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은 최고와 불변을 상징한다"

  • 등록 2013.03.18 09: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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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신개념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10)

27편 -.

 

나이 서른다섯 이후에나 수필을 쓸 수 있다던 어느 수필가의 나이의 의미를 어렴풋하게 이해할 듯하다. 살아서 꼭 해야 할 일을 알아가는 것이 나이듦의 의미이지 않을까. 살아서 꼭 해야 할 일을 알아가는 것은 내겐 이해이며 수용이었다. 환자들에게서 의사인 내가 배운 행동은 경청이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꼭 닮은 환자였다. 닮았다기보다는 피부색깔로 받은 선입감에 떠오르게 한 인상착의였다. 분명히 그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은 알콜중독이다. 수차례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하던 그가 정색을 하며 애틀란타에 가보았느냐고 물어왔다. 처음엔 미국의 동해바다인 대서양으로 알고 자주 가는 바다라 그렇다고 끄덕여줬다.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보고 왔느냐고 그가 다시 물었을 때 목사의 고향인 애틀란타 시임을 알아차렸다. 가보지 못했다고 했다. 꼭 가보라던 그의 목소리가 정중했다. 그래 보겠다고 했지만 환자와의 약속은 건성으로 한 게 되고 말았다.

 

그 후 삼년이 지나서 미시시피강 하구의 도시 뉴올리언즈로 2박 3일의 긴 자동차여행을 떠났다. 59번 하이웨이를 나와 뉴올리언즈로 들어서자마자 화장실이 급해 맥도널드로 들어갔다. 화장실 문이 잠겨있었다. 쿼터코인을 넣어야 문이 열리는 화장실 앞에 모인 흑인들 때문에 나는 머뭇거리고 주춤하며 그들을 잔뜩 경계했다. 급했지만 일을 보지도 않고 도망치듯 맥도널드를 나와버렸다. 서두르던 발걸음처럼 빠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서워. 지저분해.

 

프렌치쿼터로 옮긴 뒤 한국의 시골 오일장 같은 거리에서 재즈연주를 서서 듣고 있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고 돌아보니 부부로 보이는 흑인 노인들이 자리를 옆으로 좁히고 있었다. 흰 이빨을 드러낸 웃음을 띠며 앉으라고 빈자리 쪽을 검은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감사하다고는 했지만 앉지 않았다. 조금 후에 백인 아주머니가 그 빈자리를 메웠다. 어깨가 절로 들썩이는 연주는 계속 되었다. 한 곡이 끝나자 재즈와 비슷한 발음의 환호가 뒤에서 크게 들렸다. 마치 그들이 외치는 ‘째스’는 앵콜과 같았다. 조심스럽게 돌아보니 흑인 노부부와 백인 아주머니가 일어나 서로 마주보며 춤추듯 흥겹게 어깨를 덩실대고 있었다. 내게 자리를 비워준 흑인 부부가 역시 나를 보며 방금 전처럼 웃어 보일 때 내 얼굴이 이젠 화끈거렸다. 부끄러웠다. 어울리지 못해서라기보다는 타인의 선의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닫혀있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가두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자기와 타인이다. 의식과 행동으로 드러난다. 자기를 스스로 닫으면서 자기를 가둔다. 타인의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자발에 의해서다. 옆의 백인까지 웃음을 보내올 때 어제 오후 늦게 지나쳐온 앨라배마 주의 몽고메리 시가 떠올랐다. 지나칠 때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흑인을 억압하며 백인 자기들만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을 오십년 전이 떠올랐다. 버스와 백인과 흑인 그리고 좌석과 양보거부 그리고 흑과 백, 흑백분리라는 차별과 짓밟힌 인간의 존엄......

 

미국 땅에서의 소수집단인 유색인종인 내가 오십년 후가 지난 지금 흑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인간을 짓밟던 또 다른 인간 백인인 양 행세하고 있는 듯해서 얼굴은 더 화끈거렸다. 나는 로사 파크스가 아니라 좌석양보를 거부했다 하여 로사를 체포하게 한 백인 버스운전사였다. 나를 가두는 것이 남을 억누르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내 얼굴에 나타내고 있었다. 창피해서 신나는 재즈연주를 더 들을 수가 없었다.

 

엄마를 부정하면서도 동색으로 젖어들게 한 차등과 선민이란 의식에 절로 덩실덩실 춤추게 하는 음악마저도 슬프게 들려왔다. 성급했을 것이고 당황했을 것이다. 프렌치쿼터는 유명세만큼 크지도 넓지도 않았다. 피해온 흑인 노부부를 거리에서 또 마주쳤다. 그는 말을 내게 걸어왔다. 일본인이냐. 나는 임기응변의 탈을 내 얼굴에 씌웠다. 끄덕끄덕 고개로 거짓말을 했고, 비로소 웃어 보이며 가면을 내 스스로에게 씌웠다. 남에게 보내는 미소는 나에게 조소로 돌아온다. 가면 안에 엄마가 들어있었다.

