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어수선한 기내가 해진 뒤 늦은 밤 산속의 절간처럼 어둠이 깔리고 조용하다. 간간이 복도를 지나는 승객이 까치발을 들고 걷는 듯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몇 칸 너머 옆 좌석엔 스포트등을 켜고 책을 읽고 이마저도 스님이 산방에 홀로 불경을 외는 듯 조요하다. 고개베개에 기대어 담요를 덮고 잠이 든 바로 옆 자리의 백인 아줌마는 새근새근 코까지 곤다. 소리가 무음모드로 더 적막하게 사위를 돋운다. 방해하지 않으려고 기내 쪽창을 조심스럽게 반쯤 들어 올리니 의외로 밖은 밝다. 밖의 하늘은 기내와 같이 어둡지만 달빛에 반사된 지상은 스키장의 밤처럼 훤하다. 몸을 창으로 바싹 붙여 조금만 연 창으로 세상을 내려다본다.
설경이다. 아니다. 얼음이다. 얼음 사이로 뱀의 궤적이 흐른다. 가늘고 검은 줄무늬들은 강일 것이다. 얼음을 흐르는 강. 알래스카? 창을 뚫고 나갈 듯 머리를 창 밖으로 내밀어본다. 어떤 인간도 발을 들이지 못했을 곳이라는 아득함이 들자 신기한 마음이 신선해진다. 그 얼음 위를 걷고 있기라도 한 듯 몸이 싸늘해지고 머리가 차가워지며 정신이 든다. 스키장에서 그러하듯 비행기가 스키처럼 활강한다. 양 귀 곁을 스쳐 빠져나가는 칼바람이 시간을 거슬러 조탁하며 지나고 있다.
아빠가 미대를 다녔다는데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다. 집엔 아빠의 그림 한 점 없다. 우리 남매에게 아빠는 조경사업가였다. 국제 무슨 조경상인가를 받았다는 경기도의 한 수목원을 아빠가 조성했다는 얘기를 우리는 엄마나 아빠에게선 듣지 못했다.
“너희 아빠 같더라.”
“큰 고모부의 작품이래.”
친구나 사촌에게서 듣는 아빠의 근황은 전혀 실감이 들지 않았다. 여성월간지에 소개된 기사의 사진을 보고 ‘거, 좋네.’ 이 정도의 감흥은 단절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빠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집으로 왔다. 함께 하는 저녁 식사에서도 아빠는 엄마 말을 잘 들으라고만 말했다. 물론 웃지 않았다.
“자넨 늘 실없는 사람처럼 웃기만 하는가? 그래, 요즘 뭘로 가장노릇을 하고 있지?”
“아빠!”
엄마는 할아버지의 입을 막아보지만,
“다 됐더라. 판사도 검사도. 넌 집구석으로 들어앉아 도대체 뭘 하며 살고 있는 거냐?”
할아버지는 엄마가 막는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 있지만은 않았다. 옆에서 여동생이 거든다.
“희주, 걔 오빠 알지? 현수 오빠도 어디라더라? 서울동부지법이든가 서부지법이든가로 옮겼다는데 우연히 백화점에서 봤는데 언니 소식을 묻더라고.”
아빠는 강남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꽤 알려져 수입도 괜찮았다.
“누가 이런 걸 제 손으로 사서 들고 다닌다니. 명품은 제 돈 주고 사는 것보다 남이 사줘서 받는 재미가 쏠쏠한 법이란다.”
할머니는 아빠가 사온 비싼 명품 핸드백에도 만족치 못했다.
“그러니까 사드리는 거잖아, 엄마.”
엄마가 짜증을 냈다.
“그래, 사위가 남이라니? 돈 주고 누구든 못 살까. 지위, 자리라는 말이다. 그 받는 재미라는 게. 고등학교 코흘리개 애들 돈을 탐하는 것 같아 어디 들고나 다니겠니? 장롱 안에 잘 모셔둬야지. 니가 지금 판사였어 봐라. 지금쯤...”
생각이 짧은 건지, 한 수 위인 건지 방송사 기자인 여동생은 낄 때 안 낄 때의 구별이 없다.
“나도 더 어려운 기자시험을 왜 봤는지 몰라. 판사나 검사나 할 걸. 밖으로 나가자. 언니 맥주 좋아하지? 형부도 아마? 내가 한 턱 쏠게, 가자.”
자리를 피해주기도 하는 요령꾼 여동생은 언니인 엄마의 부아를 결국 더 건드리고 만다.
“초등학교 때부터였지? 언니를 못 따라잡아 지 엄마까지 여간 아니었잖아. 그 형준이 오빠도 검사됐더라. 검찰청에서 봤는데 나한테, 기자짓하느라 배 고프지? 하며 촌지를 챙겨주는데 제법 두둑하던데. 우린 쥐꼬리만한 취재비가 용돈으론 고작인데. 하기야 월급으로만 따진다면야 내가 훨 많지만...”
