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패부(吳佩孚, 1871~1939), 자는 자옥(子玉), 산동 봉래(蓬萊) 사람으로 북양군벌 직계(直系, 직례파直隷派)의 총수다. 젊었을 때 군대에 들어갔으며 뒤에 보정(保定)의 무비학당(武備學堂)을 졸업하고 원세개(袁世凱) 부하였던 조곤(曹錕)의 휘하로 들어갔다. 중국정부 성립 후 벌어졌던 군벌들의 혼전 중에 직례파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920년 일본의 후원을 받은 안휘파(安徽派)의 단기서(段棋瑞)에게 승리를 거두고, 1922년 역시 일본의 영향 하에 있었던 봉천파(奉天派) 장작림(張作霖)에게 승리를 거둔다. 뇌물 선거로 조곤을 대총통에 당선시키고 영미(英美)계 군벌인 직례파의 최고 거두가 돼 북경 정계를 지배했다. 1923년 경한선(京漢線)의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자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고(2·7사변), 공산당원 임상겸(林祥謙)을 불태워 죽였다. 이와 같은 잔학성은 군벌들 중 단연 으뜸이었다. 1924년 다시 봉천파와 싸웠으나 풍옥상(馮玉祥)의 배반으로 장작림에게 패배하고 하남(河南), 화북으로 후퇴했다. 1926년 북벌군에 패해 사천성(四川省)으로 퇴각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정계를 떠나 1932년부터는 북경에서 살았
장작림(張作霖, 1873~1928), 요녕성(遼寧省) 사람이다. 마적단 출신으로 러일전쟁 때 장경혜(張景惠) 등과 함께 일본군의 별동대로 비밀리에 활약했고 그 후 동삼성(東三省) 총독의 지배하에 들어가 순방(巡防)대장이 됐다. 중화민국 수립 후 봉천(奉天, 현 심양瀋陽)에 들어가 1919년경 봉천 독군(督軍) 겸 성장(省長)으로 동북의 실권을 장악했다. 1920년 화북에서 직례파(直隷派)와 안휘파(安徽派)의 군벌전쟁에서 직례파를 지지하고 중앙정계로 진출해 열하(熱河), 차하르(察哈爾) 등을 세력범위에 넣은 뒤 직례파의 오패부(吳佩孚)와 화북 쟁탈전을 여러 차례 벌여 강소(江蘇)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한때 형세가 불리하자 북동으로 후퇴한 다음, 1926년 직례파 군벌과 합세해 다시 북경으로 진출, 혁명군의 북벌을 저지했다. 1927년 열강의 묵인 하에 북경의 공사관 구역으로 군사를 투입하고 소련 대사관 수사 등 탄압을 가하여 이대교(李大釗) 등 20명을 처형했다. 그 해 6월 대원수라 칭하고 일본을 배경으로 북경정부를 장악했으나 북벌군에게 패배해 북경에서 철수 퇴각하던 중 1928년 6월 그가 탄 열차가 봉천 부근에 이르렀을 때 폭파돼 사망했다. 장작림의 세력
새금화(賽金花)는 청말민초(淸末民初)의 명기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원래 이름은 부옥련(傅鈺蓮)이라 하기도 하고 조채운(趙彩雲)이라 하기도 한다. 강소(江蘇) 염성(鹽城)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안휘(安徽) 이현(黟縣) 사람이라고도 한다. 동치7년(1887)에 일찍이 장원급제했던 홍균(洪鈞)이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해 첩으로 삼았다. 그때 홍균의 나이는 48세였고 그녀의 나이는 15세였다. 얼마 후에 홍균이 주 러시아 공사 및 유럽 각국의 공사로 발령되자 홍균의 부인이 사교장에 다니기 싫어해 그녀를 대신 동반하도록 했다. 홍균이 죽은 후에 상해로 가서 다시 기녀가 됐다. 이름을 조몽란(曹夢蘭)으로 개명했다가 뒤에 천진(天津)으로 가 또다시 새금화(賽金花)로 바꿨다. 새금화는 청나라 말기 여러 명기 중 가장 전기적인 인물이다. 시류에 부침한 기구한 운명, 일생 동안 각양각색의 호둣속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경국지색에 대해서 ; 호객을 하던 기녀들의 배에서 일약 ‘공사부인(公使夫人)’이 돼 조정명관 홍장원을 따라 유럽을 방문했던 기이한 경력에 대해서 ; 경자사변(