 

너는 최고가 되어야 해.

 

최고이어야 할 내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쩌면 당시가 아니라 삼년 후의 이 경험이 애틀란타를 가보라던 그 환자를 마틴 루터 킹으로 보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 후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를 마치고 애틀란타 외곽의 툴루스 시에서 개원했다. 한인타운이 아닌 멕시칸과 흑인이 많이 사는 곳에 내 첫 사무실을 열었고 지금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부끄러움은 얼굴을 붉힌다. 붉힌다는 것은 물드는 것과 같다. 부끄러움으로 물들게 한 수치심은 용기로 바꿔지기도 한다. 결코 용기라고 치부할 순 없지만 거부를 내가 거절함으로서 물들어가는 수용만은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해로 시작되는 수용은 흡수이기도 하다. 동화이기도 하다. 받아들이는 것은 용기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받아들이는 것 속엔 과거도 포함된다. 과거의 유일한 남자, 오빠가 생각난다. 그리고 유일한 과거의 흔적인 우표첩이 생각난다. ‘오빠’라고 옹알거리듯 부르며 편지를 다시 써보지만 가슴만 먹먹해온다.

 

너무 길었어.

 

가슴이 옹망추니가 된다. 마음을 오그라들게 한 과거는 그런 그대로 한동안 지속되었다. 향수라는 단어는 사치스럽다. 슬픔이고 아픔이다. 그리움이고 보고 싶음이다. 길어짐은 어색을 동반해서 더 머뭇거리게 하고 더 주춤거리게 한다. 과거는 현재를 묶었다. 긴 시간 써둔 편지는 묵혀두기로 하고 서울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음으로서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과거로 다가가기로 한다. 엄마의 죽음 이후 옮겨 바뀐 경기도 주소를 지갑에 넣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십 삼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내가 처음 챙긴 목걸이를 서울행 여객기에서 더듬고 있다.

 

‘1’ 모양의 심플한 디자인의 금목걸이는 모양새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단조롭다고 말해야 더 적절할 듯하다.

 

오빠도 아직 갖고 있을까.

 

미국으로 나온 이후 서랍에 처박아두고 한 번도 꺼내보지 않은 목걸이는 엄마가 우리 남매에게 동시에 준 선물이었다. 모양을 내기 위해 금속공예가가 두드리고 다듬고 새겼듯이, 두드려지고 다듬어지고 새겨지고자 각인된 엄마의 욕심이며 그 징표였다.

 

1의 의미를 잊지 말아라.

 

“누런색은 촌스러워요.”

 

어린 내가 짜증을 냈지만,

 

“황금은 최고와 불변을 상징해왔다.”

 

늘 차고 다니라며 엄마는 우리 목에 황금목걸이를 걸어줬다. 지금 이 세상에 없는 엄마를 엄마의 혼인 양 남겨진 목걸이로 더듬고 있다. 엄마 앞에서만 걸쳤고 엄마를 돌아서자마자 처음 한 일은 이 목걸이를 내 목에서 걷어내는 것이었다. 숨기고 감춰야했다. 목걸이가 싫었지만 그렇다고 버릴 순 없었다. 엄마를 영영 볼 수 없게 된 상황에서도 없앨 수 없는 게 이 황금목걸이였다.

 

“우리나라와 같이 여자들이 무시되고 여성차별, 여성모욕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구나, 사회에서든 의식에서든 남존여비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는 이 나라에선 여자는 더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자라고 당해서는 안 된다. 약자는 스스로 힘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전문직을 가져야 한다. 선생님으로 대접 받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업신여기지 못한다. 오빠는 영감님 소리를 들어야 하고 귀희는 선생님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하는데, 학교 선생이란 게 어떤 지위에 있는지는 네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교단이 무시되는 데에는 학생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먼저 교사들의 자질이 문제다. 사학재단은 오로지 교육을 사업수단, 즉 이익집단화시킨 지 오래고 체신이란 허위의 얼굴마담으로 전락시킨 지도 오래 되었다. 귀희가 더 잘 알 테니 그만 말하겠다. 귀희가 학교선생이라니, 이건 당치도 않다. 엄마가 귀희의 장래를 고민하고 해봐도 의사만한 전문직은 없다는 확신엔 변함이 없단다. 귀희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 보아하니 그림에도 소질이 있고 남들도 있다고 하다만 네가 잘 알다시피 그림 그리는 사람에겐 쟁이라고 붙질 않느냐.

