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19 (목)
오태숙
군위오씨종친회 제29대 회장과 (재)군위오씨장학재단 이사장 취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방선거를 앞둔 제주교육계 현장이다. 도무지 민주제 작동원리와는 거리가 먼 일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6월1일 치러질 지방선거에서 선출될 교육감 후보를 정하는 과정에 대한 문제제기다. 한마디로 절차적으로도 문제지만 주민자치 직선이란 대의명분을 몰각하고 있다. 교육계 현장에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적 잣대가 등장하는 것도 마뜩치 않지만 현 이석문 교육감의 3선 도전에 맞서는 보수성향 그룹의 단일화 방식은 우선 중대한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위임받지 않은 권력’이 후보를 정하겠다는 논리가 문제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대의원으로 정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선거인단’을 꾸려 후보를 좌지우지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를 주도한 건 제주바른교육연대다. 진보진영 이석문 현 교육감에 대항할 보수성향 후보로 고창근(71) 전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과 김창식(65) 전 제주도의회 교육의원 2명이 참여, 여론조사로 후보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여론조사는 자동응답조사(ARS) 조사 방식으로 한다. 조사대상은 제주도민 50%와 선거인단 50%다. 선거인단은 교육단체
▲ 경찰이 지난 18일 오후 검은색 상·하의를 입은 김모(55)씨를 제주국제공항을 통해 제주경찰청으로 압송하고 있다. [제이누리DB] 1998년 민선 2기 6·4지방선거가 마무리되고 고작 며칠 뒤였다. 천주교 제주교구 노형성당에서 ‘중대한’ 기자회견이 있다는 연락이 왔다. 회견을 주도한 이는 당시 제주의 정의구현사제단을 이끌고 있는 임문철 신부였다. ‘선거판의 중대한 비리를 폭로할 것’이라는 예고가 있었다. 중앙·지방언론사를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현장으로 내달렸다. 회견의 주인공은 손모(당시 31세)란 한 청년이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누군가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그의 입에선 말 그대로 충격적인 폭로가 터져 나왔다. “당선자인 우근민 후보 수행비서 박모씨로부터 800만원을 받았다. 조직과 유권자를 관리하기 위한 돈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거가 끝나고 난 뒤 소외감이 밀려오고, 이런 잘못된 선거는 고쳐져야 한다는 생각에 양심선언을 한다”고 밝혔다. 충격이었다. 사실이라면 우 후보의 당선은 무효가
정치인을 가리키는 politician은 셰익스피어 시대에 처음 쓰였다. ‘신중한’이란 의미의 형용사 politic에서 유래됐다. 그러나 그 단어는 점차 부정적 의미로 변모했다. ‘교활하다’거나 ‘철저히 자기 잇속만을 차린다’는 뜻으로 굳어져갔다. 그래서 politician은 모사꾼의 의미로 뒤바뀌었다. 정치인(statesman)이 아니라 정상배(政商輩)라는 의미다. 셰익스피어는 어떤 사람을 모욕적으로 묘사할 때 politician이라고 했다. 리어왕은 politician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지칭했다. 햄릿은 무덤 파는 광대가 해골을 던지며 장난치는 것을 보면서 "그 해골이 politician의 것이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했다. 그런 정치꾼은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눈다. 도구가 아니면 적이다(A politician divides mankind into two classes: tools and enemies).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말이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나이가 들어가며 침침해지는 눈 탓을 할 생각도 했다. 그런데 떡하니 인터뷰 기사까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우한폐렴’으로 인류사에 등장한 그 바이러스는 지난해 12월12일 지구촌에 처음 보고됐다. 인류사 첫 감염·확진판정이었다. 중국 우한발 코로나19 감염병 확산의 공포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 때만해도 잘 몰랐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했다. 신종플루가 그랬고,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MERS)도 그랬다. 잠시 감염병 위기의 순간이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시간이 해결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벌써 1년이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굳이 바깥으로 나서지 않게 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호기심이 발동되던 때가 있었지만 이젠 거리를 둔다. ‘맛’을 기대하고 바글거리는 식당에 군중심리로 찾아가던 게 예전이었다면 지금은 무조건 사람 많은 곳을 피한다. 일면식이라도 있으면 먼저 내밀던 손이지만 이젠 솔직히 내밀기도 쑥스럽고, 내민 손을 맞잡기도 꺼림칙하다. 기왕이면 많은 사람이 모여 ‘건배’ 구호를 외치던 각종 회합의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한 테이블만 넘어서는 자리라도 불편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솔직히 지긋