동생은 이제라도 다시 시작해봐, 했고 돌아오는 길에 아빠도 엄마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
“소연아. 나 때문에 중도 포기했지만 이년만 더 하면 붙지 않겠어? 그 똑똑한 동생도 인정하잖아. 언니의 머리를.”
그러나 엄마는 야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절대 싫어. 내가 이제 된들, 쟤네들 밑에서? 싫어. 절대 난!”
아빠는 엄마와 상의도 없이 미술학원 문을 닫았다.
“대학선배가 조경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네. 요즘 아파트 건설이 붐이잖아. 경쟁이 붙어 아파트만 잘 지어서는 안 되나봐. 단지 내 조경이 아파트분양의 성패를 가름한다는 게 최근 추세라며 선배가 권유해서.”
엄마는 펄쩍 뛰었다.
“당신이 사업을 한다고? 당신이?”
엄마 말 그대로였다. 상은 많이 받는데 실속이 없다. 제 돈은커녕 든 비용도 받아내질 못한다.
“그렇다고 내 양심을 속이며 대충 지을 수는 없어. 조경도 바로 자연인데.”
아빠는 우리가 아빠의 웃음을 느낄 수 있을 나이가 되었을 때 이미 웃음을 잃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오는 것은 꼭이 일이 많아서, 바빠서만은 아니었다. 면목이었을 것이다. 가족 볼 면목, 아내 볼 면목. 마음 착한 사람은 상대를 지나치게 헤아리는 경향이 짙다. 지나침은 부족함보다 못하다. 엄마는 우리에게 점점 집착하게 되었다. 마음씨 착한 아빠를 엄마라고 달리 어찌 해 볼 순 없었다. 처음 엄마는 아빠의 이런 점이 눈에 들었고 좋았다. 처음의 아빠로 돌아오길 고대하면서도 아빠를 한 번도 다그치는 적이 없다. 스스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비워낸 가슴을 채워줄 수 있었던 것은 우리였다. 우리가 엄마의 차지가 되면서 아빠는 우리에게서 더 멀어져갔다. 상황은 의식을 배척하고 현실은 의지를 배제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서도 꼬이고 깊어질수록 아픈 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꼬이고 아플 것도 없다.
‘잘 나가던 당신을 내가 가로막았고.’
‘잘 웃게 한 당신은 나로서 웃음을 잃고.’
처음처럼은 이래서 영원히 불가능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래서 외쳐댈 뿐, 그래서 글씨에나 써서 새기라는 상업용 언어에 불과하다. 돌아오지 않는 추억의 과거일 뿐이다. 메아리도 표어도 실체는 될 수 없다. 상처만 깊어질 뿐이다. 성공처럼 보이는 우리 남매의 성과의 현혹은 전시효과의 신기루며 현시효과의 무지개였다.
오빠의 구속으로 엄마가 결혼 후 거부해왔던 과거와 다시 인연을 맺는다. 대학 2학년생인 오빠가 법대 도서관에서 밤늦게 사법시험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 교문을 나서는데 경찰이 잡았다. 가방 안을 보자는 경찰이 등에서 내려놓기도 전에 불손하게 가방 안을 헤집으며 뒤졌다. 오빠의 가방은 다른 학생들 것보다 두툼했고 무거웠다. 두꺼운 서적들 때문이었다. 오빠가 경찰에 나름 공손하게 따졌다.
“이렇게 함부로 주인 허락도 떨어지기 전에 뒤져도 되느냐? 보호되어야 할 사물이다. 내가 열어 보여준다지 않았느냐? 그런데...”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경 옆에 있던 경찰 군화발이 조인트를 강타했다.
“뭔 말이 많아? 공무집행방위로 처넣기 전에 순순히 잠자코 있어. 학생이 왜 이리 늦게 나오느냐?”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뭐라 하는 대한민국 공권력? 울화가 치밀었다.
“연애도 늦게까지 못합니까? 대한민국 대학생은?”
그때는 전국의 대학가가 시끄러웠다. 매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경찰이 학교 정문을 지키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거의 매년 일어나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오빠는 이런 대학생들의 시국참여를 철저히 외면하며 1학년 말부터 사법시험에 일찍이 몸을 담았다. 지금은 내겐 때가 아니야. 아직 일러. 나중에 검사가 되고 변호사가 돼서 해도 늦지 않는 게 진정한 현실참여이며 지금의 외면은 이성적 실천의 유보일 뿐. 이것은 엄마의 생각과도 같았다. 엄마가 주입한 것은 아니지만 오빠는 엄마가 가엾다고 한 날 이후 참으로 공부에 열중했다. 이젠 엄마가 하라고 해서 하진 않아. 그즈음 내가 물은 적이 있었다.
“오빠는 검사도 되고 버스운전사도 되겠다며? 그 꿈은?”
나도 불가능한 것쯤은 안다. 오빠의 꿈을 그저 묻고 싶었다. 오빠는 말을 바꾸긴 했지만 어릴 적 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버스 같은 큰 차를 몰고 싶지, 당연히. 단지 운전기사만 아닐 뿐이지.”