이홍장(李鴻章, 1823-1901), 자는 소전(少荃), 안휘(安徽) 합비(合肥) 사람이다. 이홍장은 염군(捻軍, 1851년에서 1868년 사이 황하, 회하(淮河) 유역에서 발발했다. 염당(捻黨)이 변한 농민봉기군의 반청(反淸) 전쟁이다. 환(皖), 예(豫), 노(魯), 소(蘇), 악(鄂) 접경지역에서 독립된 대오를 형성하다가 나중에 연합했다)과 태평천국 군대를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강소(江蘇)순무, 양강(兩江)총독을 역임했다. 양무운동(洋務運動, 19세기 후반 청나라에서 일어난 중국 근대화 운동)의 제창자 중 한 사람이다. 1870년 이홍장은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을 역임하게 돼 청 정부의 군사, 외교와 경제의 대권을 장악했다. 이홍장은 국내적으로는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군중 운동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진압을 서슴지 않았고 대외적으로는 타협하고 양보해 『마관조약馬關條約』, 『중아조약中俄條約』, 『신축조약辛丑條約』 등 치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이홍장은 중국 군대사상 반동 및 매국 세력의 전형적인 대표로 평가받는다. 저서로 『이문충공전집李文忠公全集』이 있다. 이홍장은 증국번(曾國藩), 장지동(張之洞), 좌종당(左宗棠)과 더불어 &
증국번(曾國藩, 1811~1872)은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호남(湖南) 쌍봉(雙峰)이라는 외진 시골에서 태어난 서생으로 28세에 입경해 과거를 보고 진사가 됐다. 이후 그의 벼슬길은 탄탄대로를 걸었고 군기대신 목창아(穆彰阿)의 유능한 문하생이 됐다. 북경에서 10여 년을 지내면서 한림원 서길사(庶吉士)를 역임한 후 시독, 시강학사, 문연각 직각사(直閣事), 내각학사, 계찰중서과사무(稽察中書科事務), 예부시랑 및 서병부(暑兵府), 공부, 형부, 이부시랑 등의 직을 역임했다. 증국번은 학식이 남달랐고 벼슬길도 순탄했다. 증국번이 살았던 연대는 청(淸) 왕조가 건가(乾嘉, 건륭(乾隆)과 가경(嘉慶))성세에서 몰락과 쇠퇴의 길로 접어들면서 내우외환이 겹치고 핍박받는 시대였다. 증국번은 모친의 상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마침 태평천국(太平天國)이 호상(湖湘, 호남(湖南) 상강(湘江) 일대) 지역을 휩쓸고 있었다. 청 왕조의 통치는 아슬아슬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증국번은 고향에서 상군(湘軍)을 조직해 태평천국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에 따라 일등용의후(一等勇毅侯)에 봉해졌다. 청대에 문인이 무후(武侯)에 봉
『중국역대인명사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연영(李蓮英), 청나라 순천(順天) 대성(大城) 사람이다. 원명은 영태(英泰)인데 나중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자는 낙원(樂元)이고 호는 영걸(靈杰)이며 작호(綽號)는 피초리(皮硝李)다. 소리자(小李子)로도 불린다. 아홉 살 때 입궁해 태감이 됐고 영합을 잘해 자희(慈禧)태후(서태후)의 총애를 받아 내정(內廷)총관에 발탁돼 이품정대(二品頂戴)를 하사받았다. 궁정에 50여 년 동안 있으면서 권력을 농단하고 조정 일에 참여했다. 유신파(維新派)를 모함했고 매관매직으로 뇌물을 받아먹은 등 당대 최고의 권감(權監)이었다. 광서(光緖)34년(1908) 자희태후가 죽은 뒤 궁밖에 나가 있다가 얼마 뒤 죽었다. 자희(慈禧)태후 곁을 지키던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총신(寵臣)은 태감 이연영(李蓮英)일 것이다. 그는 동치(同治), 광서(光緖) 2대에 걸쳐 태감대총관(大總管) 자리에 있었다.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후궁 총비들도 그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관련한 민간 전설이 많다. 그가 비명횡사했다는 사람도 있지만 역사 기록에는 찾아볼 수 없다. 이연영의 시체가 어디에 묻혔는지 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
