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표는 모택동과 맞섰다. 결코 자아비판을 하지 않았다. 모택동의 치세학은 줄곧 성공한다. 요령 있게 통솔하였다. 정치적으로 위협되는 적이라 간주되는 상대는 끝내 정치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곧바로 쓰러지거나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려야만 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모택동이 천하를 경영하는 데에 적수가 없었다. 그런데 ‘9.13사건’만은 예외였다. 모택동에게는 좌절이나 다름없었다. 왜 그럴까? 임표는 과묵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심계가 굳었다. 그러면서도 전형적인 영웅주의자였다. 대만(臺灣) 군사기록 중 임표를 분석한 자료에는 임표를 지극히 도도한 개인주의자이고 영웅주의자이며 명예를 대단히 존중하였고 자존심이 강한 인물로 평가돼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오랫동안 전쟁하면서 임표와 몇 차례 교전을 경험한 대만 군인들이 임표에게 내린 평가는 상당히 믿을만한 근거가 있음은 분명하다. 그 평가처럼 임표는 스스로 존귀하다고 여겼다. 1967년 5월 1일, 임표가 천안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모택동을 만났을 때의 장면은 유명하다. 둘이 만났으면서도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임표는 시아누크(캄보디아의 전 국왕) 면전에서 버럭 화를 내고는 떠나버
임표(林彪, 1907.12~1971.9)는 일찍이 중공중앙부주석,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국방부장, 중공중앙군위 제일부주석을 역임한 신중국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왜 모택동은 임표를 죽였을까? 임표의 ‘일호 명령’이 모택동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모택동은 임표가 가만히 있기를 바랐다. 그저 어떤 일에도 상관하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어쩌면 더 나아가 자신이 시키는 일만 하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1969년 ‘진보도사건’(3월 중·소 국경 우수리 강에 있는 진보도〔珍寶島, 러시아명 다만스키〕에서 일어난 양국 국경경비대의 무력 충돌사건) 이후 중소 양국 외교부장 담판이 있었다. 북경에서 담판이 있기 며칠 전부터 임표는 대단히 긴장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일을 주관하기 시작한다. 그는 황영승(黃永勝)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국 비행장의 비행기를 은폐하고 전쟁 준비를 하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군위(軍委)의 부총참모장 염중천(閻仲川)이 몇 글자를 더하여 임표 부주석의 ‘일호 명령’이라고 명명하였다. 큰 실수였다. 왜? 임표는 모택동에게 보고하는 동시에 왕영승에게 통
모택동의 이러한 말은 어쩌면 그저 팽덕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한 것일 수도 있다. 그에게 새로운 업무를 주고 “명예를 회복시키고” 동산재기의 기회를 주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다. 어쩌면 팽덕회가 여산회의에서 잘못된 공격을 받은 것에 대하여 그저 핑계의 입바른 말일 따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직접 자신의 입으로 기본적이나마 누명을 벗겨주는 말이었다. 팽덕회의 무죄를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신에 대한 일, 보기에 과한 비판이었소. 잘못된 거지요. 몇 년 지내보고 다시 얘기합시다!” 분명 모택동이 초보적이나마 팽덕회의 누명을 벗겨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모택동의 그런 고심은 좋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문화대혁명’도 어쩌면 최소의 소망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후의 일은 누구도 생각지도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모택동조차도 제어하지 못하는 광풍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모택동이 팽덕회를 서남삼선으로 보내어 보호하려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팽덕회의 불행한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마귀의 손아귀는 풍우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지역까지 뻗혀나갔다. 오
중국학자의 서술을 원용하면 팽덕회(彭德懷, 1898.10~1974.11)는 중화인민공화국 10대 원수 중 한 명이다. 덕망이 높은 무산계급혁명가요 군사전문가이며 정치가이다. 중국 개국 원훈의 한 사람이다. 그런데 왜 모택동은 팽덕회를 죽음으로 몰아갔는가? 모택동 만년의 성격은 호둣속 같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모택동은 “200년 인생을 자신한다”고 했지만 자신이 과거 행동에 대해서도 회의하거나 부정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1959년 여산회의와 그 이후 자신이 팽덕회에게 한 행위가 과했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수도 있다. 어쩌면 요문원(姚文元) 등이 시작한 오함(吳晗) 등을 비판하는 운동이 결국은 팽덕회를 총알받이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해 진솔하면서도 자신과 수년을 생사고락을 함께하였던 전우를 보호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택동은 팽덕회를 서남삼선(西南三線, 운남〔雲南〕, 귀주〔貴州〕, 사천〔四川〕 3개성 전역이나 대부분, 호남〔湖南〕 서부, 호북〔湖北〕 서부) 업무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문화대혁명 시기 예측하지 못할 군중의 핍박을 피하도록 안배한 것이라 좋은 평가를 내리는 부류도 있다. 과연 그럴까? 1965년 9
