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치(同治, 1856-1875), 이름은 재순(載淳), 함풍제(咸豊帝)의 큰아들이다. 함풍11년(1861) 7월 황태자에 옹립되고 10월에 황위에 오르는데 그의 나이 여섯 살이었다. 동서(東西)의 두 궁의 황태후가 수렴청정하다 동치12년 정월에야 비로소 친정한다. 친정 이듬해 양심전(養心殿)에서 병사했다. 묘호는 목종(穆宗)이다. 청 왕조 목종 동치황제의 죽음에 대해 관방에서는 천연두를 앓자 급히 고치려 했으나 손 쓸 새도 없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했다. 100일 이후 황후도 뒤따르면서 세상을 경악케 했다. 조야에서는 그 둘의 사인에 대한 의론이 분분했다. 황제와 황후 둘이 세상을 떠남에 2개월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정상적이지 않은 숨겨진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 여기게 만들었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기이한 소문이 나돌았다. 먼저 동치제의 전후관계를 살펴보자. 동치제가 즉위한 때의 나이는 겨우 여섯 살이었다. 처음에는 8대신(숙순(肅順), 어전대신 재원(載垣), 단화(端華), 경수(景壽), 군기대신 목음(穆蔭), 광원(匡源), 두한(杜翰), 초우영(焦祐瀛))이 보정(輔政)하고 오래지 않아 함풍의 황후 니오후루(뉴호록(鈕祜祿)) 씨 즉 동(
홍수전(洪秀全.1814~1864), 원명은 인곤(仁坤)이다. 광동(廣東) 화현(花縣)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도광(道光) 23년 배상제회(拜上帝會)를 개창하고 29년 양수청(楊秀淸) 등과 결의형제 맺어 봉기할 계획을 세웠다. 금전(金田) 봉기 후 나라이름을 태평천국(太平天國)이라 정하고 스스로 천왕(天王)이라 불렀다. 그 후 민중을 거느리고 영안(永安)을 점령하고 계림(桂林)을 지나 장사(長沙)를 포위하고 무한(武漢)을 공략했다. 함풍(咸豊)3년 남경(南京)을 점령해 수도로 정한 후 천경(天京)이라 명명하고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를 반포했다. 나중에 여러 왕들과 틈이 생겨 석달개(石達開)는 그를 떠났고 청나라 토벌대가 계속해 공격해 왔다. 동치(同治)3년(1864) 천경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의 아들 홍천귀복(洪天貴福)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1864년 6월 1일 청나라 군대가 맹렬하게 공격해 내려오는 상황 속에서 태평천국의 수도 천경은 머지않아 함락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태평천국이라는 거대한 성이 무너져 내릴 때 천왕 홍수전은 성내 천왕부에서 죽었다. 향년 51세였다. 홍수전의 사인에 대해 역사학계는 두 가지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살했다는
양수청(楊秀淸)(1821~1856), 원명은 사룡(嗣龍), 광서(廣西) 계평(桂平) 사람이다. 도광(道光)26년(1846)에 배상제회(拜上帝會)에 가입했고 30년에 금전(金田)에서 봉기했다. 함풍(咸豊) 원년 중군(中軍) 주장(主將)으로 임명된 후 계속해서 동왕(東王), 구천세(九千歲)에 봉해졌다. 서, 남, 북을 통제 관리하고 제왕(諸王)을 도와 군정대권을 장악했다. 함풍6년, 청나라 군대의 강북 강남 본영을 대파하는데 탁월한 공을 세웠다. 같은 해 8월 위창휘(韋昌輝)에 의해 주살됐다. 그의 죽음은 천왕(天王) 홍수전(洪秀全)에게 자신을 ‘만세(萬歲)’에 봉하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홍수전은 그 공을 기려 8월 4일을 ‘동승절(東升節)’로 정했다. 태평천국 역사상 유명한 ‘천경사변(天京事變)’은 1856년 9월 28일에 발생했다. ‘천경사변’에 대한 사전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 태평천국 지도자 집단 간 분열에 의해 발생한 권력투쟁이다. 도성을 천경(天京)(현 남경)을 수도로 정한 후 태평천국의 주요 인물들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중국 봉건시대에 구오지존(九五之尊)인 황제만을 칭하는 말이 ‘만세(萬歲)’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가 아니 듯이 나라에도 임금이 둘일 수 없다. 