▲ 조선총독부 [사진=서울시사편찬위원회]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였다. 1993년 2월 말 취임한 YS의 뇌리엔 군사독재 종식과 역사 정통성 확립이 가장 큰 그의 과제였다. 그는 ‘역사 바로세우기’란 간판을 내밀어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제압하고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다. 그들은 곧바로 ‘12·12 반란의 수괴이자 내란음모의 주역’으로 낙인 찍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역사 바로세우기’가 한창이던 그해 초가을 한 언론사의 입사시험을 봤다. 필기전형중 하나인 논술의 논제는 “조선총독부 건물의 해체와 철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난감한 주제였다. 민족정기를 되살리자는 취지로 보면 경복궁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일제강점기 건축물은 마땅히 철거돼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논리도 만만찮았다. “치욕스런 역사의 현장은 철거가 아니라 보존·존치해 후대의 역사적 교훈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논리다. 조선총독부에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는 고대 로마제국시대의 정치인이자 사상가다. 로마제국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남긴 유명한 경구가 있다. “행운이란 준비가 기회를 만날 때 일어나는 것이다.” 행운이란 준비된 자에게 다가오는 필연이지 우연이 아니란 것이다. 준비된 이라면 기회가 다가온 순간의 가치를 알아보고, 잡아챌 능력이 있다. 그래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어찌됐건 물체의 낙하운동에 의구심을 품었던 뉴턴이었기에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유심히 지켜봤다. 그 결과는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우리 국민은 이제 300명의 선량을 국회로 보내야 한다. 그 300명은 지역의 이해를 대변하기도 하고, 국가의 미래운명을 좌우할 중대결론을 논의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꾸는 법을 만드는 곳도 국회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며 만나는, 사실 우리를 규제하고 있는 법은 모두 국회에서 만들어졌다. 우리 삶이 앞으로 어떤 길로 가야할 지도 역시 국회란 곳에서 법으로 규정한다. 나라의 미래는 물론 각자
미국발 통화긴축 후폭풍이 심상찮다. 미국 뉴욕증시가 1년여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급락했다. 한국 코스피지수도 17개월 만의 최저치인 2600선 아래로 내려갔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5월 4일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 올리는 ‘빅스텝’을 단행하자 주요국 증시가 휘청거렸다. 연준이 빠른 속도로 돈줄을 죄면서 미국 달러화 가치는 20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연준은 4일 빅스텝에 이어 연내 두세 차례 추가적인 빅스텝을 예고했다. 6월, 7월 잇따라 빅스텝을 밟고, 하반기 3차례 회의에서도 0.25%포인트씩 올리면 연말 금리 상단은 연 2.75%에 이른다. 그럼 올 초 제로(0~0.25%) 수준이던 기준금리가 1년도 안 돼 3%에 다가서는 셈이다. 미국 금리가 오르면 초저금리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신흥국으로 향했던 글로벌 자금의 이탈이 본격화할 수 있다. 달러 빚이 많은 신흥국일수록 달러화 대비 통화가치가 급락(환율 상승)하며 빚 부담도 커진다. 다급해진 신흥국들이 기준금리를 올리며 방어선을 쌓았지만, 인도·아르헨티나 등 신흥국 통화가치는 속절없이 급락했다. 우리나라의 돈, 원화가치도 하락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어린애가 된다’는 옛말이 있다. 이 점에 대해 전문가들 또한 ‘삶의 여정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유아는 삶의 끝자락으로 여행 중인 노인과 육체적·정신적으로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식사·취침·목욕·용변 등 일상생활에서 보호자의 돌봄이 필요다. 백 세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나로서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어느 날 한밤중에 어머니께서 베개를 안고 우리 방으로 오셨다. ‘무서워서 도무지 혼자 잘 수가 없다’시면서. 그 모습이 꼭 ‘엄마와 함께 자겠다’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92세쯤 되셨을까? 그즈음에 어머니는 부엌의 가스 불을 끄지 않아 냄비를 태우거나 ‘이러다가 집을 태울 수도 있겠다’ 싶은 상황을 드문드문 만드셨다. 화재보험에 가입하고, 수시로 부엌을 점검하다가, 결국은 취사도구를 정리했다. 우리와 함께 사신지 10년만의 일이다. 81세에 17년간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오신 어머니는, 혼자서 부엌을 쓰고 싶어 하셨다. 당신이 좋아하는 자리젓, 마농지, 비린내가 많이 나는 생선조림, 옛날 냄새가 진동하는 재래식 된장국 등을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드시면서 여생을 제주도 식으로 보내보리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