시대가 변하면서 영화나 드라마에 의해 태감(太監)이 무엇인지 갈수록 많은 사람이 알게 됐다. 중국 이천여 년이 넘는 봉건전제사회에서 태감은 역사발전사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왕조의 멸망이 태감의 손에 좌우되기도 했다. 태감에 대한 호칭은 많다. 환관(宦官), 사인(寺人), 엄인(閹人), 중관(中官), 내시(內侍)가 그것이다. 모두 거세(去勢, 엄할閹割)한 남성이다. 전문적으로 황궁에서 황실에 시중들던 인물들을 가리킨다. 태감은 남성이라 할 수 없었다. 수염도 없고 목소리도 높고 가늘었다. 그런데 그들의 행위와 목소리가 여성화된 경향이 있기는 했으나 그들을 여성으로 볼 수 없음은 분명하다. 어떤 의미에 있어 그들을 ‘중성인(中性人)’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대(漢代) 이후 태감들은 취처(娶妻)하기도 했다. 즉 장가를 갔다는 말이다. 태감의 처자는 대부분 궁중의 여관(女官)으로 그들의 결합을 당시에는 ‘대식(對食)’이라 불렀다. 생식 능력이 없는 태감이 어째서 취처했는가? 그 상황에 대해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오랫동안 연구를 거듭하여
양계초(梁啓超, 1873~1929), 자는 탁여(卓如), 호는 임공(任公), 근대 개량주의 개혁자, 학자다. 거인(擧人) 출신이다. 일찍이 강유위(康有爲)와 함께 변법유신을 창도했으나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신해혁명 후 원세개(袁世凱)를 옹호해 원세개 정부의 사법총장을 지냈다. 나중에는 또 단기서(段祺瑞)와 협력해 재정총장을 맡았다. 만년에는 청화(淸華)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1890년 막 17세가 된 청년 거인 양계초는 포의(布衣) 강유위를 스승으로 삼아 그의 문하로 들어갔다. 강유위의 가장 출중한 학생이 됐다. 이후 그들의 운명은 함께 뒤섞여 흘러간다. 무술변법 운동 중 스승과 제자는 곳곳으로 돌아다니며 변법을 고취했다. 강연도 하고 글도 발표하면서 학회도 만들고 신문도 창간하면서, 일시에 중국 내에서 이름을 떨쳐 강양(康梁)이라 병칭됐다. 양계초는 나중에 강유위 밑에서 학생으로 지낼 때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우리들이 강선생님의 학생이 된 후 개개인이 천진난만했고 패기가 넘쳐났으며 형제처럼 지냈다. 선생님도 우리들은 친아들처럼 대해줬다. 강선생님은 그의 집안에 누대로 보관해온
강유위(康有爲, 1858~1927), 자는 광하(廣厦), 근대 개량주의 영수로 광동(廣東) 남해(南海) 사람이다. 관료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광서(光緖) 때에 진사였고 공부주사를 제수 받았다. 1898년 광서제를 의지해 변법유신(變法維新)운동을 발동했으나 실패 후 외국으로 망명했다. 1917년 장훈(張勛) 복벽운동에도 참여했으나 실패한다. 일생동안 많은 저술을 남겼다.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대동서大同書』, 『중용왕中庸汪』이 그것이다. 1985년 4월, 일본이 강압으로 『마관조약馬關條約(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강유위가 주동해 북경에서 응시한 1300여 명의 거인(擧人)들이 연명한 후 광서제에게 상서를 올린다. 민족이 위급에 처한 엄준한 형국을 간곡히 진술하고 화친 거절, 천도, 병사 훈련, 변법을 실행하자는 주장을 제기한다. 그 ‘공차상서(公車上書)’는 유신변법의 서막이었다. 유신 인사와 황제 도당의 관원들의 적극적인 추진아래 1989년 6월 11일 광서제가 ‘명정국시(明定國是)’ 조서를 반포하고 변법을 선포했다. 이때부터 신정이 시작됐지만 9월 21일 자
