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管仲, 약 기원전 723~645), 희(姬) 성, 관(管) 씨, 이름은 이오(夷吾), 자는 중(仲), 시호는 경(敬), 춘추시기 법가의 대표인물, 영상(潁上, 현 안휘 영상)사람으로 주(周) 목왕(穆王)의 후예다. 중국 고대 저명한 법학가, 철학가, 정치가, 군사전문가이다. '법가의 선구자', '성인지사', '화하문명의 보호자', '화하 제일 재상'이라 칭송받는다. 사기(私妓)는 춘추전국시기에 출현하였다. 『사기(史記)·화식열전(貨殖列傳)』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중산(中山)은 땅은 척박한데 인구가 많다. 또 사구(沙丘)에는 음탕하였던 주왕(紂王)의 유풍이 아직 남아 있어, 인민의 습속은 성격이 조급하고 투기로 이익을 취하여 먹고 산다. 남자들은 함께 모여 놀면서 비분강개 노래를 부른다. 평소에는 서로 치고받고 빼앗고 빼앗기며 놀고, 쉴 때는 무덤을 파헤치고 위조품을 만들며, 잘 생긴 남자들은 배우가 되기도 한다. 여자들은 거문고 같은 악기를 뜯고 신발을 끌면서 다니며, 부귀한 자에게 꼬리를 쳐 후궁으로 들어가니 제후국에 두루 퍼졌다.” “조(
화예부인의 죽음에 대해 두 번째 설은 주로 채동번(蔡東藩)의 『송사연의宋史演義』에 보인다. 조광윤이 화예부인에 빠져 몇 년을 헤어나지 못하다가 화예부인의 미색이 쇠하자 조광윤은 딴 마음이 생겼다. 미인 송(宋) 씨에게 애정이 옮겨갔다. “그때 송 씨는 17세였고 태조 나이는 이미 42세였다.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치심여자부심한(痴心女子負心漢)’〔여자는 사랑에 푹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남자는 무정하다 ; 남자는 사랑에 빠져도 쉽게 벗어나고 여자는 일단 사랑에 빠지면 끝내 헤어나지 못한다〕라고 하지 않던가. 화예부인은 원래 황후가 되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송 씨 여인에게 그 자리를 빼앗긴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태조의 사랑도 송 씨에게로 넘어가니 총애까지도 사라져버렸다. 커다란 집이 고요 속에 빠져들었으니 어느 누가 적막함을 풀어줄 수 있었겠는가? 고국의 멸망을 애통해했고 새로운 왕조에서는 총애를 잃었으니. 애통함이 병이 돼 지는 낙엽처럼 흐르는 물에 뛰어들어 구슬 같은 아름다운 향기를 흘러 보냈구나.” 채동번의 이야기는 침소봉대한 점이 있기는 하다. 역사 자료를 고증해보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많기
송 태조 건덕(乾德) 2년 11월, 조광윤은 충무절도사 왕전빈(王全斌)에게 6만 병사를 이끌고 촉으로 진격하라 명했다. 동시에 공장(工匠)들에게 명해 변량(汴梁)에 촉의 군주 맹창이 살 주택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병들에게 유조를 내린다. “행군하여 이르는 곳에서 민가를 불사르거나 백성을 쫓아내거나 분묘를 파내거나 뽕나무를 벌목해서는 결코 안 된다. 성과 마을을 함락한 후에 포로를 남살하거나 재물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그때 변량에 큰 눈이 내렸다. 송태조는 강무당(講武堂)에서 검은 단비 옷을 입고 일을 보다 갑자기 좌우에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입고도 춥다고 느끼는데 서정을 나간 장병들이 생각나는구려. 눈서리를 뒤집어 쓸 텐데 어찌 이보다 못하다 하겠소?” 즉시 의복을 벗어 태감에게 주면서 촉 지역으로 달려가 왕전빈 장군에게 전달케 하고 전군에게 두루 상을 내리지 못하여 유감이라 전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송나라 군대는 용기를 내어 진군하였다. 성도를 지키고 있는 촉나라 병사는 전투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맹창은 화예부인에게 “우리 부자는 따뜻한 옷과 풍족한 양식으로 병사들
