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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시평] '기계적 중립'이 아닌 '중용지도'가 추구하는 정의

 

고교시절의 일이다. 40년 전이다. 그날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선생님의 얼굴은 퍽이나 상기돼 있었다. 고전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온화한 분이었다. 늘 학생들을 따뜻한 말로 대했다. 화내거나 꾸짖는 법이 없었다. 그날 선생님은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칠판에 백묵으로 한글자 한글자를 채워갔다. ‘가운데 중(中)’.

 

칠판을 가득메운 그 글자는 어떤 글자는 크게, 어느 글자는 작게, 그리고 어떤 글자는 비뚤어지게, 또 어떤 글자는 좌우 균형이 안맞게 ···. 그런 식이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5분이 넘도록 칠판 전체를 빼곡하게 그 글자로 메꿨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여러분 여기에 쓰인 가운데 중(中) 글자 중에서 어느 게 진짜 가운데 중(中)인가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난 뒤 하나 둘 손을 들었다. 각기 모양과 균형, 칠판에 적힌 위치 등을 근거로 ‘진짜 가운데 중(中)은 이겁니다’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나 선생님이 내놓은 의외의 답. “여러분! 정확하게 자로 잰 듯 꼭 들어맞는 중(中)이란 글자는 여기에 없습니다. 중립이란 그런 기계적 잣대가 아닙니다. 오늘 수업은 이걸로 마칩니다.” 한동안 멍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중립(中立)의 사전적 의미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간적 입장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기계적으로 중간의 위치를 선택하는 게 아니다. 특정의 편에서 판단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지 ‘공정’(公定)을 도외시하는게 아니다. 예를 들어본다. 두 개의 팀으로 나눠 축구경기를 한다고 치자. 심판의 역할은 중립이되 공정하여야 한다. 반칙을 일삼는 A팀에게 분 호루라기 횟수만큼 기계적 형평성으로 B팀에게 호루라기를 불러대면 이건 공정도 중립도 아니다. 오히려 엉터리 게임을 하는 반칙무리들에게 맘껏 할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도록 돕는 방조이자, 오히려 그런 게임을 정당화하는 연출가다. 1~2%의 오물이 청정수를 오염시키도록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은 그래서 우리 언론의 입장에선 금과옥조로 여겨야 할 성어다. 사회의 무질서와 모순, 불공정과 편파, 혹세무민(惑世誣民)에 맞서야 하는 소명이 언론의 덕목이다. 누가 뭐래도 옳은 건 옳은 거고, 그른 건 그른 거다. 다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고 있다면 말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네다. 게다가 지금의 한국사회엔 ‘근거 없고 이치에 맞지 않는 걸 억지로 끌어대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꿰맞추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지고 있다. 견강부회(牽强附會)다.

 

한덕수 총리이자 대통령 권한대행이 26일 헌법재판관 3명의 임명을 “여·야가 합의할 때까지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그 이전 국회를 통과한 6개의 법안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대통령의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번엔 “소극적인 권한만 행사해야 한다”며 그냥 뒤로 물러섰다. 모순이다. 앞뒤가 안맞는 언행이자 논리다.

 

이것저것 따질 필요 없이 ‘국회추천 몫 헌법재판관 3명의 임명’은 대통령의 선택사안도, 거부대상도 아니다. 다수의 헌법학자와 법률가들이 내리는 판단이다. 3권 분립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대한민국 헌법이 정한 절차다. 그걸 다시 국회로 돌려보내 “여·야가 다시 합의하라”고 하는 건 ‘국민의 뜻에 따라 협의·합의·논쟁의 과정을 거쳐 국회가 의결해 내린 결론“에 정면으로 도전하겠다는 것 밖에 안된다.

 

이제 중용지도(中庸之道)를 말한다. 『중용(中庸)』은 유교(儒敎) 경전인 사서(四書) 중 하나다. 공자(孔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저작이다. 첫머리에 주자(朱子)는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하여 ‘중용’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편벽되지 않은 것을 中이라 말하고 바뀌지 않은 것을 庸이라 말한다. ‘중’이란 것은 천하의 바른길이요, ‘용’이란 것은 천하의 정해진 이치다.” 中은 치우치지 않은 것이고 庸은 떳떳하다는 뜻이 된다.

 

중용(中庸)의 첫머리에 공자는 “군자의 중용이라는 것은 군자로서 때에 맞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무슨 일이든 때에 맞추어 처리하는 성인의 지혜를 중용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지조나 용기가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대처하는 요령과는 거리가 있는 말이다. 치우침도 없지만 또한 시의적절해야 중용지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전엔 중용지도를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평범함 속에서 찾는 진실한 도리”라고 쓴다.

 

12·3 계엄사태로부터 벌써 24일이 지났다. 나라를 서둘러 정상화하는 것외에 우리가 가야할 다른 길은 없다. 조속한 시일 안에 계엄과 내란의 바다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 바다에서 허우적대다간 모두가 공멸이다. 그 격변의 순간 대한민국 위정자, 그것도 정점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 선택해야 하는 건 어쭙잖은 ‘기계적 중립’이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다. 상식이다. 국민 다수의 판단을 받드는 것이다. 그것도 ‘시의적절하게’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제이누리=양성철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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