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이트풀 8’ 스토리의 중심에는 자그마한 체구의 한 여인 데이지가 있다. 데이지라는 소박한 꽃 이름과 자그마한 체구의 모습이 썩 잘 어울린다. 그러나 어울리는 것은 거기까지만이다. 데이지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이 여인은 현상금 사냥꾼에게는 로또나 다름없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흉악범이다. ▲ 사회적 약자들을 사회적 강자들과 평등하게 대하는 평등은 모두 불평등이며 폭력이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현상금 사냥꾼 루스(커트 러셀)는 마치 바다의 로또 밍크고래 한 마리를 횡재해 끌고 가듯 데이지를 호송한다. 천하의 흉악범이지만 루스에게는 금덩이만큼이나 소중하다. 데이지의 동료들이 언제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몰려올지도 모르고, 또 다른 현상금 사냥꾼들이 이 금덩이를 가로채려 들지 모를 일이다. 마치 미국 대통령의 경호원이 핵무기 발사장치 ‘블랙박스’를 아무에게도 탈취당하지 않기 위해 24시간 손목에 수갑으로 채워 연결하고 다니듯, 루스는 자신의 손목과 데이지의 손목을 수갑으로 채워 연결하고 데이지와 샴쌍둥이 같은 기묘한 동행을 한다. 현상수배범을 죽여서 데려오든 산 채로
▲ '문'이란 안과 밖의 양면성을 지닌다. 미국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 어수선하고 불온한 시기, 시절만큼이나 황량한 와이오밍의 겨울 벌판 위 외딴 여관에 서로에 대한 증오와 혐오로 가득한 8명이 눈보라를 피해 모여든다. 남군과 북군, 흑인과 백인, 범죄자와 현상금 사냥꾼 등 한곳에 모인 이 기묘한 조합만으로도 이미 타란티노식 불행한 결말이 예견 가능해진다. 이들의 ‘잘못된 만남’이 이뤄지는 미미네 여관 겸 잡화점에 기묘한 출입문이 등장한다. 어쩌면 이 출입문은 영화의 주연급은 아니어도 충분히 조연급은 될 만한 ‘출연진’으로 손색이 없다. 눈보라 정도가 아니라 눈폭풍이 몰아치는 벌판에서 허겁지겁 미미네 잡화점으로 돌진한 인물들은 문을 밀어도 보고 당겨도 보지만 열릴 기미가 없다. 문을 부술 듯 두들겨도 열어주는 사람이 없다. 단지 안에서 ‘문을 힘껏 차라’는 불친절한 안내가 돌아온다. 안내대로 발로 있는 힘껏 걷어차자 그제서야 문이 열린다. 문을 연다기보다 문을 부수고 들어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그렇게 문을 ‘부수고’ 들어
미국은 여러모로 참 ‘특별’한 나라다. 국토의 면적과 국부는 물론이고, ‘합중국’이라는 형태나 인종의 다양성 역시 대단히 특별하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특별함 못지않게 또 다른 특별함이 있다. 세계 패권국이 되기까지의 여정 속에서 수많은 대외전쟁을 치렀지만 미국 내에서 치른 대외전쟁은 단 한번도 없었다는 기록이다. ▲ 혐오에는 '자기보호적 혐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저항적 혐오'도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그토록 많은 전쟁을 다른 국토에서 치렀다니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기록이다. 미국은 어웨이 경기만 하지 결코 홈경기를 하지 않는 특별한 나라다. 어웨이 경기만 하는데도 무패의 전적이라면 실로 놀랍다. 이런 지구의 ‘안전지대’와 같은 미국의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던 단 한번의 전쟁이 있었다면 다름 아닌 ‘남북전쟁(1861~1865년)’이다. 이 전쟁에서 북군·남군 합쳐 약 62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는데, 이는 당시 미국 인구의 2%에 해당한다. 고도로 기계화된 살상병기들이
‘헤이트풀 8(Hateful 8)’은 내놓는 영화마다 화제를 몰고 오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여덟번째 작품이다. 2015년에 공개한 이 영화는 역시 타란티노스럽다. 타란티노의 브랜드와도 같은 ‘복수’ 코드는 빠져 있지만 이를 부득부득 가는 듯한 ‘증오’ 코드는 전작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 우리 마음속에 살고 있는 괴물과 귀신은 '증오'와 '혐오'일지도 모른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영화의 배경은 미국 남북전쟁(1861~ 1865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아마도 1870년대 어느 시점인 듯하다. 조지아, 앨라배마, 사우스 캐롤라이나처럼 남북전쟁의 광기가 집중적으로 할퀴고 지나가지는 않은 궁벽진 와이오밍 주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타란티노의 증오극의 막이 오른다. 와이오밍 주의 몸을 숨길 곳조차 없는 허허벌판에 지독한 혹한과 눈보라가 몰아친다. 용무가 무엇이 됐든 그런 날씨에 길을 나선다는 것은 곧 죽음에 가깝다. 그 근방을 말 타고, 혹은 마차를 타고 지나던 사람들이 허겁지겁 긴급대피소를 찾듯 &l
