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明)나라 때 황종(況鍾)¹은 낮은 관리에서 낭관(郎官)으로 발탁되었고 양사기(楊士奇), 양부(楊溥), 양영(楊榮)의 추천으로 소주(蘇州) 지주(知州)가 되었다. 황제는 조당에서 그에게 황제가 친히 서명한 문서를 하사하며, 상주해서 명이 내려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사무를 처리할 권력을 부여하였다. 황종이 막 소주에 도착하자 관리가 공문서를 가지고 와 바쳤다. 관리에게 사건 처리가 합당한지 안한지도 묻지도 않고 ‘됐다’고 판결하였다. 그러자 하급 관리는 황종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 멸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아문에서 발생하는 폐단과 빈틈이 갈수록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통판(通判) 조(趙) 모 씨가 천만가지 계책을 세워 황종을 기만했지만 황종은 그저 응응거리기만 하였다. 1개월 후, 황종은 수하에게 향촉을 준비하라 명한 후, 예의(禮儀)를 관장하는 예생(禮生)도 부르고 모든 관원을 소집하였다. 황종이 모두에게 말했다. “시간이 없어 모두에게 선포하지 않은 황제의 조서가 있소. 오늘, 그 조유(詔諭)를 모두에게 선포하려 하오.” 관원들이 조서 중에, “소속 관원이
증국번(曾國藩)¹은 일찍이 용맹한 부장을 관리하였던 경험을 사람에게 전수하면서 예를 하나 들었다. 이세충(李世忠)은 강도였다가 항복해온 상군(湘軍)²의 장수였다. 나중에 혁혁한 전공을 세워 일품 관직에 올랐다. 사람됨이 난폭하고 교활해 상관의 명령에 잘 복종하지 않았다. 그 부하도 온갖 나쁜 짓을 자주 저질렀다. 그렇다면 증국번은 어떻게 그러한 부장을 대하였을까? 두 가지 방면에서 관용을 베풀었고 두 가지 방면에서는 엄격하게 대했다. 어떻게 관용으로 대했을까? 금전 방면에서 이세충에게 관대하였다. 결코 논란거리로 삼지 않았다. 자금이 충분할 때 몇 십 만을 떼어주기도 했다. 금은을 돌같이 보았다. 자금이 부족할 때 자신도 곤궁에 처했으면서도, 자기 재산을 털어 남을 도왔다. 두 번째는 그와 전공을 다투지 않았다. 함께 전투에 임해 승리를 거뒀어도 모든 전공을 그에게 돌렸다. 추천할 기회가 있으면 우선 그를 내세웠다. 어떻게 엄격하게 대했을까?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왕래를 최소화했고 교분을 맺으려 애쓰지 않았다. 빈번한 교류를 피했다. 왕래하는 서신도 간명하게 요점만 쓰고 내용을 번잡하게 하지 않았다. 두
복역을 하던 위(衛)나라의 죄수가 위(魏)나라로 도망치자 막 왕위를 계승한 위(衛)나라 국군은 큰돈을 주고 그 죄수를 돌려받으려 했으나 위(魏)나라는 응하지 않았다. 이에 위(衛)나라 국군은 좌씨(左氏, 지명)¹라는 성읍과 죄수를 맞바꾸려고 하였다. 위(衛)나라 국군의 부하가 물었다. “성읍 하나와 노역에 동원되었던 죄수를 맞바꾸는 것이 가치가 있습니까?” 위(衛)나라 국군이 답했다. “국가가 제대로 다스려지느냐 혼란하게 되느냐에, 크고 작은 것이 없다. 법률이 확립되지 않아 처벌을 하여야 하는 자를 처벌하지 아니한다면, 설령 좌씨와 같은 지역이 열 개가 있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법률이 확립돼 처벌하여야 하는 자를 반드시 처벌하면, 설영 좌씨와 같은 지역 10개를 잃는다하여도 나쁠 것이 하나도 없다.” 이 이야기는 상앙(商鞅)²이 상으로 신의를 세운 이야기³와 비슷하다. 비록 사용한 수단이 다르다하더라도 동공이곡(同工異曲)으로, 얻는 효과는 같다. 모두 이미 정한 목적에 도달하였다. 어떤 때는 간단하게 조문이나 규장에 근거해 상벌을 집행