한 왕조의 ‘만세’는 당연히 한 자리만 있을 뿐이었다. 청(淸)나라 말기의 태평천국(太平天國)은 강남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청 왕조와 수 십 년을 대치했다. 강동(江東) 왕조의 위엄을 엄연히 갖추고 있었다. 그 지존 역시 ‘만세’라 불렀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사료를 보면 태평천국의 ‘만세’는 한 명이 아니라 여럿이었다. 몇 명이었는가에 대해 현재까지도 역사학계는 논쟁 중이다. 그리고 새로운 문제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태평천국이란 청(淸)나라 말기 홍수전(洪秀全)과 농민봉기군이 세워 14년간 존속한 국가(1851∼1864)를 말한다. 청 정권은 장발적(長髮賊), 월비(粤匪), 발역(髮逆) 등으로 불렸다. 1843년 홍수전이 광동(廣東)성 화현(花縣)에서 창시한 배상제회(拜上帝會)에서 비롯됐다. 하늘의 주재자인 상제(上帝)를 여호와와 같은 위치에 놓고 모세와 그리스도가 여호와로부터 구세의 사명을 받았듯이 중국을
가경(嘉慶)(1760~1820), 이름은 옹염(顒琰), 건륭제(乾隆帝)의 열다섯째 아들로 건륭65년(1798) 황태자에 책봉됐다. 부친은 정치를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가경 4년 부황이 죽자 친정하기 시작하면서 처음 탐관오리 화신(和珅)을 사사하고 계속해서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봉기를 평정했다. 게으름을 경계하고 성실하게 정무를 봤으며 실제적이었다. 예를 준수하면서 모든 것을 민정과 민의를 체험하고 관찰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천조(天朝)는 부유사해(富有四海)”라 자처했다. 25년 피서산장(避暑山莊)에서 죽었다. 가경 25년 더운 여름, 가경제는 많은 수행원, 명배우와 예기, 기마와 수레를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목란위장(木蘭圍場)을 향해 출발했다. 얼마 없어 열하(熱河)에 당도해 피서산장에 안착한 후 목란추수(木蘭秋狩)를 시작했다. 가경제는 피서산장에 진주하는 것이 자기 일생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7월 25일 60세인 그는, 어떤 징조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가경제가 죽자 열하의 행궁은 정보를 봉쇄했다. 피서산장의 대문을 굳게 닫고 출입을 제한했다. 27일이 돼서야 도성
화신(和珅)(1750~1799), 자는 치재(治齋), 만주 정홍기(正紅旗) 사람이다. 생원 출신으로 세직(世職)을 이어받았다. 건륭제 때 군기대신을 역임했고 호부상서, 의정대신을 거쳐 나중에 문화전(文華殿)대학사에 오르고 일등공으로 봉해졌다. 문예 방면에 재능이 있었고 용모가 준수했으며 안색을 살피는 데 능해 건륭제가 극히 총애했다. 그 집정 20여 년간 도당을 만들어 사리를 꾀하고 권모술수를 부려 재물을 탐했다. 가경(嘉慶)이 즉위한 후 건륭제가 죽기를 기다려 20조 항목의 죄목으로 옥에 가두고 자결을 명했다. 그의 가산은 몰수됐는데 황제의 재산과 버금갔다고 한다. 화신은 건륭제 시기의 제일 권신이다. 파벌을 만들어 사사로이 이익을 탐했고 권력을 휘둘려 정치를 혼탁하게 만들었다. 부패하고 타락했으며 횡령하고 수뢰했다. 권력을 독점한 20여 년 동안 거만하고 난폭했으며 제멋대로 굴었다. 이는 분명 건륭제가 총애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그렇다면 건륭제는 혼군(昏君)도 아니요 중국 역사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성군이었으며 나라를 다스리고 국가를 편안하게 만든 인물이었는데 화신의 못된 행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말인가? 건륭제가 화신을 오랫동안 총애
