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정사(正史)의 기록을 보자. 그 두 편액은 강희제가 쓴 것이다. 『청사(淸史)․진원룡전』에 보면 강희 39년 4월 황제가 대신들을 조견할 때 신이 나서 “그대들 집에 각기 당호(堂號)가 있을 텐데 자기 말이라도 상관없다면 짐이 글씨를 내리려 하오”라고 했다. 진원룡은 자신의 노부가 이미 80세를 넘겼는데 자부에게 효도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황상에게 ‘원일당’ 세 글자를 내려 주십사 요청하니 강희제는 호쾌하게 일필휘지로 편액을 썼다고 돼 있다. 『해녕주지(海寧州志)․열녀전』에 보면 진세관의 종조부 진방언(陳邦彦)이 어릴 적에 부친을 여의어 그의 모친 황(黃) 씨는 41년 동안 수절하면서 아들을 재목으로 키웠다. 진 씨 가문이 영광스럽게 된 후 강희제는 자모의 희생정신을 높이 사 친히 ‘절효(節孝)’ 두 글자를 써 하사했고 ‘춘휘당’이란 편액을 써서 진 씨 집안에 내렸다고 돼 있다. 이렇게 본다면 진 씨 집안의 편액은 건륭의 출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건륭은 과연 진 씨 집안의 아들일까? 그들의 출생 기록을 보면 기본적으로 판단을 내릴
건륭(乾隆, 1711~1799), 이름은 현엽(玄燁), 옹정(雍正)의 셋째 아들이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영리했으며 기억력이 대단히 뛰어나 강희(康熙)제의 사랑을 받았다. 즉위 후 여러 차례 중가얼(Junggar, 준갈이(准噶爾)), 대소(大小) 금천(金川, 사천(四川) 대도하(大渡河) 유역)을 공략해 귀속시켰고 안남(安南)을 정벌하면서 청 왕조의 안녕을 가져왔다. 조정 대사를 처리함에 있어 현재(賢才)를 중용하고 강온병행정책을 썼다. 노역을 줄이고 세금을 낮추었으며 수로를 준설해 백성을 편안케 하도록 애썼다.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불렀다. 건륭 65년 황위를 가경(嘉慶)에게 양위해 태상황에 올랐다. 건륭제는 중국 역대 제왕 중 가장 장수한 인물이다. 60년간 재위했다. 거기에다 태상황 3년을 더하면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권력을 누렸다. 건륭제는 일생동안 부귀영화를 누렸고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으나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그리 영광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옹정제가 조포계(調包計)를 써서 해녕(海寧) 진(陳) 씨의 아이와 바꿔치기 했다고 하기도 하고, 그의 모친은 존귀한 집안 출신의 여인이 아니고 열하(
옹정(雍正, 1678~1735), 이름은 윤진(胤禛), 강희(康熙)제의 넷째 아들이다. 자태가 위용 있고 행동거지가 단아해 부황의 사랑을 받았다. 강희 37년에 버일러(Beile, 패륵(貝勒))에 봉해졌고 48년에 옹왕(雍王)에 봉해졌다. 형제들과 황제 자리를 다투는 과정에서 신중하게 행동했고 기묘한 수단으로 마침내 우위를 점해 대통을 이었다. 그가 등극한 후 관리의 품행과 치적을 깨끗하고 투명하게 했고 탐관오리를 주살해 조정을 준엄하게 만들었다. 그는 정무를 열심히 했고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반란을 평정하고 러시아와의 국경선을 획정했다. 옹정 13년(1735) 원명원(圓明園)에서 급사했다. 넷째 홍력(弘歷)에게 황위를 물려줬다. 익호는 헌(憲)이요 태릉(泰陵)에 묻혔다. 1735년 옹정 황제는 북경의 교외지역 원명원에서 갑자기 죽었다. 옹정 황제의 사인에 대해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의견은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상유내각上諭內閣』과 『주비유지朱批諭旨』 등 공문 기록에 근거하면 옹정 7년(1729) 겨울부터 옹정제가 큰 병을 얻었고 옹정 9년(1731) 가을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못했다. 오한과 신열이 계속됐고 음
