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보지 못할 지라도 찾는 것만으로도···

  • 등록 2013.04.22 10: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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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신개념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14)

22 현관문의 초인종 같은 벨소리가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안전벨트 착용등이 켜지고 곧 방송이 나왔다. 삼십 분 후에 도착지인 인천공항에 착륙한다고 했다. 나는 밖을 내다보던 창가에 모로 기대어있었다. 아마도 일본 위를 지날 즈음 잠깐 잠이 들었나보다. 꿈같았지만 잠결에 나타난 어릴 적 기억의 생생한 실제였다. 몽롱한 기억이 꿈처럼 찾아들었다. 아랫입술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손에 잡히는 흉터는 그날 이후 내 얼굴의 눈이나 코와 같이 기관처럼 박혀있다.

 

나는 엄마등에 업혀있었다.

 

“자라면서 흉터는 사라질까요?”

 

엄마가 의사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다행입니다. 아랫입술에 숨겨져 있어 눈에 띄지는 않을 테니까요. 넘어지면서 윗 앞니가 아랫입술을 찍어 길게 찢겼으니 이것도 천만다행입니다. 이를 보호해줬으니까요. 이는 이상 없는 것 같습니다.”

 

마취가 풀리면 따가워서 보챌 테지만 참게 해보라고 했다. 너무 어려서 진통제는 가능한 먹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의외로 잘 참습니다. 엄살은 어른용이거든요. 알아야 엄살도 떠는데 아이들은 단순하니 보채다가 잠들 겁니다. 약도 습관이 되니 어렸을 때부터 약 멀리하기를 길들이는 게 좋고 말입니다.”

 

집에 가까워지자 엄마등에서 나는 끙끙대기 시작했다. 집으로 들어가는데 나를 가슴에 안고 집에서 뛰어나오던 엄마가 생각났다. 기억은 필름을 되돌리는 것이다. 입술에서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다. 흰 가재수건을 잡은 엄마의 왼손이 내 입을 꾹 누르고 있었다. 오른손으론 내 엉덩이를 바치고 엄마는 꽤 먼 병원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엄마의 입김이 내 코에 뜨겁게 닿았고 몰아쉬던 엄마의 큰 숨이 더 빨라졌다. 앞으로 내달리면서도 연신 내 얼굴을 쳐다보던 엄마의 눈에서 처음으로 불안을 보았다. 그 눈은 결코 평소 엄마의 눈이 아니었다. 내 실수로 넘어진 나도 불안했지만 화를 내거나 혼을 낼 것 같은 눈빛이 아니었다. 불안이 슬퍼보였다. 또 다정해보이기도 했다. 엄마는 나를 간호사에게 넘겨주고 나를 안았던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마치 기도하는 것 같았다.

 

 

“아기가 아주 잘 참네.”

 

의사가 내게 말을 걸어올 때도 난 엄마를 찔끔 쳐다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이마 아래로 엄마가 나를 쳐다보며 울 것 같이 웃고 있었다.

 

“아가 손을 엄마가 잡아주시겠어요?”

 

엄마의 손이 떨고 있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따뜻했다. 포근했다. 오른손으로 내 어깨를 다독였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됐어, 귀희야.”

 

입술 아래가 따끔하더니 이내 얼얼해졌다. 부어오른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엄마의 손이 더 꼭 쥐어졌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됐어.”

 

울다가 잠이 들었고 한참 동안 엄마등에 업혀있었다는 것을 집 대문을 보고 알았다.

 

“깼구나. 우리 귀희.”

 

엄마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왼손으로 바치고 엄마젖을 꺼냈다. 여느 때와 같이 입에 물리지 않고 젖을 짜 내 입안으로 떨어트렸다.

 

“엄마젖을 먹어야 우리 딸 빨리 낫지.”

 

엄마는 입가에 흐르는 젖을 분을 바르듯 문질러 내 얼굴에 고루 발랐다. 몇 방울이 떨어졌을까, 엄마 가슴에 안겨 나는 스르르 또 잠이 들었다.

 

13년만의 귀국으로 가슴이 설레다. 떨린다. 승무원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포도주를 부탁한다. 한 잔 나올 만큼의 작은 포도주병 마개를 따 천천히 마신다. 기체가 흔들린다. 구름에 가려 땅은 보이지 않는다. 구름 속을 지나는 여객기가 요동한다. 공항에 도착해도 마중 나올 사람은 없다. 오빠에게도 아빠에게도 연락 않고 마음으로 무작정 달려온 내 손에는 육 년 전 이사했다는 경기도 주소밖에 없다.

 

“엄마는 아빠 고향 언덕에 모셨다.”

 

오빠는 짧게 엄마의 장례를 알려왔고,

 

“나는 경기도 김포에서 살기로 했다. 그 주소다.”

 

오빠는 아빠 소식을 들려주지 않았다.

 

“건강하던 엄마가 왜 갑자기 돌아가셨어?”

 

내가 물었다.

 

“암이라고 해두자. 그것도 암일 테니까.”