유소기는 여전히 자기 견해를 견지하면서 가르침을 받겠다는 듯이 물었다. “그 ‘파(派)’라는 걸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소. 자본주의노선을 걷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소. 그러나 자산계급을 이미 모두 소멸됐잖소. 어찌 무슨 파(派)라고 까지 할 수 있겠소? 파를 얘기한다면 사람이 너무 많아야 될 것이오. 그럼 도처에 깔린 게 모두 적대적 모순이란 말이잖소. 석탄부, 금속 제련부 어디에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당권파가 있다는 말이오?” 모택동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장림지(張霖之)가 바로 그요!” 유소기는 감히 다시 묻지 못했다. 당시 상황에서 모택동이 누군가를 지명하면 그 사람은 타도되어야했기 때문이었다. ‘문혁’이 시작되자마자 장림지는 맨 먼저 재난을 당했다. 비참한 고문과 혹형을 당했고 문혁 당일 새벽에 북경에서 몰매 맞아 죽었다. 문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문혁’이 진행되는 와중까지도 유소기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소. 우리가 하는 것은 사회주의‘교육&
다시 말하면,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목적은 교육에 있었다. 교육을 통하여 단결할 수 있도록 만들면 되었다. 교육을 통하여 군중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변질을 막고 특권을 일소하며 적들을 타도해 ‘방수(防修, 수정주의 방어)’의 목적을 달성하면 되었다. 유소기는 간부들에게 “모두 올라가 개개인이 전부 목욕하도록” 요구하였다. 매 사람마다 관문을 통과하고 엄격하게 비판하며 통렬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군중을 충분히 동원해 “뿌리 깊고 서로 연계된” 이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비판해 폭로하게 만들도록” 하였다. 유소기는 다음 같이 줄곧 주장하였다. “인민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반드시 새로운 방법, 새로운 방침, 새로운 노선을 이용하여야 한다. 군중이 소민주(小民主) 방법을 채용해 해결하여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반드시 허용하여야 한다. 소민주를 허용하지 않고, 소민주의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대세는 분명 대민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는 진리와 법률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여야 한다고 제창한다. 이것이 바로 법치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조
1963년 4, 5월, 유소기는 부인 왕광미(王光美)와 함께 동남아 순방을 떠난다. 곤명(昆明)에 도착하였을 때 ‘사청운동’을 지도하는 문건 『현재 농촌 사업 중 약간의 문제에 관한 결정 초안』(통칭 전십조前十条)이 이미 정해져 나왔다. 문건은 “현재 중국 사회에는 엄중하고 첨예한 계급투쟁 상황이 출현하였다”라고 명확하게 표명하였다. 농촌의 ‘사청운동’과 도시의 ‘오반운동’은 모두 “자본주의 세력이 흉포하게 사회주의를 공격하는 혁명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에 대하여 타격을 주고 분쇄하여야 한다”는 데에 있었다. 유소기는 ‘전십조’에 대하여 이의를 달지 않았다. 일찍이 1961년에 유소기와 왕광미는 호남 농촌에서 44일을 머무르면서 기층에 복잡다단한 문제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더욱이 진실 된 말을 하지 않는 현상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적지 않은 지역의 지도기관은 보고에만 의지하고 업무를 지시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형식을 중시할 뿐 실제 효과는 경시하고 있었다. 눈속임과 거짓으로 중앙에서 파견한 인사들을 속이
여기서 그해의 장면을 회고해볼 필요가 있다. 모택동과 유소기는 40년을 알고 지냈다. 세인들이 인정하는 대혁명가이며 계급투쟁 이론과 실천에 있어 거장이며 사표였다. 회의장을 가득 메운 각급 간부들은 거의 모두 계급투쟁의 전문가였고 계급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특출한 인물들이었다. 그들 앞에서 충심으로 “경제 건설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방침을 옹호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 분명하였다.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기란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경제대혁명’의 참패, 그 충격은 결국 견딜 수는 없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패배의식에 빠져있는 바로 그때, 계급투쟁을 재삼 강조해 나오니 함께 목숨 걸고 혁명하였던 인물들 모두 더운 피가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사람들을 향하여 호소하며 분발시키고 있는 인물이 바로 그들을 “승리에서 승리로” 이끈 모택동이 아니던가. 일호백낙할 게 분명하였다. 당시는 국제적으로 내우외환이 겹친 상태였다.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었다. 각 부처 책임자들은 상당히 민감해
