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221∼589) 때에 왕자 소자량1)과 범진2)이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소자량은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불교도였다. 그는 인생의 삼세인과(三世因果)로 운명이 정해졌다고 여겼다. 범진에게 물었다. “당신이 인과를 믿지 않는데, 그러면 어째서 어떤 사람은 일생을 부귀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재능을 품었으면서도 평생 펼치지 못하며 평생 초라하게 살아 아무 이름도 남기지 못하게 되는 것인가?” 범진이 답했다. “다른 인생은 사실 같은 가지의 한 꼭지에 달린 꽃송이 같은 것이오. 바람이 불어오면 어떤 꽃은 화병에 놓여 사람이 보면서 즐기는 대상이 되고 어떤 꽃은 운이 나빠 똥통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전자는 왕자님이시고 후자는 바로 저입니다.”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꽃을 가지고 비교하고 있다. 사람은 환경을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결과는 좋고 나쁨의 차이가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생활하면서 진지한 인식이 부족하여 불원간 닥쳐올 처지에 경솔한 태도를 취하여 그 속에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잘못을 깨달아 위험한 곳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곳에는 살지 않으면서
청(淸)나라(1636~1912)가 『이십사사(二十四史)』를 간행할 때 건륭1)은 자주 자신이 직접 대조하고 검토하였다. 착오를 발견할 때마다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통쾌해 했다. 화신2)과 여타 대신들은 건륭의 그런 심리에 영합하였다. 건륭에게 건네는 필사본 초고에 찾기 쉬운 부분을 고의로 몇 글자를 틀리게 써서 건륭이 쉽게 교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 교묘한 방법을 이용하여 건륭의 학문이 깊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 건륭의 면전에서 황제의 학문이 깊다고 아첨하는 것보다 효과가 있었다. 황제가 교정한 초고는 다른 사람이 절대 고칠 수 없었다. 그런데 건륭이라고 다 교정할 수 있었겠는가. 건륭이 교정하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그런 오류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오늘 날에 전판(殿板) 서적에 존재하는 오류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화신은 이해타산이 뛰어났다. 셈이 빨라 건륭의 심리를 잘 파악하였다. 늘 적당한 방법을 찾아내어 건륭의 환심을 샀다. 화신은 건륭의 성정, 호오나 생활 습관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심도 있게 연구하였다. 건륭의 성깔, 애증 등에 대해서는 제 손금 보듯 훤했다. 왕왕 건륭이 무엇을 원하는지 건륭이
10월 말에 직예파 장군 풍옥상1)이 갑자기 오패부를 등지고 고북구(古北口)에서 회군하였다. 북경경비사령관 손악(孫岳)과 결탁하여 북경을 점령하였다. 풍옥상과 손부방은 휴전을 제안하고 조곤에게 압력을 가했다. 오패부를 면직한 후 조곤의 퇴위를 선언하였다. 산해관에서 회군한 오패부는 풍옥상과 맞섰지만 장작림의 가세로 대패하고 한구(漢口)로 도주하였다. 제2차 봉직전쟁이 끝나고 조곤이 뇌물로 세웠던 정부도 무너졌다. 장작림과 풍옥상은 일부 직예파 군인과 함께 단기서2)를 총통으로 추대하였다. 이 전쟁에서 봉군총참(奉軍總參) 양우정3)은 장작림의 명령을 받고 산해관으로 진입하였다. 양우정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불통이었지만 나름대로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병권을 잡게 되자 안하무인인 본성을 드러냈다. 득의양양하게 심양(沈陽)을 출발할 때부터 평소에 신임하던 장신선(張神仙), 마신선(馬神仙) 등 4명의 술사를 대동하였다. 양우정은 장작림 못지않게 신도(神道)를 믿고 있었다. 작전을 펼치기 전에 항상 4명의 신선에게 점치게 하여 날자와 시간을 정한 후에 행동하였다. 당시 장작림 아들인 제3군단장 장학량4)이 양우정과 함께 있었다
곽송령1)은 장작림2)의 수하였다. 부군단장으로 제2차 직봉전쟁3) 중에 봉군(奉軍)이 승리를 거두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신파(新派) 군인이었다. 군벌 부대 내의 낡은 규칙과 습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시도 때도 없이 군을 개혁하자고 진언하였다. 그러자 봉계(奉系) 원로들이 분노하기 시작하였다. 장작림과 심복 양우정(楊宇霆)도 갖가지 트집을 잡아 도외시했다. 곽송령은 화가 치밀었다. 1924년 11월 23일, 난주(灤州)에서 군사회의를 개최해 평화를 창도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봉천(奉天)으로 회군한다고 선언한 후 병간(兵諫)을 준비하였다. 장작림은 봉천에서 소식을 접하고 급해졌다. 화도 치밀었다.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막아서야 할지 말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장작림은 평상복을 입고 권총 두 자루를 가슴에 차고서는 검푸른 얼굴빛에 시뻘건 두 눈으로 혼자서 서재에서 서성거렸다. 부관과 위병들은 문 밖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갑자기 서재에서 장작림의 명령소리가 들렸다. “맹인 점쟁이를 불러라.” 맹인 점쟁이는 누구인가? 운세를 점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사실 완전한 맹
