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띄어쓰기를 두 번 다룬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복합어, 즉 합성어와 파생어의 띄어쓰기 문제를 살펴봅시다. 복합어는 사실 띄어쓰기를 걱정할 까닭이 없습니다. 합성어란 ‘돌다리’, ‘작은아버지’처럼 둘 이상의 실질형태소가 결합하여 하나의 단어가 된 말이고, 파생어는 ‘개살구’, ‘낚시질’처럼 실질형태소에 접두사나 접미사가 붙어 새로 단어가 된 말이므로, 복합어는 합성어든 파생어든 당연히 붙여 쓰면 그뿐입니다. 너무 전문적이어서 골치 아프다는 분들을 위해 쉽게 말하자면, ‘복합어란 둘 이상이 합쳐져서 새로 하나가 된 말이므로 붙여 쓴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문제는 정말 하나로 볼 수 있는지를 따지기가 말하기는 쉬워도 만만찮다는 겁니다. 복합어는 워낙 종류도 다양하고 그 수도 많기 때문에 모두 다루기는 어렵고, 몇 가지만 추려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다음 보기를 한번 보세요. ① 띄어쓰기/붙여쓰기 : 띄어 쓰다/붙여 쓰다 ② 끌어내다/밀어내다 : 끌어 놓다/밀어 넣다 ③ 뒤돌아보다/되돌아보다 : 돌이켜 보다 ① ‘띄어쓰기’와 &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夘)乙抱遣去如 (“삼국유사" 권 제2 '서동요') 서동요, 다들 생각나시지요? 굳이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국어 과목이나 문학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더라도 삼국유사에 실려 전하는 서동요(薯童謠)는 알고 있으실 겁니다. 백제 무왕이 젊은 시절에 진평왕의 예쁜 셋째 딸 선화공주를 꾀어내려고 지었다는 동화 같은 설화 덕분이겠지요. 서동요는 보통 다음과 같이 풀이합니다. “선화공주님은 / 남몰래 시집가 두고 / 맛둥 서방을 / 밤에 몰래 안고 가다.” 삼국유사와 거기 실린 향가는 우리보다 일본에서 먼저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라가 기울어가면서 우리가 미처 눈길 줄 겨를조차 없을 때 삼국유사를 영인하여 발행(그것도 여러 차례)한 것도 일본이었고, 학문으로서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일본이 먼저였지요.(이 과정에서 단군신화를 변조하여 우리 역사를 설화 수준으로 깎아내리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에 자극받은 젊은 우리 학자들도 향가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양주동 선생입니다. 선생은 특히 해방 전에 펴낸 옛 노래 연구서 &lsqu
우리말에서는 본용언에 보조용언을 이어 씀으로써 의미를 다양하게 넓혀 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먹다’라는 동사에는 ‘먹어 보다, 먹어 주다, 먹고 싶다, 먹게 하다, 먹지 못하다, 먹어 버리다, 먹는 척하다’와 같이 여러 가지 보조용언을 이어 쓸 수 있습니다. 보조용언은 본용언과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몇 가지는 붙여 써도 됩니다. 먼저 반드시 띄어 써야 하는 것과 붙여 써도 괜찮은 것으로 나누어 보고, 이어서 덧붙여 기억해야 할 것 몇 가지를 짚어보겠습니다. ㄱ. 반드시 띄어 써야 하는 것 ‘~게’, ‘~지’, ‘~고’, ‘~아(어)야’ 등에 이어 쓰는 보조용언은 붙여 쓰면 안 됩니다. 반드시 띄어 씁니다. <보기> - 잘살게 되다, 못쓰게 만들다 - 하지 마라, 쉬지 않는다, 좋지 못하다 - 놀고 싶다, 일하고 있다, 죽고 말았다 - 먹어야 한다 ㄴ.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붙여 써도 되는 것 - ‘~아/어’ 뒤로 이어지는 보조용언은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붙여 써도 됩니다. &l
어린 시절, 제가 밖에서 놀다가 들어오면 할머니는 “아이고, 우리 새끼 뭐하다 왔노?” 묻곤 했습니다. 저는 으레 “응, 친구들이랑 놀다 왔어.” 했는데, 그때마다 할머니는 어린것이 건방지게 ‘친구’가 뭐냐며 ‘동무’란 말을 쓰라 하셨습니다. ‘친구(親舊)’란 어른들이나 쓰는 말이고, 애들은 ‘동무’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어디를 가건 업고 다닐 만큼 막내손자를 귀애하셨던 할머니께 들은 유일한 지청구가 바로 그 말이었기에, 오십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할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어린것이 건방지게 무슨 친구냐? 동무지…….” 그러나 초등학교 3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동무’라는 말을 쓸 기회는 별로 없었습니다. ‘어깨동무’라는 어린이잡지 이름으로 한동안 쓰인 적이 있고, “동무 동무 내 동무, 어깨동무 씨동무, 미나리밭에 앉았다!” 