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릭부케(Ariq Böke, 阿里不哥, ?~1266),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Khubilai, 忽必烈)의 동생, 툴루이의 일곱째아들이다. 그의 형 몽케(4대, 헌종憲宗)가 죽은 후 카라코룸에서 먼저 비밀리에 즉위하면 쿠빌라이가 개평(開平)에서 즉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스스로 칸의 자리에 올랐다. 쿠빌라이와 막북에서 전쟁을 치렀으나 이듬해 대패하였다. 서쪽으로 옮겨 차가타이의 힘을 빌리려 했으나 실패한 후 지원(至元) 원년(1264) 7월에 쿠빌라이 칸에게 항복했으며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 개경(開慶) 원년(1259), 원 헌종(憲宗) 몽케가 남하해 송(宋)나라를 토벌하는 전쟁 중에 합주(合州)에서 죽는다. 생전에 저군(儲君, 황태자)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칸의 자리를 놓고 저군 쟁탈전이 벌어졌다. 당시 칸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자는 몽케의 아들들 이외에 몽케의 동생들이 있었다. 쿠빌라이와 아릭부케〔아리크부카〕가 그들이다. 쿠빌라이는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략이 있었고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혁혁한 전공을 세워 송나라 정벌에 앞장서고 있던 원수였다. 아릭부케는 카라코룸에 있었다. 황후와
원(元) 태종(1186~1241) 오고타이(Ogotai, 우구데이〔Ögedei〕, 窩濶台), 칭기즈칸의 셋째아들이다. 내성적이었고 깊은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포용력으로 처세하면서 부친에 의해 칸(Khan)에 선택되었다. 칸에 앉은 후 야율초재(耶律楚材)를 중용하고 금(金)을 멸망시켰다. 1236년에 바투(Batu, 拔都)를 파견해 서정하면서 세력이 유럽 중부에까지 이르렀다. 경제 정책을 중시해 ‘한족 법제’를 받아들이면서 몽골 제국을 더욱 강성하고 부강하게 만들었다. 원 태조 테무친은 몽골 보르지긴(Borjigin, 孛兒只斤) 귀족 출신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곤궁한 삶을 살았으나 발분해 여러 영웅을 결집하고 권토중래하였다. 1200년에서 1206년까지 메르키트(Merkid), 타타르(Tatar), 케레이트(Kereit), 나이만(Naiman)을 차례로 정복하고 몽골 주요 부족을 통일한다. 개희(開禧) 2년 몽골 각 부족은 오논(Onon) 강변에서 ‘쿠릴타이(Khuriltai)’를 개최해 대칸에 오르고 칭기즈칸(成吉思汗, 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이라 칭하면서 몽골 칸의
몽골(Mongolia)은 중국이 아니다. 현 중국 내에 몽골족이 소수민족의 하나로 살아가고 있지만 역시 몽골은 독립국이며 세계사에 동방의 금자탑을 세웠던 위대한 민족의 나라다. 그렇기에 칭기즈칸을 여기 ‘중국, 중국인’에 게재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역사의 중심인물들을 여기에서 논의하는 것은 그들이 ‘원(元)’ 왕조를 세웠고 중국역사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사에서 ‘원’이 없으면 단절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후에 소개하는 인물들은 몽골의 위대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칭기즈칸(GenghisKhan, 成吉思汗, 1161~1227)은 몽골의 보르지기드(Borjigid, 孛兒只斤) 씨에 속한 예수게이 바아투르(Yesügei Baγatur, 也速該)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몽골(蒙古)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원(元)의 시조(재위 1206~1227)로 추숭되었다. 이름은 테무친(Temüjin, 鐵木眞), 칭기즈칸은 호이다. 1188년 몽골의 부족장이 돼 몽골
모택동(毛澤東)이 세상과 하직할 때 등소평(鄧小平)은 신체의 자유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활동공간이 자신의 집으로 한정돼 있었다. 대문을 벗어날 수 없는 자택 ‘연금’ 상태에 있었다. 친히 중공중앙에 설치된 조문식장에 가 자신이 존경하였던 위대한 영도자이며 지도자에게 무한한 슬픔을 전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집안에 모택동을 애도하는 빈소를 마련하였다. 조화를 헌상하면서 모택동에 대한 자신의 참된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모택동에 대해 등소평은 시종일관 존경의 태도를 보였다. 비록 모택동과 등소평 사이에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에 있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정치가 사이에 항상 존재해왔던 현상이 아닌가. 등소평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택동을 위대한 영도자요 지도자로 보았다. 1980년 10월 25일, 등소평은 『건국 이래 당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关于建国以来党的若干历史问题的决议)』 초안을 작성하고, 중앙 책임자들과 담화하면서 모택