사회에서 교류할 때 다른 사람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면 자신의 독립된 인격을 상실하는 것과 같다. 사람은 천지간에 존귀하게 태어났다. 자기 운명을 가장 잘 주재할 수 있는 사람은 본인이다. 어떤 지위나 환경에 처했든지 자기 운명은 자신이 결정한다는 기초적인 존엄과 권리를 잃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많이 약속하고 책임진다. 지위도 다르고 배분도 다르다. 여러 가지 예교는 다른 사람에게 종속하는 위치에 처하기 쉽게 한다. 그럴 때에 자기 존엄을 지키고 인격을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하다. 자기 독립성과 판별력을 잃어서는 안 된다. 타인이 하자는 대로 순종하는 희생물이 돼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안 된다. 적어도 받아들일 것인가 복종할 것인가는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인이나 권세를 무조건 따라서도 안 된다. 물론 여기에는 조직 기율과 제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어떤 때에든 자신은 자랑할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시황(秦始皇, BC246~BC221)이 죽을 때 유조를 내려 태자 부소(扶蘇)에게 계위하도록 했다. 당시 태자 부소는 평소부터 진시황과 정견이 엇갈려, 일찍이 군대를 감독하
원세개는 격앙하며 말했다. “그저 황상께서 명령을 내리신다면 나는 목숨을 걸고 반드시 실행할 것이오.” 담사동이 말했다. “다른 사람은 쉽게 다룰 수 있소. 영록은 그리 녹녹한 사람이 아니오. 그를 죽이기가 쉽지 않을게요.” 원세개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무엇이 그리 어렵다는 말이오? 영록을 죽이는 일은 개 한 마리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소.” 담사동은 조급해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겠소? 내가 곧바로 황상께 아뢰리다.” 원세개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너무 성급하오. 내가 지휘하는 군대의 총탄과 화약은 모두 영록의 손아귀에 있소. 군관 중에도 그의 사람이 적지 않소. 내가 먼저 천진(天津)으로 돌아가 군관을 바꾸고 총탄을 준비해야만 거사를 치를 수 있소.” 담사동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원세개는 꾀가 많은 사람이었다. 바람을 보며 돛을 조종하듯 정세 변화를 봐가며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강유위와 담사동은 그의 사람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원세개는 광서제에게 충성을
명나라 방상붕1)은 일찍이, “사람을 만나면 3부만 이야기하고 마음 전부를 내던지지 마라.”(『增廣賢文』) 라고 했다. 무슨 뜻인가? 사람 만나면 말을 조심스레 삼가고 모든 마음을 내보이지 말라는 말이다. 이것은 옛사람이 말이 재앙이 되는 것을 삼간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거나 경솔하게 지껄이거나 웃지 않는 사람에게는 잠시 진심이나 본뜻을 표출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의견만 고집하거나 오로지 이기려고만 하는 사람에게는 실언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사귄지 얼마 안 되는 사람에게 어리석게도 깊은 얘기를 나누면 당신이 토로한 성심성의가 오히려 흑백이 전도된 비방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바뀐 적이 없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상황을 알면서도 숨겨 말하지 않는 것은 충실하지 못하다. 마땅히 침묵하여야 할 때에 말하는 것은 내뱉은 말 모두 더러운 때와 같게 된다. 반드시 말해야 할 때에 침묵하고 말하지 않으면 그 침묵은 먼지와 같다. 말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논쟁을 벌이는 사람은 다른 뜻이 있기에 그러하다.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입을 다무는 것은 어리석음의
금에 순금이 없듯이 완벽한 사람은 없다. 열심히 하여 관리가 됐으나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하면 아무리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착실하다 하여도 결국은 아수라장이 되어 효과를 제대로 얻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사람은 좋지만 결코 좋은 관리는 아니라고 평가한다. 사람들이 당신을 존중하는 것은 당신이 동정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옹정(雍正, 1722~1735 재위) 황제는 사람을 쓰는 문제에 비교적 깨어있었다. ‘현재(賢才)’를 표준으로 삼았다. 결코 ‘오로지 친한 사람’만 쓰지는 않았다. 청(淸) 왕조가 건립된 초기에 여러 왕공이 제각기 공을 세웠다. 순치(順治, 1643~1661 재위) 황제는 그들에게 많은 상을 내렸다. 하오기1) 인원 모두 왕부의 부하가 됐다. 평화로운 날이 계속됐지만 거만하고 횡포한 여러 왕공의 습속은 고쳐지지 않았다. 자주 부하를 잔인하고 포악하게 대했다. 양광총독(兩廣總督)〔광동성(廣東省)・광서성(廣西省) 총독〕 양림(楊琳)은 돈군왕에 속해 있었다. 어느 날, 돈군왕2)에게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도 알지 못한 채 의심받았다. 돈군왕은 환관을 광주로 보내
일을 하는 데에 흥이 극에 달하게 하지 말아야 하고 힘을 쓰는 데에 극한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적당할 때에 그치고 적절하게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가무와 잔치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스스로 홑옷을 걸치고 가차 없이 떠나는, 그런 마음이 넓은 사람은 관건이 되는 곳에서 돌연히 고개를 돌릴 수 있어서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산다. 인적이 끊긴 깊은 밤에도 여전히 연회를 베푸는 데에 바쁜 사람은, 이미 끝도 없는 고해에 떨어졌음에도 스스로 살피지 못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실로 가소롭지 않은가. 사람은 자기 욕망을 제어할 수 있어야 즐거움 끝에 슬픔이 오는, 흥진비래를 피할 수 있다. 속담은 말한다. “세상사를 통찰하는 것이 학문이며 인정을 연달(練達)하는 것이 문장이다.”(曹雪芹《紅樓夢》第5回) 인정과 세상사에 통달하면 사람의 뜻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개성과 호오를 이해하며 타인의 약점을 양해하고 자신의 자존심을 돌볼 수 있다. 이것을 할 수 있을 때 인내심이 생기고 관용과 도량이 생긴다. 옛사람들은 관용으로 타인을 대하는 것에 주의하였다. ‘용서〔서(恕)〕’, ‘참음〔인(忍)〕’을 강조하였다.
