”
‘그럼, 섹스 없는 잠자리조차도 같이 안 하고 있단 말이야?’
물으려다가 차마 묻지 못한다. 그 앞에서 남편과 다정하게 포옹하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서다.
“이미지? 한 이불 위의 베개 두 개가? 의미 아닌가?”
그녀가 입을 꼭 다문다. 한 동안 침실엔 침묵이 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 삶에는 의무라는 게 있는 거야. 결국 가면 같은 삶이지만 우리 부부에겐 별 문제가 없어. 남편은 나를 다 이해해주고 배려해주거든. 이러니 내가 이런 카페라도 차리고 있는 거지. 어떤 남자가 뭇남자들이 드나드는 카페를 하도록 내버려두겠느냐고. 이 점엔 내가 고마워하고 있어. 답답해했거든. 내가 집에만 묶여 있는 것이.”
“굳이 카페일까. 공부하다가 말았다며. 계속 공부를 하지 그랬어.”
그녀가 그를 빤히 쳐다본다.
“남의 말 하듯 하는구나. 규범이가 생소해지는데.”
“나라면? 역지사지, 바꿔서 생각해본 건데. 순희 네 입장에서.”
“그래. 남편의 이해나 배려는 포기나 체념일 수 있겠지. 공부로 성공한 규범인 공부란 말이 쉽게 나오겠지만 좌절해 본 사람에겐 달라. 역지사지? 좋지. 그러나 그 또한 제 입장에서의 위치바꾸기에 불과해. 바꿔도 자기방식으로 한다는 것. 역지사지가 아니라 억지사지라할까. 규범이도 그런 것 같네. 알았어. 베개 그거 하나 치우면 되는 거야? 아니지. 네 베개를 갖다 놓으면 되겠니?”
“남편도 나와 같이 불쾌한 생각이 들지 않을까?”
“남편이 너랑 같을 거란 생각을 하는 것 같구나. 그게 규범식 역지사지구.”
규범은 이쯤에서 대화를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유치하고 졸렬해보였다. ‘그런 여자, 왜 만나는 건데?’ 묻게 했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그녀가 몸을 돌려 가슴으로 그를 안는다.
“날 그냥 안아주기만 하면 안 돼? 나는 널 그저 안아주고만 싶은데. 이런 내 행동이 가볍게 보이니? 몸만 요구하는 것 같아서? 내가 그렇게만 보이는 거야? 규범이를 내가 좋아하는 건 너와 시소를 타고 있는 것 같아서고 나에게 다가와 무게를 맞추려는 네가 좋은 건데. 우표를 좋아하는 네게서 어린 아이의 마음이 읽혀지던데.”
규범은 꿈이 꿈이 아니었음을 깨친다.
“선희도 그런 생각을 했어?”
같은 꿈을 꿀 수 있을까. 현실 속에서의 지향이 꿈에 나타나고 그 지향이 같다면 꿈도 동시에 꿀 수 있겠지. 그러고 보면 꿈만한 현실은 없다. 같은 잠자리에서 다른 꿈을 꾼다고 하지만,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꿈을 꿀 수도 있다.
거의 이주일 동안 이어진 지루한 장마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 사이 남편으로부터 몇 번의 전화가 걸려왔고 선희는 다른 때와 달리 싫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이 비가 그치지 않으면 좋겠다고 하면서도 비 따위로 감정에 사로잡히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장마가 멈추면 여기 오는 것도 주춤하겠네.”
“어떻게 비로 우리가 가까워졌다고 여기는 거지?”
“부침개 먹으러 온 거 아냐?”
그녀가 농담하며 웃음을 보이지만 슬퍼 보인다. 그의 마음으로 표정을 보았으리라.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빈대떡 집은 열어.”
규범이 자주 오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대체로 성당은 크다. 그는 전에 춘천을 혼자 여행하면서 작은 성당을 보았다. 작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들어갔다. 그 안은 깜깜했고 예수고상에만 조명이 비쳐 밝았다. 두 시간쯤 머물렀다. 일어나려는데 작은 교회나 성당의 고상 앞에서 둘만의 의식을 치루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결혼.
카페 <The>에 드나들게 된 것도 그와 같은 분위기 때문이었다.
“시골로 여행을 너와 함께 떠나고 싶어. 목적지 없이 돌아다니지만 목적은 두고 돌아다니고 싶어. 작은 시골 교회에서 너와 손잡고 언약 하나 하고 싶은데. 토끼풀 반지라도 껴주며 난 네게 이러고 싶어. 평생 자전거를 나랑 함께 타줄 수 있겠니? 라고.”
선희가 자전거만 함께 타주면 돼?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로 안겨올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그림=오동명/ 10편으로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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