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하굣길이었다. 세종이가 교복 상의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규범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빠 만년필이야. 아빠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기도 해. 아니, 또 하나가 있구나. 이 만년필로 쓴 듯한 공책이 하나 더 있는데 일기 같았어. 아직 읽어보진 못했다. 먼 훗날로 미뤄놨거든. 내가 아빠 나이쯤 될 때 읽으면 더 좋겠단 생각이 들어서고, 지금 읽게 되면 아빠랑 엄마랑 더 많이 보고 싶어질 거니까. 나, 이젠 울기 싫거든. 이 만년필을 규범에게 주고 싶어.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네게 주고 싶거든.”
빨간색 도장에 금장 화살표 장식의 만년필을 받으면서 규범이가 물었다.
“고마운데,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인 거니?”
세종이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가 이내 세로로 끄덕였다.
“특별한 날은 우리, 너와 내가 만드는 거라고 규범이가 그러지 않았니? 그러고 보니 오늘이 특별한 날이겠구나. 나, 내일부터 학교 안 간다. 나, 내일부터 널 볼 수 없게 돼. 정선에서 살기로 되었거든. 이모부님이 외국으로 장기 출장을 가시게 돼 내가 서울에 머물 곳이 없게 되었어. 그래서.”
세종은 말을 잠깐 멈췄다. 울먹이고 있었다. 규범이가 만년필을 들고 있는 손으로 세종이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내게 만년필을 남겨놓고 싶은 거로구나. 미리 얘기하지. 나도 선물을 준비했을 텐데. 내일 정선으로 가야 하는 거야? 모레 가면 안 되는 거니?”
“이모님께서 오늘 저녁밖에 시간이 없다고 하셔서 오늘 떠나야 해.”
“뭐? 오늘? 당장? 우리가 이렇게 급하게 헤어져야 한단 말야? 헤어지는 것도 아쉬운데 함께 할 시간이 우리에겐 이렇게 짧다니.”
버스정류장에 닿았다.
“세종아, 우리 같이 종구할 시간 정도는 있겠지?”
규범이가 세종을 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또 전에처럼 버스의 맨 끝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오늘은 같이 오래 못 있을 거야. 차로 정선에 가려면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하셨거든.”
“너랑 종일 놀고 싶어 만든 종군데. 근데 정선엔 큰 아버님 가족이 사시는 거니? 그 집에서 살게 되는 거야? 그 집에서 학교 다니는 거야?”
세종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학교는 당분간 다니지 못할 것 같아. 큰 아버님이 다니시는 광산에서 일하게 될 것 같아.”
규범이의 눈이 놀라서 휘둥그레졌다.
“광산에서 네가 일한다고? 어린 우리가 광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세종이 고개를 숙였다.
“학교에 안 가면 집에서 혼자 뭘 하고 있겠어.”
“학교는 가야지. 우린 이제 중학교 일학년이잖니.”
“큰 아버님 댁의 형들도 다 초등학교만 나왔어. 형편이 어려우시거든.”
규범이와 세종이는 한참 동안 말을 주고받지 못했다. 버스는 섰다 떠나기를 기계처럼 반복하고 있었고 정류장 이름을 알리는 차내 방송의 아나운서 목소리도 기계음처럼 들렸다. 규범이 대단한 무엇을 발견한 양,
“세종이가 내게 복을 선물한 거로구나.”
“복? 복이라니?”
“여기 봐봐.”
규범이 세종이 눈 앞에 바짝 만년필을 들이댔다.
“글씨 보이지?”
만년필촉에 한자로 福이 새겨져 있었다.
“나도 그 글씬 보지 못했는데. 정말 복 받을 복 자네. 더 의미가 있겠는걸.”
“너를 다시 만나는 날이 우리가 복 받는 날이 될 거야.”
규범은 말을 하면서 우표첩을 떠올렸다.
“우표 좋아하니?”
“응 그럼. 난 우표를 가지고 놀면서 세계여행을 하는데. 우표는 왜?”
“으응. 다음에 만나면 꼭 우표첩을 널 위해 준비해둘게.”
“준비된 우표첩?”
“말하고 보니 그러네. 준비된 우표첩이라, 멋있는데. 빨리 우리 다시 만나야 되겠는걸.”
그러나 그 둘은 이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거의 이십 년 만에 세종이를 찾아 떠나는 규범의 손에는 검정색 종이 커버의 우표첩이 들려 있었다. 규범이는 대학 때와 사법연수원 시절, 두 번 세종이의 정선 원적지로 편지를 띄워 보낸 적이 있었다. 편지 겉봉에,
「우체부 아저씨, 가장 친한 친구를 찾고 있습니다. 중학교 생활부에 적힌 원적지 주소만 보고 편지를 띄우니 그 사이 이사를 갔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골사람들이니 서로 가까이 잘 알고 지낼 것 같은데, 이 편지를 내 친구에게 전해질 수 있게 도와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우체부 아저씨에게 보내는 부탁의 긴 글을 긴 편지와 함께 써서 부쳤다. 그러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세종아,
나 규범이야. 당연히 알지?
얼마 만에 불러보는 이름이니. 다시 불러볼게.
세종아,
내 목소리도 이 편지도 네가 듣고 보게 되면 정말 좋겠다. 네 주소를 알아야 해서 중학교를 갔단다. 우리가 함께 다니던 중학교, 세종이와 규범이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도 둘러봤어. 지나가버린 시간들, 돌아가지 못할 시간들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더라. 세종이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이렇게 너를 그리워하고 있는데 운동장 어디에선가 네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어. 돌아보니 너는 없었지만 내 가슴 안으로 네가 더 깊숙이 들어와 채워지는 거야. 그 때 저리도록 아픈 그리움에 무척 네가 보고 싶었어. 가슴에 깊이 채우면 채울수록 그리움은 비움으로 더 깊게 쌓이고 이래서 더 널 보고 싶게 했나봐. 운동장을 빠져 나와 교문에선 돌아서서 네 이름 석자를 크게 불러댔단다. 이렇게 말이다.