원세개(袁世凱, 1859~1916), 자는 위정(慰亭), 하남(河南) 항성(項城) 사람으로 북양(北洋) 군벌의 수령이다. 일찍이 주조선(駐朝鮮)통상대신을 역임했고 나중에 천진(天津)에서 ‘신건(新建) 육군’을 훈련했다. 1898년 무술변법 때 유신파를 배반하고 자희(慈禧)태후의 신임을 받았다. 1911년 신해혁명 때 내각총리대신이었던 그는 출병해 혁명당과 협상하면서 한 편으로는 손중산(孫中山)에게 양위하도록 위협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청제(淸帝)를 퇴위토록 핍박해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의 자리를 빼앗았다. 1915년 12월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1916년 3월 22일 황제 제도를 취소할 것을 강요당하다 그해 6월 중국 민중의 성토아래 두려움에 떨며 죽었다. 중국 근대사에 있어 유명한 유신(維新)운동은 무술정변(戊戌政變)으로 종결된다. 그 사변의 상황은 어떻게 전개됐는가? 1898년 9월 21일 새벽, 자희태후는 이화원(頤和園)에서 서직문(西直門)을 통해 광서(光緖)황제가 거주하는 대내양심전(大內養心殿)으로 들어서서는 모든 문건을 가지고 간다. 그녀는 광서제를 “내가 너를 20여 년 무육했건만 네가 소인들의 말을 듣고
광서(光緖, 1871~1908), 이름은 재첨(載湉), 순(醇)친왕 혁현(奕譞)의 아들이다. 동치(同治)13년(1874), 동치제가 죽고 후사가 없자 황위를 승계했다. 즉위 후 동서(東西) 궁 황태후가 수렴청정하다 광서 13년에 친정하기 시작했다. 친정하기는 했으나 조정 실권은 여전히 자희(慈禧)태후가 장악하고 있었다. 광서 14년 강유위(康有爲) 등을 처음 중용해 언로를 넓히고 과거제를 개혁했으며 구신(舊臣)들을 폐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8월 6일 자희태후가 태도를 바꿔 광서를 영대(瀛臺)에 구금하니 ‘변법(變法)’은 실패했다. 광서34년 10월, 함원전(涵元殿)에서 병으로 죽었다. 1908년 10월 21일 유시(酉時), 광서황제가 북경 중남해(中南海)의 영대(瀛臺) 함원전에서 죽는다. 이튿날, 자희태후도 북경 고궁(故宮) 의란전(儀鸞殿)에서 병으로 죽었다. 광서제의 죽음과 자희태후의 죽음, 거의 연속해서 발생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20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참으로 너무나 기이하다. 이해하기 힘들다! 광서제의 죽음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광서제가 죽기 이전에 약
흔히 ‘서(西)태후’라 부르는 자희(慈禧)태후(1835-1908)는 예허나라(Yehenala,엽혁나랍葉赫那拉) 씨로 청나라 만주 정황기(正黃旗) 사람이다. 안휘(安徽) 영지광대도(寧池廣大道) 혜징(惠徵)의 딸이다. 함풍(咸豊)원년(1851)에 입궁해 의귀인(懿貴人)에 봉해지고 6년 아들 재순(載淳, 동치제(同治帝))을 낳으니 의귀비(懿貴妃)가 됐다. 함풍제가 죽고 아들 재순이 여섯 살 나이로 즉위하자 공(恭)친왕과 공모해 쿠데타로 숙순(肅順) 등을 주살하고 반대파를 일소한 후 모후로서 동태후(東太后, 자안태후慈安太后, 니오후루鈕祜祿 씨)와 함께 섭정했다. 광서(光緖) 원년(1875) 동치제가 죽자 누이동생의 세 살짜리 아들을 옹립해 광서제(光緖帝)로 즉위시키고 섭정했다. 광서(光緖)26년(1898) 광서제가 친정한 후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추진하자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켜 좌절시키고 광서제를 궁에 구금시켰다. 퇴보적 정책을 펼쳐 청 왕조의 권위 실추와 함께 혁명운동, 입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광서제가 죽은(광서21년) 이튿날 죽었다. 여러 문학작품 속이나 영화, 드라마 작품 중 자희태후는 흉악하고 잔인하며 완고한 보수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