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 조조(曹操)는 북상해 새외에 있는 오환(烏桓)¹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였다. 남방의 유비(劉備)와 손권(孫權)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당시에 원정을 감행하는 것은 무척 위험하였다. 많은 장수들이 원정하지 말 것을 권하였으나 조조는 군대를 거느리고 출격해 오환을 무너뜨리고 기본적으로 북방을 통일하는 대업을 완성하였다. 개선한 이후에 조조는 당초에 누가 북벌에 동의하지 않았는지 조사하라고 명했다. 반대하였던 사람들은 중벌을 받을까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데 웬걸 생각지도 않게 조조는 그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모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북벌은 이미 대승을 거뒀는데 어째서 반대한 사람에게 오히려 상을 내린다는 말인가. 조조가 말했다. “북벌의 일은 분명 대단히 위험하였다. 내가 비록 요행히 승리를 거뒀지만 그것은 하늘이 도운 덕분이지, 내 결정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여러 사람들의 반대는 옳은 것이었다. 만전을 기하자는 계책에서 나온 조언이기에 상을 내린 것이다. 나는 모두가 이후에도 나와 다른 의견을 거리낌 없이 개진하기를 바란다.” 이후 사람들은 조조를 위하여 전심전력으로 충성하였다. 조조는 여러
당(唐) 왕조 때 누사덕(婁師德)¹은 세가공자로 몇 대에 걸쳐 삼공에 올랐다. 자기 대에도 조정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다. 나중에 동생이 대주(代州)에 태수로 가게 되자 떠나기 전에 그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 누사덕이 당부하였다. “누 씨 집안은 대대손손 조정의 은혜를 입었다. 지금 우리 형제도 관직에 있다. 일반인은 우리 세가공자가 제멋대로 군다고 비판하고 있다. 네가 관직에 있을 때에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잘 견뎌내 우리 누 씨 가문을 욕되게 하지 말거라.” 동생이 대답하였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 내 얼굴에 침을 뱉어도 닦아버리면 그만이지요.” 누사덕은 고개를 가로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네가 침을 닦으면 속으로 원망하게 된다.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겠느냐! 누가 네게 침을 뱉거든 그저 침이 얼굴에서 마르도록 놔두어라.”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일반인이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려거든 반드시 일반인이 참을 수 없는 것까지 참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자고이래로 영웅 중에서 이것을 가장 멋들어지게 보여준 인물은 전국시대 때 제(
재능이 있으면서도 펼 기회를 만나지 못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첫째,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까닭에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다. 둘째, 큰 뜻을 가지고 문도무략(文韜武略)¹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좋은 때를 타고 나지 못하는 경우다. 강태공(姜太公)과 같은 경우라 할 것이다. 강태공은 자신의 총명함과 가진 재능과 지혜를 포악한 군주 주왕(紂王)을 돕는 데에 쓰지 않고 끝끝내 자신을 알아줄 현명한 군주를 기다렸다. 새가 나무를 골라 앉는 것처럼 시기와 형세를 판단하고 옳은 주군을 택하여 섬겼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때의 빈궁과 고통을 감내하여야 했다. 자신이 뜻을 이루지 못한 울분을 참아내야 했다. 목전의 공명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큰 뜻을 품은 사람은 평생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더라도 청렴결백하고 자기 자신을 아껴야 한다. 강직하고 아첨하지 않아야 한다.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자에게 빌붙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간사한 자와는 한 패거리가 되어 나쁜 짓을 저지르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타인이 조롱할까 염려해서도 안 된다. 굳은 의지로 자신이
공자는 말했다.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커다란 계책이 위태로워진다.”(『논어·위령공(衛靈公)』) 큰일을 하려면 반드시 전반적인 국면을 총괄적으로 보아야 한다. 작은 일에 뒤얽혀 벗어나지 못하면 안 된다. 일을 처리할 때 지엽적인 문제를 일률적으로 강조하면서 전반적인 형세를 간파하지 못하면 핵심을 붙잡지 못하게 된다. 중점을 잃고 단서가 뒤섞여 버린다. 어디에서 시작할지 알지 못한다. 사람을 쓰거나 일할 때 주류를 중하게 여겨야 한다. 작은 일 때문에 사업 발전에 장애가 돼서는 안 된다. 순금이 어디 있던가? 완벽한 사람이 있던가? 우리가 필요한 것은 개인의 재능이다. 과실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타인의 과실에 눈을 돌리는가? 지엽적인 문제를 도외시하면 자질구레한 일이나 잊어버려도 될 일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너그러이 용서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사람의 장점을 먼저 보아야 한다. 『권인백잠(勸忍百箴)』은 말한다 : 대세를 보는 사람은 자질구레한 지엽에 연연하지 않는다. 큰일을 하는 사람은 사소한 일을 따지지 않는다. 큰 옥규를 관상하는 사람은 자그마한 하자를 세밀히 살피지 않는다. 거대한 재목을 얻으려