복강안(福康安, ?~1796)은 푸차(Fuca, 부찰(富察)) 씨로 자는 요림(瑤林)이다. 청나라 만주 양황기(鑲黃旗) 사람으로 푸헝(Fuheng, 부항(傅恒))의 아들이고 고종(高宗, 건륭제) 효현황후(孝賢皇后)의 조카다. 운기위(雲騎尉)를 세직(世職)으로 삼등시위(三等侍衛)에 오르고 거듭 승진해 부도통(副都統)까지 올랐다. 건륭 38년(1773) 아구이(Agui, 아계(阿桂))를 도와 금천(金川)을 공격했다. 49년(1784)에도 아구이를 도와 감숙(甘肅) 회민(回民)봉기를 진압했다. 버이서(Beise, 패자(貝子))에 봉해지고 양광총독(兩廣總督), 호부상서, 보화전(保和殿)대학사 겸 군기대신 등을 역임했다. 비견할 이가 없을 정도로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대단히 사치했고 상사(賞賜)를 남발했다. 가경(嘉慶) 때 명령을 내려 장수들이 지나친 포상을 삼갈 것을 지시하면서 사례로 늘 복강안을 들었다. 건륭제 시기 효현황후의 친정 푸차 가문은 그 당시 가세가 최고로 찬란했던 가문 중 하나다. 그 이유를 찾아보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건륭제가 효현황후가 죽자 비길 데 없이 애통해 했고 더 나아가 외척에게 정을 많이 쏟은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건륭제는 눈앞의 여인이 우라나라 씨가 아니라 일찍이 죽은 효현황후 푸차 씨이기를 남몰래 바라고 있었다. 건륭제는 우라나라 씨에게 싫증을 느끼고 반감이 들기 시작하면서 푸차 씨의 장점과 우라나라 씨의 단점을 비교하는 습관이 생겼다. 비교하면 할수록 우라나라 씨에 대한 반감이 세졌다. 반감이 세면 셀수록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집착과 같은 행태로 변했다. 그리고 자신의 혼인에 대해 더더욱 실망하게 됐고. 건륭 20년, 열셋째 황자를 생산한 이후 우라나라 씨는 황제와 자신이 나날이 소원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여인의 직감은 틀림없다. 푸차 씨가 죽은 지 오래지만 그 그림자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건륭제는 푸차 씨에게 여전히 깊은 정을 주고 있었다. 그것보다도 더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황제가 자신에게 줬던 열정과 흥미가 다른 비빈들에게 전이됐다는 것이다. 흔빈(忻嬪), 영비(令妃)와 같은 이들은 이전에는 자신보다도 못했던 비빈들이었는데 지금은 역전돼 황제의 마음속 사랑의 여인이 돼 있었다. 심지어 막 입궁한 회부(回部)(청(淸)나라 때 차이다무(柴達木) 분지에 있던 지명) 여자 용빈(容嬪) 조차도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위풍당당한 대청제국
사람들이 식후 한담거리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청관기안淸官奇案』중의 ‘건륭휴처(乾隆休妻)’(건륭이 아내를 쫓아내다)의 고사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우라나라 황후를 천성이 강직하고 단정하며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여자로 묘사하고 있다. 입궁 후 황후라는 자리까지 오른 존귀한 몸이 됐지만 부인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건륭제가 구애받지 않고 풍류를 즐기려할 때마다 제지했다. 우라나라 황후가 황제에 대해 권고하는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말이 없었다. 황제는 궁 안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자 효행한다는 핑계로 모친을 모시고 강남을 순행하면서 구중궁궐의 속박을 벗어나 벌과 나비를 쫓아다니고 싶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자신을 속박하는 황후를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황후가 태후를 모시고 효도를 할 수 있도록 동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몇 번이나 청했으나 건륭제는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황제가 출행하는 그 날, 황후는 황제의 허락도 받지 않고 궁녀들에게 행장을 꾸리라고 명한 후 황태후의 남순을 시봉하면서 며느리의 효도를 다한다는 것을 이유로 태후의 배인 봉주(鳳舟)에 올라 함께 강남으로 동행했다. 천자를 호위하며 순행에 나선 왕공