그렇다고 금령과 형벌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금령과 형벌은 기율을 정돈하고 사기를 북돋우는 수단의 하나다. 오기(吳起)¹는 말했다. “무릇 북과 징과 방울은 병사의 귀, 각종 깃발은 병사의 눈, 군령과 형벌은 병사의 마음을 통해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귀로 전달되는 소리는 뚜렷해야 하고, 눈으로 전달되는 색깔은 분명해야 하며, 마음으로 전달되는 형벌은 엄정해야 한다.”(『손자병법(吳子兵法)』「논장(論將)」) 무슨 말인가? 단체에게 지휘에 복종하게 하고 행동 일치를 보게 하려면 반드시 형벌, 금령으로 부하의 행동을 단속하여야 한다. 법을 집행하는 데에 반드시 공정하고 엄명하여야 한다. 만약 이 점을 이행하지 못하면 사기는 무너지고 나태해진다는 말이다. 월왕(越王) 구천(句踐)²은 오(吳)나라에서 귀국한 후 포로 생활의 치욕을 씻기로 결심하고 곧바로 사병들을 엄격하게 훈련을 시켰다. 어느 날 구천이 훈련장에 가서 문종(文種)³에게 물었다. “내가 오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가능한가?” 문종이 답했다. “가능합니다! 제가 평상시 훈련
사람의 심리는 사실 무척 간단하다 : “내가 너를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해주면 너는 내게 사례를 하여야 한다.” 상벌의 문제도 지출과 소득의 문제다. 상벌이 분명하지 않으면 자신이 지출한 의미에 회의를 품게 되어 적극성이 줄어들거나 심하면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상과 벌은 사람을 관리하는 두 가지 큰 무기다. 상벌이 분명한 상황에서 명령이 내려지면 반드시 실행한다. 명확한 상벌은 타인의 적극성을 최대도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송연(宋燕)이 제(齊, BC1044~BC221)나라의 재상 자리에서 파면되자 부하 관원들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다른 제후에게 의탁하러 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소?” 모두 질서정연하게 서서 조용히 바라만 보면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송연이 말했다. “정말 슬프구려! 사대부(士大夫)는 어찌하여 얻기는 쉬우나 쓰기는 어렵더란 말인가?” 진요(陳饒)가 대답하였다. “사대부란 얻기는 쉬우나 쓰기는 어려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공이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공이 쓸모가 없으니 사대부가 원망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목표를 추구하면서 일을 성사시키는 데에 자기 실력이 모자랄 때 외부의 힘을 빌리거나 외력을 끌어들이면 승리를 거두는 지름길을 찾는 방법이 된다. 자기 힘이 부족함을 메꿀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기 장점을 강화시켜 적은 힘으로 큰 것을 이룰 수 있고 약함으로 강함을 이길 수 있다. 목표를 향하여 가는 교량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BC475~BC221) 때, 중산국(中山國, BC414~BC296)의 왕에게 두 명의 비(妃)가 왕후 자리를 다투고 있었다. 한 명은 음희(陰姬)요, 다른 한 명은 강희(江姬)였다. 내시 사마희(司馬喜)가 양쪽 가운데에서 발붙일 틈이 있음을 보고 주동적으로 음희의 아버지를 찾아가 말했다. “음희가 왕후가 되면 자연스레 첫째 부인이 돼 비할 수 없이 귀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왕후가 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도마 위 고기가 돼 자기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온 가족이 연루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음희가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어찌 나를 찾아오지 않소.” 그래서 음희의 아버지는 사마희를 찾아가 음희가 어떻게 하면 왕후가 되도록 도와 줄 수 있을 지를 물었다. 일이 성사되면 깊이 보답하겠다고도 말했다.