큰 뜻이 있는 사람만이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분투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각각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자신만이 겪는 실패가 있다. 실패의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좌절을 맛보면 소침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에서 경험을 삼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걸 바탕으로 일어나 노력하고 분투하여야 한다. 이밀(李密, 582~619)은 수나라 말기 대란의 시대에 살았다. 일찍이 양현감(楊玄感)에게 의탁해 와강채(瓦崗寨)에서 봉기한 후 축록(逐鹿) 전쟁에 참가하였다. 618년에 이밀은 동부에서 왕세충(王世充)의 부하에게 패하여 세력이 고갈되자 잠시 이당(李唐)에게 귀순하였다. 이후 다시 당(唐)나라에 반기를 들어 기병했으나 실패 후 사살되었다. 이밀은 난세의 효웅이다. 몇 번 일어서고 몰락하며 적지 않은 좌절을 맛보았고 실의에 빠졌었다. 위(魏)선생의 이름은 실전되었다. 그는 북주(北周)에서 태어났다. 유가 경전을 두루 섭력하였고 악장(樂章)에 정통하였다. 그럼에도 성정이 담박해 권세를 탐하지 않았다. 비파, 거문고와 더불어 술 마시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수나라 말기 천하대란의 시기에 세상을 벗어나 향촌에 은거하였다. 수나라 대업(大業) 9년에 수
인생, 순조롭게만 살아갈 수는 있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어떤 일이든 풍파를 겪게 된다. 여러 곤란과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초래하였든 밖에서 밀려왔든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한 시기의 풍파를 인내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자신이 의지나 웅대한 뜻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른다. 지금 큰일을 이루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뜻을 높이 가져야 한다. 한 시점, 한 사건에 순조로우냐 장애가 있느냐에 마음 둬서는 안 된다. 일시적 성패에 골몰해서도 안 된다. 좌절을 겪었거들랑 강해지려 마음먹어야 한다. 어려움을 이기려 분투하면서 자기 이상을 실현하여야 한다. 성공하려면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태도가 있어야 한다. 장애물은 사람의 의지를 연마하는 가장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좌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큰일을 이룰 수 없다. 『맹자·고자하(告子下)』에 익숙한 말이 나온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혀 그 근골을 지치게 하며,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곤궁하게 하여서 행하는 일이 뜻과 같지 않게 한다. 그 마음을 움직여서 그 성질을 참게 해, 일찍이 할 수 없었던 일
대만(臺灣) 총통 장개석(蔣介石, 1887~1975)이 세상을 뜬 그 해, 둘째아들 장위국(蔣緯國, 1916~1997)의 계급은 중장(中將)이었다. 중장에 앉은 지 14년이나 된 해였다. 국민당(國民黨)의 규정에 따르면 14년 동안 중장에 있다가 상장(上將)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강제로 퇴역하여야 했고 계급도 따라서 취소되어야 했다. 상장은 종신직이었다. 임시총통이 된 장남 장경국(蔣經國, 1901~1988)은 장위국을 승진시킬 생각이 없었다. 장위국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부친 장개석의 장례식이 끝나고 모친 송미령(宋美齡, 1898~2003)이 미국으로 안거하러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떠나는 그 날, 장 씨 형제는 전송하러 나갔다. 장위국은 특별히 일찍 관저에 도착해 양복 입는 습관을 버리고, 군복으로 갈아입고 모든 훈장을 부착한 후 문을 들어서자마자 송미령에게 군례를 올렸다. 이전에 장개석 집안에서는 장개석, 송미령의 생일 때나 추석, 단오절, 중추절에 전 가족이 모여 축하할 때는 편한 복장을 하였다. 그렇기에 송미령은 장위국의 행동에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장위국은 엄숙하게 답했다. “얼마 없어 군복 입을 자격을 상실
제(齊)나라에 전중(田仲)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향촌에서 은거하면서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지극히 지혜로운 일이라고 여겼다. 송(宋)나라 사람 굴곡(屈谷)이 전중을 찾아가서 말했다. “저는 선생님이 인품이 높고 절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남의 비위를 맞추지 않는 사람이라고도 들었습니다. 저는 별다른 능력을 가지지 못하여 그저 밭에서 농사나 짓고 있습니다. 특히 조롱박을 재배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제게 큰 조롱박이 있습니다. 돌멩이처럼 딱딱할 뿐 아니라 껍질도 너무 두꺼워, 속에 과육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제가 유달리 남겨두고 싶어 보관하고 있던 커다란 호롱박입니다. 제가 선생님께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전중이 듣고는 말했다. “호롱박이 연할 때는 먹을 수 있고, 오래 돼 강하게 되어 먹을 수 없을 때에는 그릇으로 만들어 물건을 담으면 되지요. 그런데 당신이 가지고 온 조롱박은 크기는 크지만 껍질이 너무 두터울 뿐 아니라 과육도 없고 절개할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합니다. 이런 호롱박은 물건을 담을 수 없고 술도 담아낼 수 없습니다. 무슨 쓸모가 있겠소이까?” 굴곡이 말했다. “