연갱요(年羹堯, ?~1725), 자는 양공(亮工), 한군(漢軍) 양황기(鑲黃旗), 강희(康熙) 39년(1700) 진사, 59년 정서장군(定西將軍)에 제수됐고 이후 티베트를 공략했으며 요충지를 지켜 옹정(雍正)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삼등공(三等公)에 봉해졌다. 무원(撫遠)대장군에 제수된 후 청해(靑海) 나복장단진(羅卜藏丹津)을 평정한 공으로 일등공(一等公)에 봉해졌다. 용맹하고 지략이 많아 조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나중에 남달리 공이 많음을 믿고 오만해져 ‘교종불법(驕縱不法)’(교만하고 방자하여 법을 지키지 않는다)했다는 평가를 받아 옹정 3년(1725)에 92개의 죄행을 씌워 옥에 갇히고 자진을 명받는다. 다시 말하면, 연갱요는 진사 출신이다. 관직은 사천(四川)총독, 천섬(川陝)총독, 무원(撫遠)대장군을 역임했다. 티베트를 공략하고 청해(靑海) 회족 반란을 평정했다. 옹정 2년 청해를 평정한 후 10월에 입경해 관직을 받는다. 당시 공이 천하를 덮을 만하여 대신들 중 가장 높은 관직인 일등공(一等公)에 봉해지고 그의 부친 역시 일등공에 태부함(太傅銜)이 더해졌고 아들 둘은 자작(子爵)과 남작(男爵)에 각각 봉해졌으며
다섯째 황자 윤기(胤祺)는 심성이 선량하고 사람됨이 온후해 강희가 무척 좋아해 항(恒)친왕에 봉했다. 이는 강희가 그에게 봉한 왕이 영원히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황태후가 부양했다. 황태후가 병환이 위급하자 그는 요리와 관련된 사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자청했지만 강희는 허락하지 않고 윤지(胤祉)와 옹정(雍正) 등에게 일을 맡도록 명했다. 이는 윤기가 능력이 없어 중용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도 황태자의 지위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경쟁을 하지도 않았고 결당하지도 않았다. 다른 황자 윤도(胤祹)는 48년(1709)에 버일러에 봉해졌다. 당시 사람들의 주의를 받지 못했다. 이후 강희가 출행할 때 자주 시종을 했기 때문에 윤도도 강희 심중에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강희도 그를 재능이 있는 아들로 보았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를 황태자로 삼으려 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강희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던 대상은 두 명밖에 남지 않는다. 넷째 황자 윤진(胤禛)과 열넷째 황자 윤제(胤禵)다. 군사 방면에 강희는 일찍이 열넷째 윤제를 대대적으로 기용한
강희(康熙, 1654~1722, 얼허타이핀(ElheTaifin)), 이름은 현엽(玄燁), 푸린(복림(福臨))의 셋째 아들이다. 그리고 청나라 성조의 연호다. 61년간 중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쓰인 연호로 중국 역대 왕조 중 마지막 전성기인 강건(康乾)성세라는 치세이기도 하다. 강희는 평화로운 조화를 뜻한다. 오보이(Oboi, 오배(鰲拜))와 삼번(三藩 : 운남(雲南)의 오삼계(吳三桂), 광동(廣東)의 상가희(尙可喜), 복건(福建)의 경계무(耿繼茂)(죽은 뒤 아들 경정충(耿情忠)이 뒤를 이음))의 난 진압, 대만(臺灣) 복속, 몽골과 티베트 원정 등으로 청 왕조의 기틀을 세웠다. 옹정(雍正, 1722~1735), 아이신기오로(애신각라,愛新覺羅) 윤진(胤禛)이고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제(憲帝)다. 재위 때 사용한 연호에 따라 일반적으로 옹정제라 부른다. 강희의 넷째 아들이다. 강희제 말기에 황족과 조정의 신하 사이에 붕당의 싸움이 심해 즉위 후 동생인 윤사(胤禩), 윤당(胤禟) 등을 서민으로 강등시키고 권신인 연갱요(年羹堯), 퉁가롱코도(TongaLongkodo, 융과다(隆科多)) 등을 숙청해 독재 권력을 확립했다.
