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이 2001년 12월 27일 제정됐다. 1991년 12월 제정된 제주도개발특별법의 수한을 다하게 되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다. 환골탈태한 것이 아니라 제주도개발특별법을 전면 개정하고 법의 이름을 개명하였을 뿐이다. 두 개의 법률의 이동(異同)점에 대하여는 차회에 언급하고자 한다. 제주국제자유도시의 출범은 김대중 대통령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현실화 됐다고 보여 진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제주의 개방화를 통한 외자유치와 국가경쟁력 강화하는 한편 제주경제를 한 단계 도약시키기 위한 획기적 조치로써 제주국제자유도시 조성 방침을 천명한다. 이에 따라 건설교통부와 제주도는 1999년 미국의 존스 랑 라살(Jones Lang Lasalle)사에 국제자유도시 타당성 연구용역을 의뢰하였고, 위 회사는 2000년 6월 제주지역은 국제자유도시로서의 잠재력이 크다는 내용의 용역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는 제주도는 천혜의 자연경관과 청정 환경으로 국제휴양지로서의 매력이 크며 지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주요 도시들과 연결된 중심적 위치에 있고, 공항 · 항만 · 도로 등을 포함한 양호한 사회간
1999년 3월 민선 2기 우근민 도정은 제주도의 미래상(vision)으로 동북아 최고의 사계절 휴양지, 세계를 향한 개방된 출발지, 미래형 친환경적 'Clean Restopia'라는 세 가지의 이상을 제시하고 이를 그릇에 담기 위한 새로운 경제발전의 모델로서 싱가포르, 홍콩 등과 유사한 국제자유도시건설을 구상한다. 나아가 이를 법·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가칭 ‘제주도 국제자유도시 개발 및 운영에 관한 특례법’의 제정 필요성을 중앙정부에 건의하고 도민의 공감대 형성과 역랑 집중에 사활을 걸다시피 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제주경제사회에는 검은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1990년대 초경 제주도개발특별법의 제정 논쟁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을 통해 제주사회의 진로와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위한 장기 전략을 마련하였으나 1997년 11월 발생한 IMF 사태의 후유증으로 제주의 발전과 성장은 제자리걸음의 상태였다. 여기에다 경제통합의 가속화, WTO의 뉴라운드 협상, 시장개방의 압력, 남북정상회담(2000. 6.)에 따른 남북교류의 증대, 인천의 허브공항, 부산·광양만의 국제자유항
제주도개발특별법의 제정 후 2회 소폭 개정, 그리고 1999. 12. 28. 법률 제6249호로 대폭 개정되기 전까지 이 특별법이 수행한 【순기능】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특별법은 100만 내외 도민뿐만 아니라 민간 기업자들에게 21세기 제주의 미래상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부여하고 종합개발계획의 수립 및 시행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도민의 주체적 참여를 유도하여 경제적 민주화를 이룩하였다. 둘째, 이 특별법은 중앙집권적 경제규제에서 탈피하여 자율적으로 지역경제질서.경제기반.문화환경.자연환경을 정비, 개선, 보전하고 형성함으로써 환경이 지속 가능한 자립경제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다른 한편, 이 특법법의 시행조례와 제주도종합개발사업 시행승인지침, 개별허가시행지침 등에 개발사업 승인절차를 복잡하고 까다롭게 규정하거나, 개발사업자에게 지역개발채권의 매입을 강제하고 또는 관광사업자로부터 관광 진흥 기여금을 징수함으로써 오히려 투자가들의 창업을 어렵게 하거나 1인당 관광비용을 그만큼 증가시켜 관광 산업을 침체시키는【역기능】으로 작용했다. 계획기간(1992년~2001년)동안 관광산업에 대한 민간투자가 기대에 훨씬 못미쳤고, 특히 이 특별법
1992년 초경 제주도개발특별법의 구체적 시행을 위한 시행령 및 조례 등 하위법령의 제정을 위한 기초 작업이 시작되었고, 이와 병행하여 제주도종합개발계획의 수립을 위한 준비활동에 돌입하였다. 그런데 특별법의 제정 과정에서 예측된 제주지역 경제의 대내외적 여건은 그 예측의 범위를 훨씬 벗어나 1992년 이후 급속한 변화가 진행됐다. 세계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과 소련 등이 주도하는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경제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로 재편되어 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주도 하에 진행되고 있는 우루과이 라운드(UR)가 더딘 진척을 보이는 가운데 우리는 더욱 강화된 EC경제통합체의 출현과 새로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탄생을 목격해야 했다. 이러한 국제환경의 새로운 변화는 장차 농산물과 서비스산업의 시장 개방을 초래하여 지역경제 발전에 순(順)기능으로 작용하기보다, 오히려 역(逆)기능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측됐다. 지난날 제주 경제성장의 지렛대가 된 감귤농업은, 농산물의 수입개방 압력으로 1991년에 파인애플, 바나나 등 시설재배업의 생산기반 붕괴를 낳았듯이 점차 경쟁력을 잃어 갈 것으로 예견되는