박사장 가족이 바캉스를 떠난 날 밤, 기택네 식구는 박사장 집 거실에서 술을 곁들인 가족 파티를 연다. 기택이 박사장의 아내가 의외로 순진하고 착한 구석이 있다고 평한다. 기택의 아내는 남편이 남의 아내에게 호의적인 평가를 내린 것에 심사가 상했는지 반론을 제기한다. “그게 다 여유 있으니까 착한 거야.” ▲ 한 인간의 고매한 품격도, 그 천박함도 아무리 감추려해도 감추어지지 않는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박사장 아내의 ‘착함’이 여유로움의 결과에 불과한 것인지 천성인지 혹은 교양인지 논란은 있을 수 있겠지만 박사장 아내가 착하다는 것에는 기택네 식구 모두가 동의한다. 박사장 아내는 기택네 식구들의 평가처럼 순진한 구석이 있고 기본적으로 언론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재벌 사모님들의 엽기적인 풍모와는 분명 차별화되는 ‘착함’도 있다. 가짜 대학생 괴외선생인 기택의 아들, 가짜 미국 유학파 미술치료사인 기택의 딸, 가짜 ‘최고 가정부’ 이력을 가진 기택의 아내, VIP만 전문으로 모신다는 가짜 운전기사 기택, 이 모든 ‘
우리에게 익숙한 계급·계층의 드라마는 대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전선이 형성되고, 그 전선의 전후방에서 갈등과 치열한 전투가 일어난다. 그런데 영화 ‘기생충’에서는 조금 낯선 전선이 형성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아니라, 똑같이 ‘못 가진 자들’인 기택네와 지하실 남자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진다. ▲ 더이상 희망을 품고 상류층과 싸우지 않는다. 그저 걸리적거리는 '우리'와 싸울 뿐이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기택의 대를 이어 백수의 세계에 안착한 아들에게는 명문대학에 다니는 부잣집 아들 친구가 있다. 친구는 현재와 미래를 모두 보장받았지만 기택의 아들에게는 현재도 미래도 온통 암울하기만 하다. 열패감이나 질투심에서라도 기택의 아들은 그 친구를 멀리할 법한데 그렇지도 않다. 그저 선망하고 부러워한다. 기죽어 지내지만 그렇다고 적개심을 갖진 않는다. 때때로 잘나가는 친구가 던져주는 ‘떡밥’을 머리 긁적이며 받아먹는다. 친구가 찾아와 해외연수를 떠나 있는 동안 자신이
“우리가 ‘I love you’라고 말할 때, 그 ‘I’가 누구인가가 중요하다. I란 독립적이고 누군가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자족自足적인 개체여야 한다. 오로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는 사람은 독립적인 인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기생충에 불과하다. 기생충의 사랑은 무의미하다.”- 러시아 소설가 아인 랜드 ▲ '정신적 기생충'의 사랑 방식은 지하실 남자의 그것처럼 불안하고 불온하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러시아 태생의 미국 여류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아인 랜드(Ayn Rand)는 ‘사랑’이라는 것을 이처럼 대단히 냉정하고 엄격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영화 ‘기생충’에서 문제적 인물인 ‘지하실 남자’는 자신이 기생하는 주인집 사장을 향한 일편단심 ‘민들레 사랑’으로 충만하다. 왜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지독하게 사랑한다.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지하실 남자의 존재 이유 자체로 보인다. 사장님과는 물론 일면식도 없다. 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영화나 소설, 드라마의 질리지 않는 레퍼토리다. 부자는 악이고 가난한 자는 선인 명확한 선악 구도가 설정된다. 봉준호 감독은 전작 ‘설국열차’에서 이같은 방식으로 계급의 대립과 갈등을 그려냈다. 그러나 ‘기생충’은 빈부나 계급의 문제를 다루는 전형적인 방식에서 많이 벗어난다. ▲ 공자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는 부가 부끄럽다"고 말했다. 많은 작품 속에서 대개 부자들은 속물 근성에 찌들어 있고,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이중성을 보이며, 누리고 있는 부와 지위에 비하여 터무니없을 정도로 지적 능력이 부족하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놈’들이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자존심, 양심, 상식, 교양을 두루 갖춘 ‘분’들이다. 부자놈들은 악이고 가난뱅이분들은 선인 명확한 선악 구도가 설정된다. 선악 구도란 단순명료하고 공감도 쉽다. 당연히 관객들은 못 가진 자들의 편에 서서 영화를 따라간다. 계층의 부당함에 같이 분노하고 정의가 실현되기를 함께 갈망하며 감독이 부자를 불행과
