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 1885~1956)
향토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는 심재. 심재는 지금의 제주시 이도동 동광양(東光陽)에서 1885년(고종22)에 태어나 1956년 세상을 떠났다. 관향(貫鄕)은 광산, 자(字)는 윤경(允敬)·홍점(鴻漸), 심재(心齋)․일소도인(一笑道人)․해상일사(海上佚史) 등은 그의 호이다.
심재는 8세가 되던 해부터 그의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1900년 16세가 되던 해에는 본도에 귀양 온 아석(我石) 이용호(李容鎬:1841~?)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20세 때 부해(浮海) 안병택(安秉宅:1861~1936)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경서(經書)·역사서(歷史書)·제자류(諸子類)·시문집(詩文集) 등의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두루 통하였다.
당시 전라도 광주에 기거하던 부해 안병택은 조천읍 조천리 출신으로, 조선조 6대 성리학자 중 한 분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에서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으로 이어지는 도학(道學)의 학통을 이어받은, 당대에 명망 높은 선비였다.
이러한 큰 스승 밑에서 심재는 제주의 향토사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그 유명한 『탐라기년(耽羅紀年)』을 저술하였다. 이는 스승인 부해의 영향으로 송사 기우만의 위정척사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제주의 젊은인들에게 민족혼을 진작할 계책으로 저술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엄정한 춘추사관(春秋史觀)의 필법을 본받아 편년체(編年體)로 기술되어진 이 책은 1915년 편찬된 이래 제주도의 역사를 연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필독서로서 평가받고 있는 명저(名著)이다.
특히, 해방 이후 속찬된 『탐라기년 속편』은 1906년(광무 10)부터 1955년까지의 제주의 근현대사를 기술한 것으로, 당시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던 4․3에 대한 포폄을 가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탐라기년 속편』무자, 건국준비 4(1948)년, 단기 4218년 조 끝 부분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살피건대, 송요찬과 함병선의 전후 소탕은 아! 참혹하도다. 이때를 당하여 양 사이에 끼인 자 어찌하면 좋으리요? 이미 山軍의 공갈에다 다시 軍警의 위협을 받고 또 西北靑年의 발호에 핍박당하며, 삶과 죽음이 오로지 저들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어 살인을 풀 베듯 하여 주검이 길에 널렸다.
아! 山中의 포로가 되지 않으면, 마땅히 군경청의 총칼 아래 죽어야 끝이 났을 것이다. 이에 사람마다 두렵고 무서워하여 죽는 것이 옳은 것인지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고, 겁먹고 숨도 못 쉬었으며 아침에 살아있는 목숨은 저녁에 기약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산중으로 피해 들어감이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가히 유사 이래 일찍이 없었던 참화라 말할 수 있다.
기축년(1949) 봄에 내무장관 신성모가 내도함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살육의 정책을 그쳤다. 하지만 경인년(1950) 6․25사변 말에까지 이어졌고, 조금이나마 지식과 덕망 있는 자는 한번에 쓸려 거의 다 죽고 말았다. 아! 슬프고 또 슬프도다!“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제주속의 탐라, 심재집』, 2011, 180쪽 인용.
이외에도 파한록(破閑錄)․해상일사(海上佚史)․탐라지(耽羅誌) 등 제주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들을 숱하게 저술하였다.
또한 심재는 서법에 있어서도 일가를 이루어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심재는 뒷사람들이 과장되게 자신을 평가할 것을 염려하여 살아생전 아래와 같이 자신의 비문을 직접 지어 죽어서조차 이름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다.
‘심재우인(心齋迂人)은 스스로가 지은 호이다. 사람됨이 고루(固陋)하고 남과의 교유(交遊)를 잘하지 못하였다. 집 또한 가난하고 또한 스스로를 보존할 수도 없어 문을 닫고 깊게 깃들어 책 속에서 천고(千古)의 벗들과 사귀면서도 만족함을 알지 못하였다. 성품이 책을 좋아해서 망령된 생각으로 스스로를 믿었지만 또한 문장을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가슴은 텅 비어있어 평소에는 항상 침묵하였지만 그 시비(是非)를 분별하고 의리(議理)를 논할 때에는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이런 까닭에 세상과 더불어 합쳐지는 것이 드물었고 고립되어 의지할 곳이 없었으니 막힘이 심하였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후회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 그 또한 한 세대를 살다간 선왕(先王)의 유민(遺民)이었다!’(心齋迂人自號也爲人固陋不善交遊家又貧又不能自存然閉門深棲尙友千古而不知足性嗜書妄意自信而亦不好章句襟懷冲虛居常寡黙而至其辨是非論議理自有不可奪者是故與世寡合孤立無依而滯固已甚猶不知悔噫其亦一代先王之遺民也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