 

쟁이는 좋게는 장인을 말하지만 기능공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더 무시당할 수 있다. 그림이나 그리고 앉아있는 사람치고 온전한 사람을 못 봤다. 봐라. 유명한 화가 어느 누가 제대로 된 인간이 하나라도 있다니? 고흐·고갱·모딜리아니·끌레 뭐 나열하려면 오늘 밤을 다 새워도 끝나지 않을 것이야. 최고의 화가라는 피카소를 봐라. 그 그림이 나는 도대체 그림으로 보이지 않더만, 그래서 그림이라 않고 큐비즘이라 했는지 모르겠다만, 그의 그림은 그렇다하더라도 그의 삶을 봐라. 얼마나 추했니. 칠순에 가까운 그 공산주의자 노파가 스무 살의 앳된 화가 지망생 처녀를 꼬셔... 그 추태, 그만 두자. 내 입이 더러워지는구나. 그래도 귀희의 손재주나 감각은 의사에게도 적합하리라고 엄마는 사료된다. 미국에서도 한국인 외과의사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젓가락질하며 사는 민족이기에, 이는 손을 잘 쓴다는 말일 게다. 손은 바로 두뇌와 직결돼 있다는 말은 귀희도 들어봤을 거야. 넌 똑똑하니 손감각도 뛰어난 것이다. 알고 있니?”

 

나는 엄마의 끊이지 않을 말 속에 중얼거리듯 끼어들었다.

 

“그림 그리는 게 그냥 난 좋아요. 마음이 가장 편해지거든요. 엄마, 난 손재주는 별로 없는 것 같구요.”

 

엄마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더 잇지는 않았지만 이미 나는 엄마의 말이 들리고 있었다. 한참 눈으로만 말하고 침묵을 유지하던 엄마가 나를 안았다.

 

“바로 그런 거란다. 그냥 좋은 것, 그 좋은 것을 하면서 대우대접, 존경까지 받을 수 있다면 더 좋지 않겠니?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보렴. 그는 해부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림과 인체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천재 예술가 다 빈치가 증명해 보이지 않았느냐.”

 

의사는 아니었잖아요, 라고 입 안에서만 말을 오물거려야 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해부학이 필요했던 거지요, 역시 내뱉지 못하고 말을 씹었다.

 

“엄마, 그런데 엄마는 왜 화가가 되겠다는 아빠랑 결혼했어? 아빠는 미대를 다녔잖아.”

 

엄마는 얼굴을 떨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빠가 그림에 소질이 없더구나. 나를 그렸는데 전혀 나를 닮지 않았어. 아빠가 그림이 좋아서 미대를 갔다고는 하지만, 아빠는 법학이나 경제학을 공부했어야 했단다.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 살려고 한다면 세상의 무능자가 되기 십상이다. 세상의 무능자는 본인에겐 무력자가 된다. 어떻게 제가 좋다는 것만 하고 살 수 있겠니? 그렇다면 세상은 온통 놀고 먹는 자들만 득시글거릴 것이야. 극히 적어서 천만 다행이지만 모두 서울역 앞의 노숙자이듯 산다면 어찌 인간세계가 다른 동물과 다르다 할 수 있겠니. 구원이란 말은 기독교에서 쓰지만 인간관계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단다. 엄마가 아빠의 구원자라고 믿는다.”

 

늘 무표정한 아빠에게서 문득 십자가의 예수를 떠올린 건 왜일까? 엄마가 아빠의 구원자가 아니라 아빠가 엄마의 구원자일 수 있단 생각도 고상의 예수님 표정과 함께 겹쳤다.

 

엄마도 곰곰 무언가에 젖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수씨는 참 곰살가운 데가 있어요.

 

엄마가 피식 웃으며 표정이 바뀐다.

 

내가 궁상맞긴 하지요.

 

엄마는 다시 소리까지 내며 웃어댔다.

 

당신은 참 따뜻하다구요.

 

엄마와 아빠가 사는 것을 보면 무엇 때문에 결혼을 했을까, 이 의문이 어린 나이에도 내 고개를 설레설레 젓게 만들곤 했는데, 엄마가 이렇듯 혼자 생각에 젖어 웃을 때, 내 부모님의 삶은 과거의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그러나 다시 생각해도 그러할 결론을 내려 보기도 한다. 그들, 적어도 엄마의 현재나 미래의 삶은 오로지 우리 남매에게 있었고 그들의 다른 삶을 엿보기조차 할 수 없었다. 생각에 묻힐 때만 엄마는 가끔 웃음을 우리 남매에게 보여줄 뿐이다.

 

“엄마는 어디가 좋아서 아빠랑 결혼했어?” <글.그림=오동명/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오동명 작가 momsal2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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