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평리 애향탑과 충혼비 ▲ 온평리 애향탑 이 탑은 온평리분들이 1981년도에 마을길 포장을 기념하여 세웠다.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말 그대로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이제까지 나들이 중 애향탑을 본 건 온평리가 처음이다. 이런 자부심 가득한 마을에 공항건립으로 인한 갈등이 심화되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 온평리 충혼비 온평리 충혼비는 애향탑 바로 옆에 세워져 있다. 6.25전쟁동안 전사하신 이 마을 출신 군인 21분과 경찰 세 분의 넋을 기리고 위안코자 마을 주민들이 1963년도에 세웠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육지부만의 일이 아니었다. 4.3의 아픔을 겪자마자 육지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내던져진 우리 제주 청년들은 그렇게 모진 세월의 한 가운데 서 있었던 것이다. ▲ 백년해로나무 충혼비 바로 옆엔 백년해로나무라고 이름지어진 팽나무와 후박나무가 하나가 된 연리목이 서있다. 사진으로 볼 때 나무의 잎이 다름을 확연히 볼 수 있다. 여기서 기도하면 득남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기도하는 이를 볼 수가 없으니 요
"온평리는 고·양·부 삼신인(三神人)의 혼례 전설을 간직한 혼인지가 있는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마을 전체가 여유롭고 제주의 정서를 잘 간직하고 있어 마을안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곳입니다." ■혼인지 삼성혈에서 태어난 고·양·부 삼신인이 사냥을 하다 쾌성개 혹은 화성개(화상개)로 불리는 온평리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바다에 떠 내려온 목함을 발견한다. 목함을 열어보니 벽랑국의 세 공주와 곡식의 씨앗, 가축 등이 나왔다. 삼신인은 이곳 혼인지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세 공주와 혼인식을 올렸다. ▲ 혼인지 입구 ▲ 혼인지 전경 - 출처 제주의 푸른밤님 블로그 혼인지는 약 500평 정도의 면적을 가지고 있고 여름에는 연꽃이 화려하게 피어난다. ▲ 준설공사중인 혼인지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아쉽게도 혼인지의 물을 다 빼내고 준설 공사중이었다. 그러나 혼인지의 밑바닥을 볼 수 있었던건 행운(?)인지도 모른다. 혼인지의 깊이가 채 1미터가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 묵은 연디(연대) ▲ 수산리와 묵은연디로 가는 길 고성 북쪽 성뒷길을 지나 수산방향으로 향한다. 양옆으로 나즈막한 돌담이 쌓인 좁은 길이다. 바닥만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지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여간 호사가 아니다. 걷는자 만의 특권이다. 들려오는 휘파람 새소리는 보너스다. ▲ 묵은 연디 묵은 연디(연대)도 주인과 운명을 같이 했다. 고성이 폐성된 이후 이 연대도 버려져 600년의 세월을 견뎌 왔다. 고성이 버려지기 전 지미봉수와 대수산봉수(큰물뫼오름봉수)와 연계하여 신호를 받아 옛 정의현감에게 알리던 연대라고 한다. 그 긴 세월동안 아직도 남아 있다는게 신기할 따름이고 보존이 시급해 보인다. 제주도내 훼손되어 사라진 봉수나 연대도 원형과 상관없이 버젓이 새로 쌓는 판국에 600년된 연대가 돌봐주는 이 없이 스스로 아직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고 본다. ▲ 개조심 오조리에선 '외상사절'이라는 잊혀진 문구가 보이더니 수산리 어귀에선 '개조심'문구가 반
■동문터 ▲ 동문터 동문터 역시 남문과 마찬가지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폐성된지 거의 600년이 되었으니 성문은 진작에 없어지고 길만 남았을거다. 성곽은 야금야금 허물어져 갔을 것이고. 남문과 달리 동문밖에는 성굽길이 S자형태로 나 있지 않다. 송두옥의 논이 매립지였다면 동문 밖은 나오자 마자 바다이기 때문에 S자 성굽길을 만들 수도, 만들 이유도 없었으리라 짐작한다. ▲ 고성 성안 길가의 돌담 풍경 동문밖의 옛길은 오조리로 이어진다. ■원터(院-) ▲ 원터가는 길 입구 정경 성안길을 따라 원터가는 길목은 돌담과 귤밭, 낮은 지붕들의 조화가 제주 옛 마을 원풍경의 극치를 보여준다. 감히 한 폭의 그림으로도 담아 낼 수 없다. 작위적으로 복원된 민속마을 풍경과는 비교할 수 없다. 세월을 담아내고 삶이 그려낸 살아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만난건 걷는자만의 특권이다. 인위적인 복원 보다는 보존이 더 앞선 가치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 원터 현재 - 사진출처, 고정의현성 복원 및 활용 방