맹창은 향락이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송 태조가 후촉을 멸한 후 시위들은 송 태조의 뜻에 따라 물건들을 수습했는데 그들은 맹창의 소변기까지도 거두어 갔다. 소변기라면 더러운 것일 터인데 시위들은 어째서 그것을 가지고 가서 태조에게 바쳤을까? 맹창의 소변기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칠보로 단장해 정미하기 그지없었다. 시위들이 보고는 무척 기이하게 여겼지만 감히 속일 수 없어 가지고 가서 태조에게 보였던 것이다. 태조가 맹창의 소변기를 보고는 그런 장식을 했다는 데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여 “소변기를 칠보단장했다면 무엇으로 음식을 저장하였던 것인가? 사치가 이 정도인데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탄식하며 시위들에게 가지고 나가 부숴버리라고 하였다. 맹창은 또 어떤 것이 탐닉인지를 잘 알았던 인물이다. 그는 촉 지역의 미녀들을 광범위하게 징집해 후궁으로 충당하였다. 비빈 이외에 다시 12등급을 두었다. 그중 가장 총애를 받은 인물이 ‘화예부인’ 비(費) 귀비다. 맹창은 매일 궁녀들 틈에 싸여 살았다. 연회가 끝날 때 쯤 여가가 생길 때마다 화예부인과 함께 후궁의 미녀들을 어전으로 불
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시기 화예부인(花蕊夫人)이라 부르는 여성이 몇 있었다. 용모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시부(詩賦)에도 능하여 다재다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들에 관한 사적은 오대에서 양송(兩宋)에 이르는 여러 사적에 두루 보인다. 그들이 처한 시대가 서로 같고 모두 화예부인이라 불렀기 때문에 그들의 신분과 사적은 지금까지도 많은 의혹에 싸여 있다. 오대십국 사이에 화예부인이라 불린 여성은 3명이다. 첫 번째, 전촉(前蜀) 군주 왕건(王建)의 숙비(淑妃) 서(徐) 씨(약883~926), 성도(成都)사람이고 궁중에서 화예부인이라 불렀다. 언니도 왕건의 비였기에 ‘소서비(小徐妃)’라 부르기도 한다. 자매가 모두 총애를 받았다. 언니의 아들 왕연(王衍, 세칭 후주〔後主〕)이 황위에 오른 후 익성황태비(翊聖皇太妃)에 봉해졌다. 화예부인과 그 언니는 총신들과 교재하고 뇌물을 받고 정치에 간여하면서 후주를 놀이에 빠져 실정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왕연과 함께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에게 피살된다. 두 번째, 후촉(後蜀) 군주 맹창(孟昶)의 비였다. 성은 서(徐, 일설에는 비〔费〕 씨라고 하기도 한다) 씨로 혜비(慧妃)
20여 년 전 홍콩과 대륙 합작품인 무협영화 ‘목면가사(木棉袈裟)’가 개봉되자 대륙에서 일대 선풍을 일으켰다. 한바탕 흥행이 끝나자 사람들은 역사상 진짜 목면가사라는 보물이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영화처럼 불문제자 사이에 목면가사를 쟁탈하려고 목숨을 걸고 추살한 사실이 있는 것일까? 있다면 목면가사는 최후에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가? 불문과 세속이 똑 같다는 말인가? 창상의 풍우 속에서 감춰졌던 신비의 면사는 벗겨져 세상에 알려지게 됐지만, 영화는 역사가 아니다. 역사 속 어떤 영상을 뽑아내 엮어낸 것일 따름이다. 목면가사는 그저 달마조사(達摩祖師)만 전해져 내려온 보물일 수는 없다. 557년, 남조(南朝) 양무제(梁武帝) 시기 천축(天竺) 선종(禪宗) 제28대 보제달마(菩提達摩)가 인도양을 통하여 말라카해협을 넘어 중국에 건너가 선종(禪宗)을 전파하였다. 보제달마는 당시 가사를 가지고 갔다. 이것이 대대로 선종 전법의 신물(信物)이 되었다. 후세에 불가의 제자들이 성물(聖物)로 여기는 ‘목면가사’다. 사전적 의미로 다시 뒤적여보자. ‘목면가사’는 원래 석가모니의 ‘금루가사(金縷袈