 

오빠는 내 소식도 묻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고 있는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러했으면서도 가보지 못한 엄마의 장례식이었다. 과음하고 과식하고 과욕을 부리는 사람에게 암은 많다. 암은 몸의 거부반응이다. 엄마의 사망원인은 과욕이 아니었을까. 미국으로 떠나는 딸에게 기대했던 자랑스러운 여자라는 게 전문직업인 의사라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고작 의사? 나는 엄마의 욕심을 과소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삶은 가치로 평가되어야지 직업 따위로 판단하려든다면 인생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고 방편일 뿐이다, 라며 엄마와는 다른 생각을 했다. 엄마는 ‘어떻게’보다는 ‘무엇’에 더 집착했다. 그래서 오빠는 검사가 되었고, 나는 의사가 될 수 있었다. 오빠는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짧은 한 마디를 툭 던지고 전화를 끊었다.

 

“나나 너나 알고 있던 엄마가 아니었다.”

 

오빠는 수년 만의 전화에서 그 동안의 소식을 단 일 분으로 끝냈다.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고 자식욕심에 사로잡혀 제 몸을 지키지 못한 과욕의 희생쯤으로 엄마를 간주했다. 슬펐지만 차분했다. 육 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부재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고 아쉬움이겠거니, 꿈에 자주 나타나는 엄마를 애써 지우려다가 미움 같은 한스러움을 더 키웠다.

 

‘그래, 자랑스러운 딸을 보지도 못하고 그새 떠나버리니?’

 

‘그래, 흰 가운 입은 딸을 보지도 못하고 떠날 것을 왜 그렇게도 애태웠니?’

 

원망은 미움이 되어 울기도 많이 했지만 미워서 울면서 더 깊어가는 보고 싶음에 주체할 길이 없었다. 엄마가 이제 보고 싶다, 무지.

 

볼 수 없는 엄마를 보겠다고 놓친 뒤 떠나온 한국으로 여객기가 안착하자 옆 좌석의 백인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쪽지가 들려있었다. 영문이지만 한글이었고 그것은 주소였다. 한국에는 처음 온다는 이국의 여자는 부모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듣고 자세히 보니 흰 피부색 아래 동양인의 윤곽이 숨어있었다. 내 나이 또래였다. 아마도 그녀의 부모가 살고 있을 주소려니 하며 쪽지를 건네받았다.

 

“여기에 가면 나를 낳아준 부모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제주도 제주시 노형동.

 

나는 제주도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해서,

 

“나도 십삼 년 만에 한국에 왔다. 제주도는 한국의 가장 아래 큰 섬 정도라는 것 밖에 모른다. 인천공항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편이나 비행기편을 알아봐주겠다.”

 

섬이어서 였을까. 제주도는 배를 먼저 떠올리게 했다. 그녀도 나도 공항 출구로 나왔지만 반겨주는 친지가 없다. 김포공항에 가면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가 많다는 여행안내인의 말에 실망했다. 내가 가야할 곳이 아니면서도 배를 기대했었나 보다. 그녀와 짧은 동행을 하면서 동병상련을 느꼈다. 가족을 찾아가는 마음이 그녀를 한 번 더 쳐다보게 한다. 들떠 있으면서도 불안정해 보인다. 나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몇 년 만이냐?”

 

“35년쯤?”

 

김포공항으로 가는 전철에서 미국인으로 사는 우리들 얘기를 했다.

 

“나는 뉴멕시코주의 산타페에서 산다.”

 

“나는 조지아주의 애틀란타에서 산다. 산타페라면 화가 오키프가 생각난다. 오키프 미술관을 꼭 가보고 싶었다.”

 

“한국사람들은 산타페에서 산다하면 현대자동차를 먼저 말하던데... 나도 그곳의 작은 갤러리에서 일한다. 큐레이터다. 산타페는 오키프 때문에 미술시장으로 큰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한적한 산골 시골마을이다.”

 

“어머나, 그럼? 회화를 전공했느냐?”

 

“미술사를 배웠다. 한국미술에 관심이 많고 한국회화를 미국에 소개하는 일을 맡고 있다. 한국에 왔으니 미술관이 많다는 인사동이나 청담동에도 들러보고 싶다.”

 

“같이 가자. 그러나 나는 한국인이지만 안내할만한 자격이 없다. 너와 다를 바 없이 나도 이방인이다.”

 

이런 말을 하면서, 내가 알고 있는 게 뭘까, 내게 물었고, 없어, 라고 대답한다. 아는 것이라곤 책 외에 없다. 등짐에서 우표첩을 꺼내 그녀에게 보여줬다.

 

“나는 화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왜 못 했느냐고 그녀가 물었을 때 불현듯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의사가 내겐 잘 맞는다. 그림은 좋아하지만 소질이 없다. 좋다고 해서 직업이 될 순 없지 않느냐?”

 

전철은 꽤나 빨랐다. 김포공항역이란다. 배고프듯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내가 한국에 온 목적이려니, 하고 제주도 비행기 티켓을 끊는 데까지 그녀를 안내했다.

 

“제주시 노형동은 제주공항에서 가깝다고 한다. 다행이다.”

 

낳아준 부모를 꼭 찾기를 바란다는 말은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찾아보는 것만이라도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없는 엄마를 이제 찾고 있듯이. 우리는 서로 도와줄 형편이 못 되는 줄 알고 있었지만 핸드폰번호를 교환했다.

 

“이름이?”

 

“셀마 툴이다. 넌?”

 

“문귀희다. 귀희 문.”

 

제주도행 여객기는 한 시간도 채 안 돼 김포공항을 이륙했고 나는 경기도 김포로 가기 위해 여행안내소를 다시 찾았다. 출구를 나가면 우측 버스정류장에 김포행 시내버스가 있다고 했다. 글.그림=오동명/ 21편으로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오동명 작가 momsal2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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