■서문 ▲ 서문(추정)으로 가는 길 서문(추정)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고 정의현성 복원 및 활용 방안 수립연구 용역'(이하 용역보고서)에 의하면 위의 사진에 표기된 곳이다. ▲ 서문(추정)근처 잔존 성곽 서문(추정)으로 향하는 길 끝에 담쟁이와 온갖 덩굴로 뒤덮인 돌담이 보인다. 과수원의 경계이기도 하지만 그 과수원조차 버려져 있고 잡초가 무성해 성곽의 모습은 잡목더미 속에 묻혀 있어 온전히 볼 수가 없어 아쉽다. 다만 필자가 1914년 원지적도 및 현재의 상황을 볼때 서문(추정) 밖으로 이어진 길이 없다. 심지어 1914년 지적도에는 서문(추정)으로 향한 길조차 중간에 끊겨있다. 따라서 원래 서문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성문이 있었다면 당연히 드나드는 길이 있었을테고 그 길은 웬만하면 남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잔존 성곽하단부 그래도 설레었다. 고성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 전까지는 그저 상상속의 성이었다. 이미 다양한 자료와 선행연구
"고성/수산코스는 성산읍 노인복지회관에서 출발하여 고성 성안길과 성곽을 거쳐 옛 길을 따라 수산진성을 둘러보는 길로서 제주 옛 길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코스입니다.(약 9km)" ■고성리(古城里)(성산읍) 고성리(古城里)는 이름 그대로 옛 성이 있었다는데서 유래한다. 애월읍에 있는 고성리도 마찬가지인데 항파두리성이 위치하고 있어서이다. 마을 노인분들은 묵은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주시내의 무근성과 같은 이치이다. 고성리는 성산읍사무소가 위치한 제주동부의 중심지이다. 그만큼 관공서와 관광관련시설, 교육,산업시설등이 밀집되어있다. 법정리인 신양리도 행정리인 고성리에 속해있다. ■고성(옛 정의현성) 고성은 옛 정의현성 즉 고정의현성(古旌義縣城)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초 1416년(태종 16년)에 제주에 1목, 2현(제주목,정의현,대정현)을 둘 때 정의현청을 두면서 축조한 성이다. 고려말 때 삼별초가 방어를 위해 쌓은 성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근거가 희박하다. 본거지인 항파두리성도 토성인데 굳이 이 먼 곳에 석성을 쌓을 이유도 여력도 없었을 것이다. 축조된지 7년만에 (1423년,세종5년) 지금의 성읍(당시 진사리)에 정
■소금막 길 오조리 41번길을 예전엔 소금막길이라 불렀다. 종달리보다는 못하지만 오조리에서도 소금을 생산했던 소금막이 있어서다.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다. ▲ 소금막길 입구의 퐁낭 ▲ 퐁낭아래 쉼터표지 소금막길로 들어서는 입구에 퐁낭이 한그루 서 있고 누군가 나그네를 배려한 듯 쉬어가라고 쉼터 표지를 해 놓았다. 조촌 쉼터. 오조리를 조촌으로도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표지를 한 이가 조촌이라 표현했으니 그런가보다 한다. 잠시 앉아 쉬어본다. ▲ 소금막 길가의 주택 ▲ 정낭 PVC파이프안에 대나무를 끼운 정낭 하나가 귤밭을 지키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들이에서 실지 쓰이는 정낭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 더 반갑다. 원래의 세개가 아닌 한개짜리 PVC 정낭이어도. ▲ 길 양옆으로 심어진 동백 나무 길을 사이에 두고 두 집이 길가에 울타리인 양 동백나무를 심어 놓았다. 나무의 크기로 보아 심은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듯하다. 마주보는 두 집이 비슷한 시기
■성산포 유채꽃(?)재배단지 지난번 나들이 코스에서 설명한 바 있는 배추꽃밭이다.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사진을 찍으려해도 관리인이 손사래를 친다. 꽃을 피워 낸 수고로움과 한철 장사가 이해는 가지만 각박하다. ▲ 성산포 배추꽃 재배단지 지금(2월)은 유채꽃이 필 시기가 아니다. 워낙 제주가 유채꽃이 유명하니 이 시기에 피는 배추꽃이 유채꽃으로 둔갑해 버린 듯 하다. 포털사이트 지도에도 유채꽃 재배단지로 표기되어 있고 심지어 제주관광공사 안내에도 성산포 유채꽃 재배단지로 소개하고 있다. ▲ 김승욱 관광객들은 입장료 1000원씩 내고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굳이 비유하자면 부시리를 방어로 알고 먹는 식이다. 지금이라도 공식적으로 배추꽃밭으로 정정함이 맞지 않을까. 유채든 배추든 예쁜 노란 꽃이 선사하는 아름다운 풍광이라는 그 본질은 잃지 않을테니. 배추꽃만 억울할 일이다. ▲ 배추꽃 ■광치기 해변 ▲ 광치기 해변 광치기해변은 일출사진 명소로도 유명하다. 해변이 길어서 다양한 사진포인트가 있다.