1962년 2월 21일, 유소기 주재로 정치국상위(常委)확대회의를 개최해 모두 함께 문제 해결 방법을 토론하였다. 이 회의를 통칭 ‘서루회의(西樓會議)’라 부른다. 토론 시 그해 예산이 거액의 적자가 발생했음을 발견한다. 5년 동안 누적된 적자 금액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회의에 참석자들이 모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상품 공급량과 사회 구매력 사이의 초과분은 축소된 것이 아니라 더 벌어져 있었다. 모든 분야가 절박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유소기가 말했다. “그것이 진면목인데, 두려울 게 뭐 있겠소? 칠흑같이 캄캄하다는 것은 비관적일 수도 있으나 곤란을 뛰어넘는 투쟁의 용기를 북돋는 것이 되기도 하오.” 그는 국민경제가 ‘비상시국’이라 여기고 모두 경제, 정치 방침을 제시하라고 요구하였다. “비상한 방법이 필요하오. 모든 경제 조치를 관철해 나가야 하오.” 진운(陳雲)은 회의에서 계통적으로 발언하고 각 분야의 당위 구성원들도 발표하였다. 엄중한 문제에 대하여 실사구시의 분석을 내놓으면서 난관을 극복할 방법들을 제시하였다. 3월 중순에 유소기, 주은래
유소기(劉少奇, 1898~1969), 호남성 영향현(寧鄉縣) 사람으로 중국공산당원이자 혁명가, 정치가, 이론가이다. 1920년에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다음 해에 소련 모스크바 동방공산주의노동대학(東方共產主義勞動大學)에서 학습한 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귀국 후 1925년에 제2차 전국노동대회에서 전국총공회(全國總工會)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27년에 중공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었다. 1931년에 정치국후보윈원(政治局候補委員) 중국중앙직공부(中共中央職工部) 부장, 전국총공회당단(全國總工會黨團) 서기 등을 지냈다. 1943년에 중공중앙서기처 서기와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되었다. 중공 성립 후에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국방위원회 주석 등을 지냈다. 저서로 『유소기선집劉少奇選集』이 있다. 중국학자들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유소기는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이고 중화인민공화국 개국 원훈이며 모택동(毛澤東) 동지가 중심인 공산당의 제1대 중앙 지도자 그룹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그렇다면 일찍이 전우였던 모택동은 왜 유소기를 죽였을까? 이전에 팽진(彭眞)과 양상곤(楊尚昆)이 유소기의
모택동(毛澤東)과 장개석(蔣介石)은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영수다. 중국학자들이 판단하고 있는 용인술을 보자. 일반적으로 지역적으로는 ‘오호사내(五湖四海, 방방곡곡)'와 ‘황포절강'(黃埔浙江)’이라 대별하고 ; 사람을 씀에 있어서는 ‘상관하지 않고 활용’과 ‘월권적 지휘’ ; 보편적이 입장은 ‘법률에 의거한 용인’과 ‘제왕지술(帝王之術)’의 구별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했다고 본다. 모택동은 ‘오호사내’에서 인재를 구했고, 장개석은 ‘황포와 절강’의 인재를 중용했다. 모택동의 ‘오호사내’에서 인재를 구한 원칙은 왕가상(王稼祥)을 기용한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1945년 4월, 중공칠대(七大)가 연안(延安)에서 개최됐다. 새로운 중앙위원회 선거에서 왕가상은 반수 이상을 득표하지 못하고 낙선한다. 모택동이 그 소식을 듣고 무척 놀랐다. 당내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모택동은 중앙위원 후보 선거 전에
셋째, 의견 분화로 ‘서안사변’ 후 장개석을 남경으로 호송했다. 중원 대전 몇 개월 후, ‘통일 촉진’, ‘중앙 옹호’로 개세의 공로를 세운 장학량은 결의형제인 장개석의 모든 것을 듣고 따랐다. 그때, 일본군은 동북지방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위협 정도가 나날이 강해져 갔다. 그런데 장개석은 풍옥상 등 지방 군벌의 위협을 제거한 후 전력으로 남방 중공 홍군에 대처하고 있었다.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국책(國策)’을 충실히 실행했다. 장학량의 부친인 장작림은 일본군에 의해 폭사했다. 국가를 책임지고 있으면서 집안의 원한을 품고 있던 장학량은 원래부터 일본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실행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장개석에서 “일본의 침략 정책을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등의 요구”를 제시했으나 장개석은 비준하지 않고 일본과의 담판을 주장했다. 『고유균(顧維鈞)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위원장은 현실주의적인 정치가다. 그는 반드시 일본과 담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