하면서 제자리에 폴싹 주저앉곤 했던 동요가 어렴풋이 떠오르긴 하지만,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강원도가 기차역 이름까지 바꿔가며 자랑하는 1930년대 소설가 김유정이 자기 고향을 무대로 쓴 단편소설 ‘동백꽃’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보통 ‘동백꽃’ 하면 따뜻한 남녘 바닷가에 무리 지어 늘어선, 큰키나무에 가득 피어나다 못해 땅바닥까지 흐드러지게 뒤덮는 빠알간 동백꽃을 연상하지만, 이 이야기에 나오는 동백꽃은 노랗습니다. 색깔만 노란 것이 아니라 향기까지도 알싸합니다. 네, 김유정의 ‘동백꽃’은 흔히들 보아 온, 꽃잎이 빨갛고 꽃술이 노란 남쪽의 동백꽃과는 전혀 다른 꽃입니다. 이 꽃은 강원도나 경기도의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떨기나무인 생강나무의 꽃입니다. 막 겨울이 지나고 제법 햇살이 따스해지는 3월 중순쯤이면 잎보다도 먼저 피어나는 꽃, 진달래나 벚꽃보다도 먼저 야트막한 동네
올해도 어김없이 12월이 돌아왔습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1년의 마지막 달일 뿐인데도 해마다 이맘때면 지난 한 해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다들 느끼시듯이 올해는 뭐라 할 말이 따로 없는 그런 기막힌 한 해였지요. 황당하리만큼 무능하고 염치없는 한 인간과 그 주변 사람들은, 까도 까도 끝이 없는 데다가 벌인 일마다 상상했던 한계를 훌쩍 뛰어 넘는 초특급 비리와 추악한 소문을 매일같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그 남우세스럽고 더러운 꼴을 지켜보면서 분노하고 허탈해하는 동안, 어떤 막장드라마도 이루지 못했던 최고의 시청률과 아울러 눈과 귀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정치를 외면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단 며칠 사이에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게 하는 엄청난 위업을 이루어냈으니, 온몸 바쳐 국민 정신교육에 이바지한 크나큰 공로를 길이 기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얘기가 잠깐 다른 데로 흘러갔습니다. 하긴 요즘은 무슨 얘기를 하든 다 ‘기-승-전-최순실’, 아니 ‘기-승-전-박근혜’가 되더군요. 허허. 사정이 이러하니 올 12월은 그동안 못 만났던 친구, 동창들이나 또는 같이 땀 흘려 일한 동료들과 모처럼
글쓰기에서 가장 헷갈리는 것, 누구라도 완벽하게 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띄어쓰기입니다. 하긴 저는 표준어나 맞춤법이 ‘이차방정식’이라면 띄어쓰기는 ‘미적분’쯤 된다고 생각합니다. 띄어쓰기를 제대로 하려면 띄어쓰기 규정을 기계적으로 따지는 정도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 말이 가지고 있는 기본 의미와 문맥 속의 의미, 문법 기능 등까지도 잘 살펴야 하기 때문이지요. 바꾸어 말해서 ‘완벽하게’ 띄어 쓸 수만 있다면 그만큼 우리말을 이루는 다른 원리들까지도 속속들이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수십 년을 우리 말글과 씨름하면서 남들 앞에서 이렇게 저 잘난 듯이 주저리주저리 풀어놓는 저 같은 사람조차도 완벽하게 띄어 쓴다고 장담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도, 철저히 지키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합니다. 그토록 ‘어려운’ 것이니 언어학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로서는 띄어쓰기 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자책할 것까지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해서 여기서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많이들 헷갈리는 것 몇 가지만 살펴보려 합니다. 이 정도만 기
남의 이름을 부를 때 보통 이름 뒤에 ‘씨’를 붙입니다. 요즘은 한자어 ‘씨’ 대신 우리말 ‘님’을 붙이기도 하지요. ‘씨’나 ‘님’보다 좀 더 높이고 싶다면 ‘선생’을 붙이면 됩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자리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좋지만, 공적인 자리에서는 ‘선생’만 써도 괜찮겠지요. 그러니까 ‘법무법인 ○○ 대표 이 아무개 변호사를 모시고~’보다는 ‘법무법인 ○○ 대표 변호사 이 아무개 씨(선생/선생님)를 모시고~’라고 하는 것이 바릅니다. ‘교수님’을 직접 부를 때에도 ‘교수님’보다는 ‘선생’ 또는 ‘선생님’을 권하고 싶습니다. ‘교수’는 그저 직업일 뿐이지만, ‘선생(님)’은 존경을 담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긴, 요즘은 ‘선생님’의 값이 너무 헐해져서 아무한테나 ‘선생님&