■오조포구/오조리감상소 ▲ 오조포구 성산항에 갑문이 생기기 전엔 이 포구엔 배들이 쉼없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배들이 다닐 수 없으니 포구에 매어져 있는 배 한척 없다. ▲ 양어장을 위해 쌓은 둑 □오조리 감상소 오조포구의 어구를 보관하던 창고이다. 2016년도에 방영된 KBS2 드라마 '공항가는 길'의 촬영지이다. 누군가 촬영후 오조리 감상소로 이름 짓고 잠시나마 전시공간으로 쓴 듯 하다. ▲ 오조리 감상소 주인공 최수아(김하늘 분)와 서도우(이상윤 분)의 스토리로 전개되는 이 드라마에서 서도우의 작업실로 촬영된 곳이다. 지금은 관리가 안되는 듯 방치되어 안쓰럽다. 문도 창문도 지붕도 뜯겨져 나가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 드라마 '공항가는 길'의 장면 조각보 공예가였던 드라마 속 서도우의 모친의 유서엔 자신의 작품을 전시해 주었으면 하는 공간으로 이곳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황근자생지 ▲ 황근 자생 군락 황근은 노란 무궁화로도 불리는데 무궁화와 같은 아욱과 식물이다. 황근은 전남 완도와 제주도의 바닷가에서 자생하는데 집단군락지는 식산봉이 유일하다고 한다. ▲ 황근 꽃(노란무궁화)-출처 블로그 곤충이야기 꽃모양이 무궁화와 비슷하나 색이 노랗다. 주로 7,8월에 개화한다고 하니 여름에 한번 더 와볼 일이다. 환경부지정 멸종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식산봉 ▲ 식산봉 안내석 ▲ 식산봉 오르는 길 식산봉은 제주의 여느 오름처럼 화산폭발로 생겨난 분석구라고 한다. 그러나 식생은 다르다. 해안가에서 드물게 활엽수림이 자생하고 있고 서서히 동백나무류로 천이하는 과정에 있다고 한다. 특이한건 큰 암석들이 정상과 오름 주변에 많이 분포한다. 지질학적 지식은 없지만 일반적인 오름과는 다른 형성과정이 있었으리라고 본다. 큰 바위에 스코리아(송이)층이 덮여있는 모습이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 ▲ 별젯단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 제단
"오조리 코스는 오조리 마을회관에서 출발하여 마을안길, 족지물, 식산봉을 거쳐 광치기해변과 철새도래지를 경유하는 코스로서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입니다." ■오조리(吾照里) 마을길 ▲ 마을회관 앞 설촌유래비석 오조리는 풍광이 빼어나다. 딛는 걸음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여느 관광명소처럼 커다란 주차장이 있지도 않고 번잡하지도 않다. 소박하게 걷는 이에게만 오롯이 그 아름다움을 내어준다. ▲ 오조리 일출-출처 jejumall.com 성산일출봉에서 솟은 해는 제일 먼저 오조리 마을을 비춘다. 오히려 일출봉 아래 성산포는 일출봉 그늘에 가리니 말이다. 오조리가 품은 호수같은 바다는 떠오른 햇살을 튕겨 마을을 한번 더 비춘다. 하늘의 해와 바다에 잠긴 듯 수면에 투영된 해가 동시에 마을을 비춘다. 아침엔 해가 밤엔 달이 그렇다. 나吾(오), 비출 照(조), 두 단어가 오조리를 잘 설명한다. 거울 앞에 선 것처럼 파도가 없는 잔잔한 오조의 내만에 서면 내가 비춰진다. 그래서 일거다. 나를 비춘다는
■시흥리(始興里) 심돌마을로 불리던 지명이 1904년 정의군수 차수광 시절 『시흥리(始興里)』로 마을 이름을 바꾼다. 당시 행정구역 개편으로 정의군에 속했던 종달리가 지금의 제주시 구좌읍으로 편입이 되면서 시흥리는 서귀포시 동쪽 첫마을이 되었다. 옛 정의군과 제주목 경계에 있어 정의군의 시작이 되는 마을이고 흥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마을호수는 약 200여 호였다. ▲ 두산봉에서 시흥리로 가는 길 올레 1코스와 헤어져 시흥리로 발걸음을 옮기니 멀리서 성산일출봉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여느 제주의 시골길처럼 밭담사이로 길이 이어져 있다. ▲ 두산봉 응회환의 지층 두산봉은 비교적 수심이 있는 바다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화산재가 둥근형태로 쌓여 굳어진 응회환이라고 앞서 설명했다. 시흥리로 가는 길에 두산봉은 자신의 속살을 보여준다. 먼 옛날 화산의 분출물이 켜켜이 쌓여 굳어진 지층의 모습을 보란듯이 내어주고 있다. 제주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지질공원답게 닿는 발길마다 지질학적 특징을 느낄 수 있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