강희는 확실히 황태자의 능력 배양에 주의를 기울였다. 세 차례 갈단(Galdan) 친정[강희 29년(1690), 강희 35년(1696), 강희 36년(1679)] 기간에 태자에게 도성을 지키며 일상 사무를 처리하도록 명했다. 각부 아문의 모든 주장(奏章)을 “직접 상주(上奏)하지 말고 모든 일을 황태자가 듣고 처리토록 하라. 만약 중대하고 긴박한 일이 생겼을 때는 여러 대신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한 후 황태자에게 상주하라”고 했다. 강희가 보기에 선조가 남긴 강산과 사직은 결국 황태자에게 넘겨 다스리도록 해야 하니 윤잉을 강하게 가르쳐야 했다. ‘옛날의 승패’, ‘인심향배’, “수성은 마땅히 어때야 하고 군사를 운용함에 필히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 모두 “매우 상세하게 가르쳐야”하기에 하나하나 시의적절한 대책을 직접 일러 주었다. 이를 위해 그는 황태자에게 한문과 만주어를 배우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익히게 했으며 경사(經史)를 읽고 서법을 배우게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무일재(無逸齋)에서 독서”를 했는데 “원단 가절의
윤잉(胤礽, ?~1724)은 강희(康熙, 1796∼1820)의 둘째 아들이다. 강희 14년(1675) 황태자에 봉해져 처음으로 정사를 맡고 중용되기 시작했다. 47년 강희는 “조상의 덕을 본받지 않는다”는 등의 죄명으로 태자를 폐위하고 수감시킨다. 수개월 후 또 태자에 복위시켰다가 51년 다시 폐위시키고 함안궁(咸安宮)에 구금한다. 옹정(擁正) 2년(1742)에 죽었다. 이밀(理密)친왕으로 추숭됐다. 윤잉은 효장문태황태후(孝莊文太皇太后)가 지정한 태자가 돼 어릴 적부터 부황 강희의 정성어린 양육을 받는다. 재능이 넘쳤다고 한다. 말 타기, 활쏘기, 언담(言談), 문학에 능해 10살이 되기도 전에 강희를 따라 순행을 나갔고 정사를 처리하는 방법을 배웠다. 강희도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 태자에게 황태자 고유의 제도를 제정해 태자의 위험을 갖춘 복장, 의장(儀仗), 용품 등을 황제와 다름없이 체현토록 했다. 국가 3대 명절 중의 원단(元旦), 동지(冬至), 그리고 태자의 천추절(千秋節, 생일)에 왕공 백관들이 황제에게 조하(朝賀)한 후 태자 거처에 가서 같은 의식을 진행하도록 했다. 황제에게 ‘삼궤구고두(三$
순치(順治, 1638~1661), 이름은 푸린(Fulin, 복림福臨), 홍타이지(황태극皇太極)의 아홉째 아들로 홍타이지가 죽자 여섯 살 나이에 황제 자리에 앉았다. 1653년 도르곤이 사냥을 나섰다가 사망하자 순치제의 친정이 시작됐다. 14세의 순치제는 도르곤이 정권을 찬탈하려고 했다는 역모 혐의로 추벌(追罰)했다. 그와 동시에 제왕(諸王)의 6부 관리를 금지시키는 등 제왕의 세력 억제를 꾀했고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는 정책을 취했다. 1659년 영명왕(永明王)을 운남(雲南)으로부터 미얀마로 내몰아 명나라 잔존 세력 대부분을 평정했다. 한인(漢人) 공신 오삼계(吳三桂) 등 이른바 삼번(三藩)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면서 황제의 권력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평정했다. 명나라의 정치체제와 지배이념을 계승하고 한인을 등용했다. 명 말기의 폐정(弊政)을 바로잡아 인심 안정에 힘 기울여 중국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순치제의 치세 동안 안정화된 대청제국은 강희제(康熙帝)로 넘어가 가장 안정적인 국가의 기틀이 마련됐고 전성기를 구가하게 됐다. 순치 18년(1661) 천연두로 병사했다. 다시 말해 순치 황제 아이신기오로(Aisingioro, 애신각라愛新覺羅) 푸린은 청 왕조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효장문황태후가 탐문한 결과 도르곤이 와병 중에 그의 심복에게 “만약 내가 황제가 됐고 지금 어린 황상이 황태자가 됐다면 내가 어찌 병을 얻었겠는가?”라고 했다는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 ?~1687), 보르지기트(Borjigit 박이제길특博尔济吉特) 씨이며 호르친(Khorchin 과이심科爾沁) 버일러(패륵貝勒)인 자이상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청(淸) 태종(太宗, 1592~1643) 홍타이지(HongTaiji, 황태극皇太極)는 누르하치의 여덟째아들이다. 어릴 적부터 남달리 총명했다고 한다. 과묵하고 쾌락을 쫓지 않았다.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