우라나라(UlaNara, 오랍나랍(烏拉那拉), ?~1766) 황후는 좌령(佐領) 나르부(Narbu, 나이포(那爾布))의 딸로 홍력(弘歷)에게 시집가 측복진(側福晉)이 됐고 건륭(乾隆) 2년(1737) 한비(嫻妃)가 됐다가 귀비(貴妃)에 오른다. 효현(孝賢)황후가 죽자 황후로 책봉된다. 건륭 30년 황제를 따라 남순(南巡)하다 건륭제와 사이가 벌어진 후 분노를 참지 못해 삭발했다. 이듬해 북경에서 죽었다. 성격이 강직하고 외곬이라 건륭제의 여성관계를 가지고 여러 번 아옹거려 건륭제가 싫어하게 됐다. 죽은 후 귀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2남 1녀들 뒀는데 딸은 요절했다. 건륭제의 정처 푸차(부찰(富察)) 씨가 죽자 황후가 된 우라나라 씨는 건륭제보다 일곱 살이 어렸다. 열서너 살쯤에 수녀(秀女)에 뽑혔다. 당시 건륭제는 황자로 번저(藩邸)에 있었는데 옹정(雍正) 황제가 측실 복진으로 하사했다. 홍력이 즉위 후 건륭 2년 후비 책립 의식을 거행할 때 20세가 된 우라나라 씨를 한비(嫻妃)로 책봉했다. 온유하고 부덕한 그녀는 황태후 니오후루(Niohuru, 뉴호록(鈕祜祿)) 씨의 사랑을 받았다. 건륭 10년 10월에 한귀비로
푸차 씨는 온유하고 지혜로웠다. 건륭제에게 깊은 애정을 줬으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여인은 정치에 간섭할 수 없다는 대청제국의 전통을 푸차 씨는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신의 황권에 어떤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 건륭제의 개성도 잘 알고 있었다. 군주의 어려움을 후비가 된 자는 이해할 수는 있어도 분담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으로 황상을 묵묵히 안위하고 긴장을 풀어주고 유쾌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자신은 온몸으로 다가가 다정다감하게 보살피고 안전하고 쾌적한 남편의 피난처가 돼 주면 됐다. 한번은 건륭이 절창(癤瘡, 절양癤瘍)을 앓았다. 어의가 기본적으로 치료하고 백일을 요양해야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고 당부했다. 황후가 듣고서는 태후를 봉양해야 하고 육궁의 일을 대행해야 했고 자녀를 양육에 전력을 해야 했기에 기진맥진했지만 다른 비빈에게 맡기지 않고 매일 친히 침상을 지키며 시봉했다. 매일 밤 황제의 침궁에서 잠을 자면서 차를 올리고 물을 따라줬다. 황제가 요양하는 기간 동안 약을 따르는 등 어느 하나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백일 정도 지나 건륭제가 건강을 회복하고 처음처럼 강건하게 돼서야 본궁으로 돌아갔다. 백일 동안 건륭
효현순황후(孝賢純皇后, 1711~1748), 푸차(Fuca, 부찰(富察)) 씨, 차하얼(찰합이(察哈尔)) 총관 이영보(李榮保)의 딸이다. 황태자 홍력(弘歷)에게 시집간 후 적복진(嫡福晉)으로 책봉되고 건륭(乾隆) 2년(1737) 황후에 봉해졌다. 성정이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며 정중하고 검약했다고 한다. 진주나 비취를 두르지 않아 건륭제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건륭 13년에 죽자 건륭제가 통절했다 전한다. 2남 2녀를 낳았는데 둘째 아들과 첫째 딸은 요절했다. 건륭황제는 ‘풍류천자風流天子’라 할 만하다. 다정한 군주였다고 한다. 미복을 하고 여러 차례 강남으로 내려갔었기 때문에 야사와 민간에서는 많은 일화를 만들어내 차 마실 때나 식후의 얘깃거리로 삼았다. 그의 첫째 황후 푸차 씨의 죽음에 대해 후세 널리 퍼진 『청조야사대관淸朝野史大觀』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고종(高宗, 건륭) 요현황후는 부문충공(傅文忠公) 항(恒)의 누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항의 부인과 고종이 사통하자 후(효현황후)와 여러 차례 반목해 고종과 오랫동안 좋지 못했다. 남순 후 직예(直隸) 경계에 이르렀을 때 황제의 선박에 동숙하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