강청은 늘 다른 사람의 말을 잘랐다. 마침 장춘교가 북청(北淸)대학의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그녀가 끼어들었다. “현재 북청대학에서 공작조와 제대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조반파(造反派, 반란을 획책하는 부류, 혁명파〔革命派〕의 반대 개념) 제2의 인물이 호창성(呼昌盛)이고, 무극근(武克勤)의 태도도 애매합니다.” 모택동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녀는 북경시위(北京市委)를 세웠어. 이 기본 입장은 변하지 않을게야.” 강생이 안경을 올리면서 말했다. “무극근은 그저 관망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석께서 새로운 전략부서를 만들기만 하면 그녀는 곧바로 따라올 것입니다.” 모택동은 또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처음 대자보를 붙인 모든 혁명파(革命派)는 지금부터 어느 정도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호하도록 해.” 강청은 검은 테 안경 너머로 눈을 깜박이며 좌우의 동료들을 보면서 말했다. “주석께서 내리신 이번 지시는, 우리가 반드시 그대로 처리해야 해.” 진백달은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강생도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장춘교, 요문원은 더더욱 연신
모택동이 그 회의장에 들어설 때 표면적으로는 영수로 대접했지만 유소기, 등소평과 그 그룹의 마음속에는 이미 ‘경이원지(敬而遠之)’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들은 의기투합해 있었다. 순서대로 하나씩 진행하고 있었다. 모택동이 들어오자 모두 곤란해 하는 게 분명하였다. 태도가 부자연스러웠다. 자신들을 불편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자신들을 불신임해서는 안 된다는 듯이. 자신들을 간섭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즐겁게 놀고 있던 아이들이 집안어른을 갑자기 만난 듯한 태도였다. 어쩔 수 없이 존중은 하지만 뼈 속 깊이에서는 눈이 빠지게 자신들을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듯한 모양새였다. 모택동은 당시 유소기 일당들에게서 그런 느낌을 읽었다. 사나운 얼굴빛과 목소리로 발언하는 도중, 내내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을 겉으로만 존중하고 있었다. 유소기는 내내 연필을 손등에 올려놓고 돌리고 있었다. 눈빛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면만 응시하였다. 등소평은 고개를 들고 자신의 말을 듣는 듯이 보였다. 때때로 고개를 숙여 손에 들고 있던 자료에 몇 글자 적기도 했지만 사실은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준이회의(
‘문화대혁명’과 관련해 중요한 편지가 한 장 있다. ‘문혁’ 초기 모택동(毛澤東)이 강청(江靑)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다. 1966년 7월 8일, 모택동이 소산(韶山) 적수동(滴水洞)에서 작성해 강청에게 보냈다. 모택동은 이 편지를 다 쓰고 나서 먼저 주은래(周恩來), 왕임중(王任重) 둘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주은래로 하여금 상해에 있는 강청에게 전달해 달라고 하였다. 강청이 보고 난 후 주은래에게 또 그 편지를 대련(大連)에 있던 임표(林彪)에게 보내어 읽도록 하였다. 모택동의 일생 중 개인적으로 쓴 편지는 많지만 그렇게 길게 쓴 것은 없다. 그 편지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감정을 써서 보낸 것이라 보기 어렵다. 모택동의 정견을 표현한 특수한 방법인 셈이다. 당시 중국 정치 형세에 대한 고민과 예측의 결과물이었다. 모택동은 그 편지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 그리고 자기 내면의 남모르는 근심 등을 모두 써내려갔다. 모택동이 그 편지를 쓴 근본 목적은 무엇일까? 이미 형성된 ‘문화대혁명’에 대한 사고의 방향을 강청에게 얘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바로 &lsquo
비서 중 한 명이 주은래의 업무 스타일을 토로한 적이 있다. 주은래가 업무가 과중해 이틀씩이나 눈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해서 그 비서가 권했다. “총리님, 최고 지도자 중에 총리님이 가장 바쁘십니다. 이런 서류는 등소평 동지에게 보이시는 게…….” 주은래는 태양혈 위에 청량유를 바르고 계속 서류를 보면서 조용하게 말했다. “난 총리야. 이런 구체적인 일들은 내가 좀 더 처리해야 해. 등소평이는 더 큰 일을 처리해야지. 정책을 결정하는 일을 하여야 하는 거야.” 주은래가 위의 말을 한 시기는 신중국이 들어선 후 환란을 겪던 해였다. 그때도 주은래는 등소평이 “큰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통솔 능력이 있는 인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주은래가 처리하였던 일 중 어떤 일은 부장, 국장조차 거들떠 볼 가치도 없는 자질구레한 일도 있었다. 주은래는 관여하기를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세밀하였고 성실하였다. 모택동이 그런 사실을 듣고서는 많은 사람 앞에서 감격해하며 말한 적이 있었다. &ldquo
처음은 잡담 수준이었는데 점차 광범위한 내용까지 얘기하게 되었다. 주은래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고민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박일파 동지, 당신이 진기로예(晉冀魯豫, 산시성, 하북성, 산동성, 하남성)에서 유백승(劉伯承), 등소평과 함께 여러 해를 보냈는데, 그 두 명의 업무 처리능력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박일파가 말했다. “업무를 하는데 둘의 호흡이 참 잘 맞습디다. 확실히 한 마음 한 뜻이요, 융합이 잘 되었죠.” 주은래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내가 묻는 것은 그들이 협력했느냐가 아니고, 그들의 업무 방법이 어땠냐는 것이요?” 박일파는 농담 반 진담 반, 유머러스하게 스마트하게 반문하였다. “총리님, 당신은 경험이 많으신 지도자잖소. 그리고 그들과 알고 지낸지가 오래되었고. 총리님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좋지.” 주은래는 시원시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 또 문제를 그대로 내게 되돌려 보내는구먼.” 박일파도 웃었다. “방울을 풀려면 방울을 단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잖습니까.