현재 북경에는 온통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있다. 오래된 건축물들은 거의 ‘철거’되는 운명에 처해있다. 철거하고 새로 건축하는 와중에 북경사람들은 옛 성벽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북경 성벽은 대부분 철거되고 오직 3채의 문루(門樓)인 : 정양문(正陽門), 동편문(東便門), 덕승문(德勝門)만 남아있다. 북경에는 “덕승문이 먼저 생기고서야 북경성이 생겼다”는 속담이 전해져온다. 이는 덕승문의 전후관계를 알려 주고 있다. 원나라 말기, 대장군 서달(徐達)이 군대를 이끌고 원 왕조의 대도(大都, 북경)를 함락시켰다. 원 순제(順帝)는 황급히 대도 성의 북문인 건덕문(健德門)으로 빠져 나가면서 원 왕조는 막을 내린다. 서달은 건덕문을 덕승문이라 고쳤다. 득승문(得勝門)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어쩌면 명나라 군대가 승리를 얻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바로 홍무(洪武) 원년(1368) 일이다. 영락(永樂) 18년(1420) 북경 성을 개수할 때 대도 성의 성벽을 남쪽으로 2킬로미터로 옮기고 다른 성문과 옹성(甕城)을 세워 덕승문이라 했다. 이렇게 본다면 덕승문
북경(北京)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고도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진귀한 문물들이 이 도시의 가장 가치 있는 부동산이라는 데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장성(長城), 고궁(故宮), 천단(天壇), 십삼릉(十三稜)은 북경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고대 건축으로 지난날 황가의 권위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고대 건축물도 고도의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씹으면 씹을수록 의미심장한 맛이 난다. 천단 안에 ‘소황궁(小皇宮)’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소황궁’이란 천단 서쪽의 ‘재궁(齋宮)’이다. 천단은 명청(明淸)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매년 동지 때에 황제는 천단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오곡이 풍성하기를 기도하였다. 고대 예절에 따르면 황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3일 전에 재궁에서 재계(齋戒)하여야했다. 3일 동안 훈채(葷菜)를 먹지 않고 음주하지 않으며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으며 형사(刑事)를 처리하지 말아야했다. 줄곧 화려한 옷과 진귀한 음식을 먹고 마음껏 가무와 여색을 즐기던 황제에게는 감옥
태감은 중국 봉건제도의 기형적인 산물이다. 봉건황조의 극단적으로 잔인한, 그러면서도 비인도적인 문화다. 태감은 일반적으로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생존을 위하여 생식기를 떼어 내고 황궁에 들어가 황실에 시봉하였다. 태감이 되면 생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여론의 질시를 감내해야하였다. 그들은 봉건사회의 최하층을 이뤘던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중국 역사에는 ‘행운’을 누렸던 태감이 있다. 위충현(魏忠賢), 이연령(李連英)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황실의 총애를 받아 비할 데 없는 권위를 향유하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 역사상 외국 국적의 태감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는가? 분명 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외국 국적의 태감이 바로 박부카(Buqa, 朴不花)다. 고려인으로 원 문종 시대에 태어났다. 박부카는 황궁에서 기락(奇洛)황후와 가까워 높은 관직을 얻게 되자 대신들조차 그의 눈치를 볼 정도였다. 한 시대의 권력을 누린 인물이었으니 ‘태감’이란 가문(?)을 드높였다 할 것이다. 그에 대해 사전적 풀이를 잠시 보자. “왕불화(王不花)라고도 한다