입신(立身)하고 처세(處世)함에 있어 높은 곳에 서서 멀리 볼 수 없다면 먼지 속에서 옷에 묻은 먼지는 터는 것과 같고 흙탕물 속에서 발을 씻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어찌 남보다 뛰어날 수 있겠는가. 세상사의 사물을 처리하는 데에 여지를 남겨두지 않으면 나방이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고 숫양 뿔로 울타리를 들이받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스스로 위험한 곳에 뛰어들어 자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어떻게 자신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안락하고 즐겁게 살 수 있겠는가. “사람은 앞날을 고려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 데 우환이 생긴다.” 라고 하지 않는가. 장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코앞에 근심이 생긴다. 총명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할까? 부유하게 살고 있다면 부족할 때를 생각하지 않을까. 편안하게 살고 있다면 곤란할 때를 생각하지 않을까. 안전하다면 위급할 때를 생각하지 않을까. 주도면밀하고 신중하게 화가 미칠 때를 대비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현명하게 대처하여 위험에 빠지지 않게 되리라. 일하는 데에 있어 이익에 따라 함께 다가오는 손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해득실을 고루 살펴야 한다. 문제를 살피고 해결책을 내놓을 때에
춘추(春秋, BC770~BC476)시기, 안영(晏嬰), 전양저(田穰苴), 양구거(梁丘據) 3명은 제(齊) 경공(景公)이 가장 신임하는 대신이었다. 어느 날, 경공이 한밤중에 연회를 열고 술을 마시던 도중에 자작자음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 같이 마시는 것보다 흥이 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일어나 술자리를 안자(晏子)의 집으로 옮기라고 명했다. 안자는 경공이 왕림한다는 말을 듣고는 급히 조복으로 갈아입고서 조정에 나아가는 정식 보고서를 손에 들고 대문 앞에 나아가 경공을 마중하였다. 경공이 마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안자가 뛰어올라가 무슨 국가 대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경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 밤 밝은 달이 하늘에 걸려있어서 내가 그대와 함께 좋은 술과 안주로 향유하려고 하오. 아름다운 음악도 함께 감상하고.” 안자는 듣고는 대답하였다. “정치 외교와 같은 일이라면 신은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과 함께 술을 마실 사람은 공의 곁에 많고도 많습니다. 신은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봅니다.” 경공은 화를 내면서 술자리를 전양저의 집으로 옮겼다. 전양저는 갑옷을 입고 창을 든 채로 대문
상사에게 신임을 얻고 등용될 생각이 있다면 의심을 피해야 한다. 특히 본인의 능력과 영향력이 이미 상사를 뛰어넘었을 때에는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중국 역사상 억울하기로 가장 유명한 사건 중의 하나인 송(宋)나라 악비(岳飛)의 비극은 우리에게 비통한 교훈을 주고 있다. 악비는 천성적으로 배움을 즐겼다. 나중에 대장군이 됐어도 여전히 학문을 닦았고 조예가 깊었다. 『만강홍(萬江紅)』과 같은 작품은 천고에 전송되는 명편이다. 그러나 학문에 조예가 깊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악비가 학문을 좋아하고 조예가 깊은 것 때문에 송 고종(高宗)은 의심하고 질투하였다. 그것도 완전히 고종이 마음이 좁은 때문만은 아니다. 조송1 왕조의 조상 유훈도 그렇게 되게 만들었다. 송나라 때에는 당나라 때 군벌할거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문무 분리 방법으로 밑의 세력을 제거하였다. 문신은 지식이 있으나 사병을 거느릴 수 없었고 무신은 전투에 능하나 지식이 없었다. 문신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무신은 군대를 거느렸다. 문신이 무신을 관할, 통제하고 무신은 문신에게 협조하였다. 협업할 뿐 아니라 알맞게 써야 했다. 서로 견제하면서 문무 대신 모두 감히 반란을 일으킬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