아직 운전면허가 없던 오빠는 트럭으로 시험 보는 운전면허 일급부터 따겠다며 꿈의 일부 잔존을 덧붙였다.
“버스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겠다며? 오빠 맘 변했네. 법대 들어가더니.”
오빠는 우표첩을 꺼내 보였다.
“봐봐. 타고 다닐 것들은 많아. 더 빠른 것도 많고. 지금 같아선 경비행기 조종사라면 더 좋겠단 생각이 든다. 더 빨리 더 멀리 더 많이 돌아다닐 수 있을 테니까. 그때는 버스가 가장 멀리 다니는 줄 알았지. 그때는 어렸으니까.”
경찰은 그 우표첩을 오빠의 가방에서 꺼내 들춰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남자라서 빼앗기지 않는 오빠를 보고 남자가 부러웠지만 오빠도 경찰에겐 어쩔 수 없었다. 책만 파던 오빠의 유일한 외유는 우표첩으로 세계를 도는 것이었다. 갑갑한 좁은 공간에서 더 답답한 법을 외우다 가끔 들여다보는 우표들은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트여주곤 했다. 몇 년 만 죽어라 파면 그 뒤엔... 엉덩이를 의자에 붙여둘 수 있게 한 우표들을 뒤지던 경찰이 전경에게 경찰로 끌고 가라며 우표첩을 돌려주지 않고 압수해 갔다. 함부로 다뤄 우표첩에서 흘러나온 우표들이 거리 위로 여러 장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겨드랑이 안으로 파고든 전경들의 완력에 끌려가며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어야 했다. 십여 년 애지중지 보물 같던 우표들이 전경들의 군화에 짓밟히고 찢겨져나가고 있었다. 전경 군중 속 누군가가 그랬다.
“대학생이 우표모으기를 아직도 하고 있어? 그러고도 이 대학에 들어왔데? 저놈, 가짜 대학생 아냐?”
철망으로 유리창을 막은 경찰버스 안에는 다른 학생들도 붙잡혀 와 있었다. 오빠를 알아본 법대 선배였다.
“규범이 아냐? 니가 여길 어쩐 일이냐? 너도 우리 편이었어? 아니지 않았나?”
오빠는 선배를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고, 데모하다 들어온 게 아니고, 이유도 모르고 여길. 이건 아닌데.”
소리가 점점 죽어갔다. 경찰버스 안에서 반가워야 할 선배가 전경들 보기보다 더 민망스러웠다.
“그렇지, 아니지? 넌 아니지? 네가 이런 델 올 리 없지. 넌 어서 판검사가 되어야 할 귀하디귀한 영감님이시어야 하니까.”
선배는 경찰을 불렀다.
“번지수를 잘못 짚었네. 이 친구는 아닙니다요. 절대 아니라구요. 당신들이 닭장에 처박아 넣어두고 하대할 그럴 인물이 아니올시다. 곧 공안검사님이 되실 귀하신 몸, 당신의 상사로 곧 모셔야 할 분이라 이겁니다. 큰 일 나기 전에 저 친구, 닭장에서 풀어드려야 할 것이외다.”
가만히 듣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궁색하긴 하지만.
“오 선배님, 내가 같이 동참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 생각이...”
하지만 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래? 네 생각이, 도서관에 처박아둔 그 생각이 길바닥에 뒹구는 우리의 생각과 같다? 이 말인가? 왜 말꼬리를 감추지?”
그때였다. 우표첩을 빼앗고 우표들을 땅바닥에 흘려 짓밟게 한 그 경찰이 버스로 올라왔다.
“이 우표, 누구 꺼지?”
선배의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손을 들자, 경찰이 다가와 오빠의 뺨을 내리갈겼다.
“이 빨갱이 새끼.”
뒤에 있던 선배가 더 놀라 소리를 질렀다.
“뭐, 규범이가?”
경찰은 우표첩을 치켜보였다. 또 우표가 몇 장 떨어지고 있었다.
“조선우표? 이거 어디서 났어? 그리고 베트남, 러시아, 쿠바... 이것 다 빨갱이 새끼들 국가들 우표 아냐?”
오빠는 그제야 왜 경찰버스에 끌려왔는지를 실감했다. 대답도 못하고 웃는 오빠의 얼굴에 다시 경찰군화가 날아들었다.
“이 빨갱이 새끼가 웃어? 법전 안에 이것들을 숨기고 다녀? 우리가 못 찾아낼 줄 알고? 이 빨갱이 새끼.”
관악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세웠고 그 밤새 경찰들은 데모 주동자를 색출해냈다며 의기양양해서 상부에 보고했고 상부에선 바로 집을 수색하라는 신속명령을 배달했다. 가택수색을 꼭두새벽 졸지에 당하고난 뒤 엄마는 거의 20여 년 만에 법대졸업동문 주소록을 황급히 뒤지기 시작했다.
“소련·동구 현대소설전집을 경찰이 증거물로 가져갔다. 왜? 어떻게 엮어 넣으려고?” 글.그림=오동명/ 24편으로 계속 >>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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