일하거나 생활할 때 권력에 알력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두 명이 알력이 생길 때 누구에게도 미움 사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중간적 인물이 되고자 할 때에는 어떻게 하면 될까? 청(淸)나라 말기에 진수병(陳樹屛)은 강하(江夏) 지현(知縣)을 맡고 있었다. 당시 장지동(張之洞)은 호북성에서 독무(督撫)직에 있었다. 장지동은 무군(撫軍) 담계순(潭繼詢)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진수병은 늘 교묘하게 처리해 어느 한 쪽에서도 미움을 사지 않았다. 어느 날, 진수병이 황학루(黃鶴樓)에서 장지동과 담계순, 기타 관리를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다. 좌객 중에서 강 수면의 너비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었다. 담계순은 5리 3분이라고 하자 장지동은 일부러 7리 3분이라고 하였다. 둘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면서 어느 누구도 체면 때문에 지려고 하지 않았다. 연회의 분위기가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진수병은 둘이 트집 잡아 분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사람에게 불만이 많았고 시답지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연회 분위기를 깰 수는 없었다. 그는 기지를 발휘하였다. 태연자약하게 공수하며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강 수면의 너비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이 불 때는
두 개의 붓으로 동시에 그리다 ;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다는 뜻을 가진 쌍관제하(雙管齊下) 전고는 송나라 때 곽약허(郭若虛)의 『도화견문지(圖畫見聞志)』에서 나왔다. “당나라 장조(張璪)는 산수 송석(松石)을 잘 그리기로 세상에 명성이 자자하다. 더욱이 소나무를 그리는 데에 의경(意境, 예술적 경지)이 특출하다. 손에 두 개의 붓을 들고 일시에 한꺼번에 내려, 하나는 살아있는 가지를 그리고 하나는 시든 가지를 그려낼 수 있다.” 정치하든 사업하든 서로 경쟁하는 데에는 실제적으로 역학 법칙을 따라야한다. 서로 다른 힘 가운데에서 어떻게 평형을 유지하느냐에 달려있다. 자신에게 조력자와 방해자가 생기게 되는데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고려해야할 문제 중 하나다. 전국시대 때, 한(韓, BC403~BC23)나라의 공자 한구(韓咎, ?~BC273)는 왕위 다툼을 벌였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당시 한구의 동생은 주(周, BC1046~BC256)나라에 있었다. 주나라는 동생을 중용하면서도 한구가 성공할지 안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에 한구가 군주가 되지 못한다면 주나라도 다시는 그의 동생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될 게 분명하였다. 주나
그런 책략은 오래지 않아 동진(東晉, 317~420) 때 온교(溫嶠)가 빌려 쓴다. 술을 빌어 일을 야기하면서 이간질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동진시기에 대장 왕돈(王敦)은 역모를 준비하고 있으면서 온교를 단양(丹陽) 영윤(令尹)으로 임명해 특별히 그를 위하여 송별연을 베풀었다. 온교는 자신이 떠나고 나면 왕돈의 군사 전봉(錢鳳)이 왕돈의 면전에서 자신을 헐뜯는 말을 할까 염려돼 송별연을 막을 방법을 찾았다. 송별회 때 전봉이 아직 술을 마시기 전에 온교는 술에 취한 척 전봉의 뺨을 때렸다. 전봉의 두건이 땅에 떨어질 정도로 후려치고는 호되고 꾸지랬다. “너 전봉, 네가 뭔데? 나 온교가 술을 권했는데도 감히 네가 마시지도 않아!” 전봉은 대단히 화가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왕돈은 온교가 취했다고 생각해 전봉에게 위로하며 화해시켰다. 다음날 전봉이 왕돈에게 말했다. “온교는 조정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함부로 믿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왕돈이 말했다. “온교가 어제 너무 취해서 그대에게 무례를 범한 것이오. 그런대도 그대는 그것 때문에 헐뜯는 말을 하는 것이오