원 순제(順帝, 1320~1370), 원 명종(明宗)의 아들이다. 재위기간 동안 황공 관리들의 탐욕이 극에 달했고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아 살아갈 수 없게 된 백성이 끊임없이 봉기를 일으켰다. 지정(至正) 20년(1369)에 명나라 군대가 대도(大都, 북경)를 함락시키자 북방 응창(應昌)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2년 후에 죽었다. 중국 고대 황제들은 교대로 교차하였다. 현명한 군주도 있었고 포악한 군주도 있었으며 황당하기 그지없는 황제도 있었다. 각양각색, 별의별 황제가 다 있었다. 원 왕조 말기에 공예 제작에 심취한 황제가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원 순제 토곤 테무르(Toghon Temür, 妥懽帖睦爾)다. 원 순제는 명종의 장자로 어릴 적부터 교묘한 구상을 많이 하였다. 자신이 궁루(宮漏, 고대 시간을 제는 의기의 일종)를 설계해 제작하기도 하였다. 새로우면서도 정교하기 그지없었다. 궁루는 높이 약 6,7척, 길이는 높이의 절반, 여러 누호(漏壺)는 특별히 제작된 목궤에 숨겨져 있었다. 목궤에는 사방에 삼성전을 설치하였다. 목궤 허리에는 맵시 있는 자태의 옥녀를 새겼다. 손에는 시각을 알리는 산가지가 들려 있었고. 시간에 따라 움직이면서
마르코 폴로(Marco Polo, 馬可波羅, 1254~1324), 이탈리아 베니스 상인, 여행가이다. 1275년경에 이란을 거쳐 상도(上都)에 도착해 원 세조 쿠빌라이의 신임을 받고 후한 대우를 받았다. 중국에 머무르는 10여 년 동안 중국 대부분을 여행하고 1292년에 유럽으로 돌아갔다. 『세계 경이(驚異)의 서(통칭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를 구술해 저술하고 동방의 풍족함과 문물의 창성함을 칭찬하였다. 이로써 동서양 교류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계기를 만들게 됐다고 평가받는다. 『동방견문록』이라 통칭되는 『마르코 폴로 여행기』는 서양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른바 ‘세계 제일기서’라 칭송받았다. 유럽 최초의 동양을 기록한 역사지리 자료서이기 때문이다. 원 왕조 초기의 역사서로 화려한 문체를 사용해 동방의 문명을 소개함으로써 유럽인에게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렸다. 이 여행기는 베니스를 거쳐 유럽 전 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면서 각종 문자로 출판되었다. 이로써 마르코 폴로는 명성을 얻게 된다. 물론 지금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마르코 폴로는 여행기에서 자신이 중국에 있을 때 네
유병충(劉秉忠, 1216~1274), 원래 이름은 간(侃), 자는 중회(仲晦), 형주(邢州, 현 하북 형태〔邢台〕) 사람이다. 인명사전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자호는 장춘산인(藏春散人)이다. 승려 때의 법명은 자총(子聰)이다. 박학다식하였고 특히 『주역』과 소옹(邵雍)의 『황극경세(皇極經世)』에 정통하였다. 처음에 요(遼)나라에서 형태절도사부령사(邢台節度使府令史)를 지냈는데 얼마 뒤 사직하고 무안산(武安山)에 숨었다가 금(金)나라에 망하자 승려가 되었다. 내마진후(乃馬眞後) 원년(1240)에 쿠빌라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불러 고문으로 삼았다. 전한 초기 육가(陸賈)가 말한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점을 일깨우면서 천하의 대계를 진언하였다. 태종11년(1239) 해운선사(海雲禪師)의 추천으로 쿠빌라이의 막하에 들어가 원나라 제도를 개혁하는 데 공헌하였다. 헌종(憲宗) 때 대리(大理)를 멸망시켰다. 항상 천지는 생명을 키우기를 좋아한다는 말로 황제를 격려해 많은 생명을 구해내었다. 즉위하자 옛 제도와 전범을 모아 조목별로 이해하도록 하였다. 중통(中統) 5년(1264)에 환속해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