보고 싶다, 친구야. 보고 싶다, 세종아.
너랑 헤어진 직 후 너와 약속한 우표첩을 바로 준비해뒀는데......
바쁘다는 것도 지나고나니 다 핑계에 불과하더구나. 바쁘더라도 시간을 내서 만나야 하는 게 친군데. 세종이, 네가 잘 알고 있듯이 나는 공부로만 키워졌어.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대학에 들어와서도 다른 어떤 일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단다. 오로지 공부 그리고 시험. 그래서 공부로는 다 이룬 듯한 직업을 곧 가질 것 같다. 현재 사법고시 2차 시험을 앞두고 문득 세종이가 생각 나 중학교로 찾아갔고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단다. 공부로는 다 이룬 듯한? 이 글귀가 지금 나를 무척 슬프게 만든다. 공부밖에 모르는 내가 슈퍼마켓에 놓여있는 공산품 같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거든. 공부는 물건을 찍어대는 틀처럼 여겨져서 그 틀 안에 갇힌 생활이 얼마나 답답한지 세종이는 상상이 가니? 나는 나를 포함해서 고시에 열중인 친구들을 0.6평인생이라고 말하곤 한단다. 고시실에 내가 차지한 영역을 실제로 재어보니 0.6평 남짓 되었거든.
이 좁은 곳에서 미래의 모든 것을 해결하고 확보하고 대접 받으려고 하는 이들 속에 내가 지금 끼어있단다. 내 말이 자랑 같이 들리니? 오랜만에 이토록 만나고 싶은 친구에게 내 자랑이나 하려드는 그런 못난이는 아니란다. 삶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소중한 것을 하고 싶은 게 어찌 나라고 예외이겠니. 하지만 지금은 엄마의 욕심을 채워드려야 하는 자식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할 뿐이란다. 내게 온 정성을 쏟고 사시는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보답해야 하는 것도 지금의 내 삶일 수밖에 없고. 그런데, 공부만으로 키워져서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것, 더 소중한 것에 대해 두려움도 크단다. 이러다가 갇힌 삶만 살다가 후회하고 말지 않을까, 벌써 이런 걱정까지도 들거든.
세종아,
넌 지금 무엇을 하며 지내니? 너도 대학생? 그 때 학교를 다닐 수 없다고 하며 광산에서 일해야 한다고 했었는데 설마 지금까지도 광산에 있는 건 아니겠지?
세종아,
얼른 너를 만나고 싶다. 우린 중학교 1학년 때 헤어지고 이젠 어른이 다 된 대학생으로 컸으니 키도 몸도 다 크게 변해있겠지. 그래서 최근에 찍은 내 사진 한 장을 같이 보내본다.
나, 규범이는 이렇게 어른이 됐다.
어때? 보기 좋게 어른이 된 듯 보이니? 나의 어른 된 모습을 보고 세종이가 좋아하면 좋으련만. 이 편지, 너와 헤어진 긴 시간만큼 길게 쓰고 싶지만, 만나서 정작 할 말이 없을까봐 이만 이쯤에서 줄이려고 해.
너를 만나 처음 하고 싶은 것은, 우리 어른답게 술을 마시는 거야. 그리고 중학생 때는 상상도 못한 일, 술에 취해도 보는 거야. 어때, 세종이는? 세종이와 같이 술을 마시다니... 얼른 널 보고 싶다. 어른이 된 세종이에 대해서는 만나서 들을게.
다시 불러본다.
세종아.
들리지?
보고 싶은 내 친구, 곧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가슴이 두근두근 벅차다.
안녕이란 말은 안 할게. 대신,
세종아, 곧 보자꾸나.
헤어지던 날, 정릉에서 종구 한 게임만 하고난 뒤 서둘러 이모 집으로 향하던 세종이가 이런 말을 했다.
“사고 나기 며칠 전, 엄마가 이랬어. 보고 싶은 사람이 떠오르면 얼굴을 들어 달님을 보라고. 달님 속에 그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엄마·아빠로 자주 보게 된 달님인데 오늘 이후로 더 자주 달님을 보게 될 것 같네. 다시 보니깐 규범이 얼굴이 동그란 게 달님처럼 잘 생겼다. 우리, 안녕 하면서 슬프게 헤어지지 말자. 다시 만날 우리인데 뭐, 그치? 내일 볼 것 같이 또 보자, 하고 헤어지는 거다.”
또 보자던, 또 곧 볼 거라던 친구는 끝내 다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때 답장이 없었구나. 헤어진 후 삼 년 뒤쯤, 그러니까 학교를 다니면 고등학교 일학년이었을 세종이는 갱붕괴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네가 규범이로구나?”
세종의 큰 어머니가 규범이를 반갑게 맞았지만 이내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녀는 규범이가 보낸 두 통의 편지를 규범이에게 돌려주며 세종이의 일기장도 함께 건넸다.
“일기엔 온통 규범이 얘기밖에 없더구나. 규범이 편지를 받고 이 일기장과 사고 소식을 써서 보낼까 했는데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단다. 그 어린 것을 우리가 죽인 것 같아서 말이다. 학교에 보낼 아이를 탄광에 보냈으니.”
큰 어머니는 소리 내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일기장을 받아 과학선생 앞에서 세종이와 함께 갔다고 거짓말을 했던 정선 아우라지로 향했다. 글.그림=오동명/ 4편으로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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