초나라에 어떤 사람이 아주 귀한 검 한 자루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칼을 지니고 강을 건너던 중에 실수로 그만 검을 강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깜짝 놀라 급히 뱃전에 칼자국을 내어 표시하였다. “칼이 떨어진 곳은 바로 여기다.” 배가 닿자 칼자국을 새겨 놓은 뱃전에서 물속으로 뛰어들어 칼을 찾았다. 아무리 표시해 두었다 한들 배가 움직여 강기슭에 닿았는데 강물에 빠뜨린 칼을 다시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하였다.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 유명한 각주구검(刻舟求劍)이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어떤 상황에서 얻은 경험은 실제이기는 하지만 상황 변화에 따라 적용하는 것이 달라야한다는 뜻을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초나라 사람이 뱃전에 표식을 해둔 것은 실제 상황과 맞다. 당시 상황에서 얻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당시 실제 상황과 임무와 부합된다. 그런데 형세와 임무가 변하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실제에서 얻어진 경험이라 할지라도 변화된 상황에서도 고지식하게 적용한다면? 뱃전에 새겨둔 기호와 다를 바 무엇이 있겠는가. 웃길 따름이다. 시대와 대면한 현실의 연관성이 떨어진다면, 아무리 깊은 기호를 새겼다하더라도 아무리 좋은
특정한 상황에서 거시적으로, “한쪽 눈은 감고 한쪽 눈은 떠야한다.” 보고도 못 본 체 눈감아 줄 수 있어야한다.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면 놓아줄 것은 놓아주어야 한다. “물이 지극히 맑으면 물고기가 없고 사람이 지극히 살피면 따르는 무리가 없다”¹는 말이 이 뜻이다. 반초(班超)²는 서역에 오랫동안 있었다. 조정에 상소를 올려 자기가 살아서 옥문관 안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피력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반초를 불러들이고, 교위(校尉) 임상(任尙)³을 파견해 반초의 직위를 대체하였다. 임무를 교대할 때 임상이 반포에게 말했다. “공이 서역에서 30여 년을 살았는데 오늘 제가 공의 직무를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중임을 맡게 되니 고려하여야 할 문제가 많은데도 얕은 지식밖에 없습니다. 많은 가르침 부탁합니다.” 반초가 말했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새외의 관리와 사병은 본래 효자도 유순한 손자도 아닙니다. 죄를 범해 둔전에서 변방을 지키려온 수자리입니다. 외족 부락도 변방을 넘어오려
송(宋)나라 철종 원우(元祐, 1086~1094) 연간에 왕안석(王安石)¹의 변법(變法)이 실패한 후 옛 법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때 여급송(呂汲公), 양축지(梁祝之), 유기지(劉器之) 등 왕안석 혁신파 변법 추친 인물 30여 명은 가혹한 타격을 받았다. 폄적되기도 하였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동시에 조정은 그들 명단을 세상에 공개하였다. 그때 범순인(范純仁)²이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원흉을 치도하는 것은 가하지만 협력해 따른 사람에게는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황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범순인은 탄식하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됐으니 우리도 보복당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됐구려.” 나중에 형세가 급전직하해 혁신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범순인이 예측한 대로 구당파에게 가혹한 처벌이 내려졌다. 왕무(王懋)³는 『야객총담(野客叢談)』에서 말했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군자는 소인을 너무 과하게 다스리면 안 된다. 무절제하게 그들을 다스리면 나중에 그들은 더 잔혹하게 보복한다.” 상대를 가혹하게 처벌하면 상
그렇게 한 명 한 명 던져 죽이니 죽임을 당한 관리가 6명이나 되었다. 마지막에 시신을 시장에 걸어 시중토록 명령하였다. 그 일이 소주 지역 전체에 알려지자 모든 사람이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때부터 소주 지역 백성들은 악습을 고치고 습속을 일신하였다. 그렇다고 황종이 일률적으로 엄형으로 법을 준수하도록 하지는 않았다. 인자할 때는 인자하고 엄할 때는 가혹할 정도로 엄했다. 엄격함과 관대함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었다. 어느 날, 태수부(太守府)에 화재가 발생해 공문서가 모두 불타버렸다. 그 사고를 일으킨 자는 하급 관리였다. 대형 화재가 진압된 후 황종은 깨어진 기와 조각과 벽돌 부스러기가 널브러진 현장에서 화재를 일으킨 관리를 부른 후 곤장 100대를 치게 하고는 곧바로 집에 돌아가라 명했다. 이후 황종은 급히 상주서를 친히 써서 황제에게 올렸다. 모든 죄는 자신에게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급 관리를 끄집어 들거나 죄를 돌리지도 않았다. 화재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하급 관리는 사형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황종은 탄식하며 말했다. “이것은 본래 태수의 책임이다. 하급 관리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느냐?&rd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