‘문화대혁명’시기 유소기를 무너뜨릴 때 이런 평가를 받았다는 말을 들은 중국의 동지들은 납득할 수 없었다. 외국의 공산당원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평가를 함에 있어 전후가 모순된다는 것은 정치적 원인에 의한 것이지 사실에 근거한 것은 아님을. “둘째는 등소평.” 모택동은 두 번째 손가락을 꼽았다. 현장에 있던 동지들이 깊은 인상을 받았다. 명성이나 직무로 볼 때 분명 주은래를 꼽을 줄 알았는데 등소평을 먼저 꺼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정치성이 강하죠. 사원행방(四圓行方, 지식은 해박하고 다 갖춰져 있으며 일을 처리함에 정직하고 소홀히 하지 않음)이라 할까. 원칙성이 있으면서 융통성이 남다르고.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있지요. 외유내강이지요. 발전성이 많아요.” 흐루쇼프가 갑자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죠. 나도 그 사람 대단하다 느꼈어요. 쉽게 상대하지 못하겠더라고. 문제를 관찰하는 것도 예리하고…….” 흐루쇼프는 입을 다물고 손시늉을 하면서 확고하며 과단성이 있다는 뜻을 나타내었다. 모택동도 웃었다. 등소평
중국인들은 주은래(周恩來)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주은래(1898~1976),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위대한 무산계급혁명가, 정치가, 군사전문가, 외교가, 당과 국가 주요 영도자 중 한 명, 중국인민해방군 주요 창건인 중 한 명, 중화인민공화국의 개원 원훈, 모택동(毛澤東)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의 제1대 중앙 영도 집단의 중요한 성원이다. 신중국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중국은 반세기 동안 ‘신성(神聖)’이 있었다고, 신(神)은 모택동(毛澤東)이요 성(聖)은 주은래(周恩來)라고. 그래 좋다, 모택동은 신단(神壇)을 세우고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였던 것은 인정하자. 그럼, 주은래는? 성단(聖壇)을 만들려고 했거나 만들 수 있었을까? ‘단(壇)’을 만들어 그 둘을 초청한다면 인간세계로 내려와야 할 것인데. 그들의 위대함, 고명함, 영명함은 바라볼 뿐 결코 가까이 할 수는 없으리라. 그 둘은 살아있을 때 인민들과 잠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죽어서는 민중과 융화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인민들이 예배하고 숭배하는 우상이 돼서는 안 될 일이다. 중국 오천년 문명사에서 ‘선양(禪讓
임표는 왜 도망가야만 했는가? 몇 가지 행적을 보면 임표는 원래 도망갈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어쩌면 임표는 운명이 주어지는 대로 따를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결코 자아비판을 하지 않았다. 모택동이 마음대로 처리하면 어떻게 하냐고? 지가 알아서 하라지 뭐. 이런 생각이었다고 보인다. 다시 남쪽 광주로 도피하려고 했다는 것도 단지 복안이었을 따름이었다. 아무런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광주로 도피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그의 ‘사대금강’도 알지 못했다. 만약 그런 계획이 있었다면 계획을 잡은 이들은 섭군과 임립과였을 것이고. 임표도 동의하였을 것은 분명하다. 임표가 탔던 256호 비행기에 탑승한 것도 분명 수수께끼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북경의 임두두에게 알린 것은 분명한데 반응이 너무 늦었다. 왜 그렇게 뜸을 들였을까?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둘째, 북경에서는 임두두에게 256호 비행기를 타라고 하였을 텐데도 임두두는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확실하다. 셋째, 비행기를 몰았던 기장은 반경인(潘景寅)이다. 20세기 80년대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