도요새와 민물조개가 서로 싸우면 어부가 이익을 얻게 된다. 실제로 어떤 대가도 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벼이 어부지리를 얻는 경우가 있다. 이런 좋은 기회라면 누구도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부지리를 얻는 경우는 대체로 두 가지 상황이 있다. 첫째는, 변화를 조용히 지켜보는 경우다. 도요새나 어부처럼 제3자가 되어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다. 먼 산에서 호랑이끼리 싸우는 것을 지켜보는 경우와 같다. 연극을 보듯이 감상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상대가 내부에서 분멸을 일으키고 자기편끼리 서로 죽이는 것을 지켜보면 된다. 양패구상(兩敗俱傷)으로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연극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순수견양(順手牽羊)이다. 손에 잡히는 대로 양을 끌고 가면 된다. 둘이 쓰러지면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들고서 소리 높여 노래 부르며 돌아가면 된다. 둘째는, 주동적으로 출격하는 것이다. 상대방 내부에 잠입해 갈등을 일으켜 둘이 싸우게 만든다. 아니면 갈등을 조장해 각개 격파하면서 이익을 얻으면 된다. 어부지리는 매혹적인 일이다. 대가를 치루지 않거나 적은 대가로 큰 이익을 얻는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 BC325~BC25
중국 고대 역사에서 환관(宦官)이 권력을 독점한 사례는 많고도 많다. 왕조마다 그에 따른 교훈을 얻을 수 있을 정도다. 한(漢)나라 원제(元帝, BC74~BC33)는 환관 석현(石顯)을 총애하였다. 석현은 중서령이 돼 조정의 크고 작은 일을 자신이 재결하였다. 석현은 사람됨이 올바르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헐뜯는 말을 황제가 듣게 될까봐 걱정이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끝없는 충성심을 표시하였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신임을 얻으려 노력하였다. 어느 날, 석현은 궁궐에 파견돼 일을 보게 되었다. 그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태도를 실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했다.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일을 처리하는 데에 너무 늦어 미앙궁(未央宮) 궁문이 닫히면 들어올 수 없을까 염려되니 황상께서 문지기에게 조서를 내려 걸쇠를 채우지 말도록 하조해달라고 청했다. 황제는 곧바로 각 궁문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같은 내용의 조서를 내렸다. 석현은 고의로 시간을 지연시키며 각 궁문에 문지기들을 머무르게 만든 후 한밤중에서야 돌아왔다. 문지기들은 밤늦도록 기다렸다가 그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석현이 황제에게 거짓 구실을 대어 자기 마음대로 궁문을 여
‘당근과 채찍’의 원리는 자명하다. 인자할 때는 인자하고 엄할 때에는 엄해야 하고 내칠 때는 내치고 당길 때는 당겨야 한다는 말이다. 중국역사에 전형적인 사례가 있다.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은 역사에서 ‘야심과 의심이 많은 군주(雄猜之主)’로 유명하다. 야심이 컸으며 의심도 많았다는 말이다. 그가 황제에 오른 후 중국 천하를 다스릴 때 겸허하고 현인을 받아들이며 현자를 임용하는 기풍은 뒷전으로 밀려두고 아침저녁으로 자신의 절대 권력과 가천하(家天下)를 유지하는 데에 골몰하였다. 주원장은 각종 비열한 수단을 사용해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자는 배척하고 공신을 주살하였다. 이선장(李善長, 1314~1390)은 주원장을 따라 전쟁터를 전전하였다. 지모가 뛰어나고 판단이 정확한 인물로 유명하다. 개국 초기에 법률제도, 종묘 예의를 제정해 주원장과는 물과 물고기 같은 사이었다. 주원장은 이선장을 한나라의 소하(蕭何)와 비교하면서 그를 “공신의 수장”이라고 불렀다. 개국 후 최초로 승상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주원장이 성공해 천자의 자리에 앉자 이선장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