요즈음 신문이나 인터넷에 오르는 글을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뜻이 다른 단어를 잘못 쓰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한자를 거의 쓰지 않게 되면서 정확한 뜻을 확인하기보다는 대충 의미만 통하면 된다는 생각에 적당히 쓰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한자를 쓰지 않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본래 지니고 있는 말뜻까지 헷갈려서는 곤란합니다. 1. 곤욕과 곤혹 꽤 많은 사람들이 ‘곤혹’과 ‘곤욕’을 혼동해서 씁니다. 다음 보기들은 각각 무엇을 써야 옳은지 생각해 봅시다. ① 클린턴 후보는 개인 이메일 계정을 사용한 문제로 계속 (곤혹/곤욕)을 치르고 있다. ② 요즘은 젊은 층에서도 허리 통증으로 (곤혹/곤욕)을 겪는 경우가 많다. ③ 오늘 오전 해양수산부에서 열린 비상대책회의에 참가한 한진해운 관계자들이 (곤혹/곤욕)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곤욕(困辱)’은 ‘심한 모욕. 또는 참기 힘든 일’을, ‘곤혹(困惑)’은 ‘곤란한 일을 당하여 당황스러움’을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①곤욕/②곤욕/③곤혹’입니다. 간
해마다 가을이 깊어가는 이맘때면 자주 들을 수 있는 노래가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벌써 30년도 더 전에 이용이 불러 유명해진 ‘잊혀진 계절’이지요. 그런데 이 노래의 제목과 가사에서는 사람들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가 나타납니다. 바로 ‘잊혀진’과 ‘잊혀져야’라는 말입니다. 동사를 피동형으로 만들고 싶으면 피동 접사 ‘~이’, ‘~히’, ‘~기’, ‘~리’를 집어넣거나 ‘~지다’라는 피동 접미사를 붙이면 됩니다. 현재의 문법 체계에서 ‘잊다’에는 ‘~히’ 한 가지만 붙일 수 있으므로 ‘잊혀진’은 ‘잊힌’으로, ‘잊혀져야’는 ‘잊혀야’로 써야 하지요. 오랫동안 익숙하게 들
“오늘은 경제 전문가이신 ○○대학교 교수 김 아무개 박사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김 아무개 박사님.” “네, 반갑습니다. ○○대학교 김 아무개 교수(또는 박사)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소개하거나 인사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며칠 전에도 어느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 나온 국회의원이 “네, 박 아무개 ○○당 국회의원입니다.”라고 하는 것을 들었네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께서는 남이 소개를 하든 스스로 말하든 이렇게 이름 뒤에 직업이나 지위를 붙여 말하는 것이 괜찮아 보이십니까? 대체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나 직위를 지닌 사람일수록 그것을 이름 뒤에 붙이기를 좋아하는 듯합니다. 즉 장관, (국회)의원, 판사, 검사, 변호사, 기자, 프로듀서, 감독, 사장, 교수, 교장, 의사, 박사, 목사, 신부 등이 흔히 그렇게 소개해 주기를 바라고, 때로는 스스로도 그렇게 소개합니다. 그러나 군대와 같은 특수한 계급사회라면 또 몰라도, 만민이 평등한 일반 사회에서는 굳이 그런 말을 붙일 까닭이 없습니다. 건전한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직업, 직급 등을 먼저 말하고 자신의
1. 한글날의 유래 한글날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세종실록에는 ‘1446년 9월에 반포했다’고만 적혀 있기에, 조선어연구회가 나서서 1926년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양력 11월 4일을 제1회 ‘가갸날’이라고 이름 붙이고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2년 뒤에는 ‘한글날’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1940년 안동에서 비로소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에 실린 정인지 서에 ‘9월 상한(상순)’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후 이때를 양력으로 따져서 10월 9일을 한글날로 삼았습니다. 올해로 570돌을 맞는 한글날, 이날이 다가오면 신문 방송마다 다투어 특집을 내보냅니다. ‘바른 우리말을 쓰자’, ‘아름다운 우리말을 지키자’, ‘무분별한 외래어 외국어를 몰아내자’…… 물론 좋은 뜻이기는 하나 좀 엉뚱합니다. 왜냐하면 한글날은 우리말이 아닌 표기수단으로서의 한글, 즉 훈민정음이라는 ‘문자’가 세상에 공식적으로 선보인 것을 기념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