기택네는 가족 구성원 전원이 백수다. 우연한 기회에 부잣집 과외선생님으로 위장 취업한 아들을 필두로 딸과 아내, 그리고 기택까지 한집에 취업하면서 일가족의 사기 행각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기택네 가족이 악질 가족사기단은 아니다. 한집에 위장 취업하지만 그 집안을 말아먹을 거창한 계획을 세우진 않는다. ▲ '선線이란 사회생활에서 항상 '문제적'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재수·삼수 끝에 대학 진학을 아예 포기한 기택의 아들은 어느 날 친구의 부탁을 받고 명문대 재학증명서를 위조해 부잣집 영어 과외선생님으로 사기 취업한다. 해보니 별거 아니고 사모님은 생각보다 헐렁하고 순진하다. 곧이어 그의 여동생 역시 학력·경력을 몽땅 위조해 미술치료사로 위장 취업한다. 그리고 백수의 우두머리인 원조 백수 기택은 그 집의 운전기사로, 아내는 가정부 자리를 꿰차고 만다. 그야말로 일가족 사기단에 금맥이 터졌다. 기택네 일가족이 대단히 악질적인 가족사기단은 아니다. 범죄에도 생계형 범죄가 있고 기업형 범죄가 있다면, 기택네는 다분히 생계형 가족사기단이다. 일가족이 한집에 위장취업하지만 그 집
영화에 등장하는 ‘지하실 남자’는 조연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화 속 남자의 행태는 그의 비주얼만큼이나 충격적이고 압도적이다. 주연 같은 조연이다. 집주인이 동거인으로 허락지도 않았는데 가정부인 아내에 묻어 남의 집에 잠입해 사람의 내장처럼 미로 같은 지하실 깊숙한 곳에 자리 잡는다. 그야말로 기생충이다. ▲ 지하실 남자도 자신의 '충성서약'이 주인에게 전달되리라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경건한 의식처럼 매달린다. 기생충이 몸속을 활개 치고 이곳저곳 돌아다니지 않듯, 지하실 남자도 으리으리한 저택을 헤집고 다니는 법 없이 지하실에 꼼짝 않고 앉아 아내가 물어다 주는 아무것이나를 먹으며 지낸다. 지하실 한편에 꽤 많이 쌓여있는 수험 도서들로 미뤄 짐작건대 아마 공무원이나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를 하다 여의치 않았는가 싶다. 몸도 성치 않은 지하실 남자는 먹는 것 이외에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 먹는 일도 일정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남자가 하루에 규칙적으로 하는 일이라곤 특이하게도 지하실 두꺼비집 전선을 이용해 어디론가 모스 부호를 끊임없이 보내는 일이다. 남의 집 지하실에 숨어서 사는 이 특이
‘기생충’이라는 말은 일단 결코 유쾌하지 않다. 이토록 혐오스러운 영화 제목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도발적이다. 포스터의 글씨체도 ‘기생충체’로 꼬불꼬불 그려놓아 제목만 봐도 속이 스멀댄다. ‘기생충’에 영화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프랑스 칸 영화제 심사위원들이나 프랑스 관객들은 꽤 비위가 좋은 모양이다. ▲ 우리 사회 곳곳에 기생충들이 과연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일러스트=케티이미지뱅크]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회충·촌충·편충 같은 기생충들이 직접 출연하진 않으나 관람하는 내내 자연 도감에서 본 기생충들의 온갖 모습이 떠올라 떨치기 힘들다. 그 끔찍한 모습의 생명체들이 내 몸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고역이고 악몽이다. ‘무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의 관람을 주저하게 만든 또 다른 이유는 이 영화가 아마도 계급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프랑스 만화를 원작으로 한 봉준호 감독의 전작 ‘설국열차’는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이후 흑인 노예들이 공식적·법적으로는 해방됐지만 실질적인 해방과 평등이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해방은 곧 평등’이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됐다고 해서 일본과 평등해진 게 아닌 것처럼, 흑인들이 노예로부터 해방됐다고 즉시 백인과 평등해진 것은 아니다. ▲ 21세기 한국에선 많은 재벌이 자신이 성취한 자격보다 거저 얻은 자격으로 군림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1960년대까지 미국의 남부 일부 주에서는 학교와 극장과 같은 공공시설, 화장실은 물론 대중교통수단까지 흑인이 백인과 평등하게 사용할 수 없었다. 일부 주에서는 영화 속에서도 보여주는 것처럼 흑인은 일몰 후엔 외출조차 금지됐다. 심야에 백인 운전사가 운전하는 캐딜락 뒷자리에 점잖게 앉아 국도를 달리던 돈 셜리는 흑인이 밤중에 돌아다녔다는 이유로 경찰서로 연행된다. 백인들의 호텔 파티에 피아노 연주자로 초청된 돈 셜리지만, 화장실은 호텔 밖 ‘뒷간’을 이용해야만 한다. 노예에서 해방은 됐지만 흑인들은 인도의 악명 높은 카스트 제도에조차 포함되지 못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