▲ 특별법 반대 시위 [제이누리DB] 제주도 개발특별법의 제정 목적은 제주도를 국제적인 관광휴양지로 조성하기 위한 종합개발계획의 수립과 추진 동력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함인데, 이런 정책 가치와 목표가 제주도민들의 사회적 가치와 크게 괴리됨으로써 도민들의 적극적 제정 반대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보여 진다. 제주도 관광종합개발계획(1973∽1982년)과 제1차 제주도종합개발계획(1985∽1991년)을 중심으로 한 20여 년 동안의 관광주도형 지역개발은 지역 간 또는 산업 부문 간의 불균형 발전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도민들 다수의 부정적 인식이 깊었는데, 1990년 8월 공개된 개발특별법의 제주도 시안조차도 균형발전의 제도적 장치 설계에 소홀이 한 것이다. 도민들의 기대치에 미달하였다는 비판적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고 반대운동을 주도한 ‘제주도개발특별법제정반대 범 도민회’가 현재의 지역실정에 필요한 것은 개발특별법이 아니라 보전특별법이라고 주장하면서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형국으로 변했다. 이뿐만 아니다. 개발이익의 불공평한 배분을 완화시키기보다 오히려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까지 생겨났다. 개발사업의
▲ 양용찬 열사 1991년 11월 7일 서귀포시 ‘나라사랑청년회’ 소속 양용찬 열사가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여 분신자살함으로써 특별법 제정에 대한 관심은 전국적 뉴스거리가 됐다.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처럼 양용찬 열사의 결기는 특별법 제정의 흐름에 변곡점이 됐다. 법 제정의 반대 여론이 들불처럼 번지자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민자당, 내무부 등의 담당관들이 내도하여 현지 분위기를 살피고, 제주도에는 도지사를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중앙언론사를 방문하여 특별법 제정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제주도 개발특별법 – 도민의 의견을 수렴, 삭제·보완·수정하였습니다.'라는 제목의 홍보책자를 만들어 각 기관과 가정에 배포하는 등으로 반대 여론의 순화에 나섰다. 다른 한편, 집권 여당인 민자당은 기존의 민자당 시안 중 7개 조항을 수정·보완하여 11월 20일 당무회의를 열고 9장 50조 부칙으로 구성된 제주도개발특별법(안)을 의결하여 그 다음날 의원 22인의 발의로 국회에 제출하였는데, 이 법안의 제안이유를 ‘제주도
▲ 특별법 반대 시위 [제이누리DB] 1991년 8월 1일 홍영기 도백이 특별법 성안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책, 해임되고 제주도 출신 우근민 도백이 임명됨으로써 특별법 제정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 취임 전의 반대운동이 소극적·관망적이었다면 그 후의 반대운동은 차츰 조직화하기 시작하여 적극적 투쟁으로 나섰다. 8월 5일 특별법 제정 반대 범도민회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제주도의회 무소속의원들이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기로 합의한 가운데 8월 8일 제주도출신 국회의원들이 주최한 공청회가 열렸다. 이 공청회에서 반대집단과 찬성 집단 사이의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심각한 갈등 현상이 표출되었다. 8월 16일에 민자당에서 대통령에게 특별법(안)을 정기 국회에 상정하겠다고 보고함으로써 12월까지 법 제정의 로드맵이 가시화되었고 8월 23일 특별법 제정에 관한 당·정 간담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제주도 출신 선량들은 특별법 제정 반대 측을 선무(宣撫)하기 위한 방책으로, 서부산업도로(현, 평화로)의 국도 승격, 지하수에 대한 실태 조사, 송악산 군사시설 보호구역 해제, 국립 감귤연구소 설치, 농
‘법제기초소위원회’(위원장 변호사 김승석)는 지방언론에 나타난 여론의 동정과 도내 각 기관·단체의 의견을 토대로 조문 작성에 들어가 1991년 5월 20일 8장 52조 부칙으로 구성된 「제주도개발특별법」 시안(試案)을 작성하였다. 이 시안은 정부(건설부)의 시안에 비해 목적의 구체화, 도민의 개발사업 참여 시의 지원, 종합개발계획수립에 관한 도의회의 권한 인정 등을 신설함으로써 진일보했다는 평가도 있었으나, 여전히 인·허가 절차의 간소화, 용도지역의 행위 제한 배제 등의 독소 조항이 그대로 존치되어 있어서 어느 정도의 도민 반발은 예상했지만 기초협의회는 모조리 경을 쳐야만 했다. 마침내 6월 7일 제주도내 재야단체들이 특별법 제지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반대운동을 조직화하기로 했고, 6월 8일에는 최초로 특별법 반대시위가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법제기초소위’는 1차 산업 종사자들을 비롯한 도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쟁점 조항들에 대한 수정 작업에 착수하여 개인 사업시행자에까지 확대했던 토지수용 조항을 삭제하고 1차 산업의 진흥 내용을 명시하고, 지하수의 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