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김광석의 대표곡 '이등병의 편지'는 입대하는 까까머리 젊은이들과 연인, 가족의 심금을 꽤나 울렸던 노래다. 노래에 등장하는 훈련소로 논산훈련소('육군 제2훈련소'에서 '육군훈련소'로 개칭)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만, 제주에 '원조' 훈련소가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과거 6·25 전쟁 당시 50만 장병을 양성했던 제주 '육군 제1훈련소'다. ◇ "제주서 강한 신병 양성 훈련소 초석 다져"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의 한 교차로. 차들이 오가는 도로 양옆으로 높이 3.7m, 가로·세로 2.5m 크기의 시멘트 기둥이 나란히 서 있다. 두 기둥의 간격은 17m 정도다. 갈라지고 금이 간 기둥과 현판을 걸어뒀던 것으로 보이는 녹슨 철근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기둥의 정체는 옛 제주 육군 제1훈련소 정문이다. 지난 2021년 11월 국가 등록문화유산으로 고시됐다. 2008년 국가 등록문화유산으로 기존 등록된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에 정문을 추가해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와 정문'이라는 명칭으로 새롭게 등록됐다. 도로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은 2개의 시멘트 기둥, 인근에 몇 안되
"나무 표지에서도 기념 촬영할 수 있습니다." 한라산 정상 백록담. 1950m의 고지대 답게 한 여름 뙤약볕에도 서늘한 공기가 밀려온다. 그러나 그 기운을 느낄 틈은 없다. 북새통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오직 하나. 남한 최고봉 한라산을 등정한 걸 기념하기 위한 촬영행렬이다.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백록담' 표지석을 차지하려는 긴 줄이 이어져 차례가 오길 기다리는 행렬은 분화구 정상 밑으로도 길게 늘어서 있다. 긴 대기 줄로 인해 한 번 촬영하려면 1시간 이상 기다리는 것은 예삿일이다. 한여름에는 기다리는 동안 땀이 식어 한기를 느끼기 때문에 등산객들은 바람막이를 꺼내 입곤 한다. 땀을 쏙 빼고 기껏 정상에 올랐지만 하염없이 긴 줄로 기념 촬영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리는 등산객들도 적지 않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라산국립공원관리소는 "다른 나무 표지도 있다"면서 기념촬영 대기 줄을 분산하도록 하는 안내방송까지 하고 있다. 해발 1950m 한라산 정상에는 자연석 표지석 외에 '한라산동능정상', '명승 제90호 한라산 백록담'이라고 새겨진 두 개의 멋진 나무 표지도 있다. 하지만 등산객들은 자연석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으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주 유일의 승전사 을묘왜변(1555년) 이후 40년이 채 안 돼 발발한 임진왜란(1592∼1598년). 조선을 거쳐 중국을 집어삼키려는 일본의 침략 야욕으로 인해 7년간 한반도 전체가 전쟁터가 됐고, 온 국토는 황폐해졌다. 조선의 백성 절반 가까이가 목숨을 잃었던 참혹한 전쟁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제주도는 무사할 수 있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임진왜란 당시 제주가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와 당시 제주의 숨은 영웅들을 알아본다. ◇ 임진왜란 속 제주의 숨은 영웅들 1592년 임진년 봄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일본은 부산에서 한양까지 최단 거리로 진격해 조선의 왕을 사로잡고 전쟁을 단숨에 끝내려 했다.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조선군을 격파하며 파죽지세로 북상, 20일 만인 5월 3일 한양에 무혈 입성했다. 사흘 전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간 뒤였다. 일본의 당초 계획대로 되지 않은 전쟁은 결국 장기전에 돌입했다. 임진왜란 초기 제주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침공 우선순위에 제외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왜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제주 백성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당시 제주 섬 전체를 책임지고 다스렸던 목사(牧使)는 이경록이었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이전인 1555년 을묘년 조선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왜구가 우리나라를 침입했다. 제주와 전남에서 발생한 을묘왜변이다. 전남 영암을 중심으로 왜적의 침임이 시작됐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을 무찌르고 왜변을 마무리 지은 곳은 제주였다. 이 승리를 '을묘왜변 제주대첩'이라 부르고, 제주 유일의 승전사로 입에 오르내린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제주 백성이 힘을 합쳐 왜적과 싸워 이긴 제주 유일의 승전사 '을묘왜변 제주대첩'의 의미를 알아본다. ◇ 70명의 날랜 군사와 치마돌격대로 왜구 격퇴 1555년 6월 21일 왜선 40여척이 제주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 달 전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를 침략, 영암과 진도·강진·장흥 등에서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았던 왜구들이었다. 이들은 전라도에 큰 피해를 주고도 모자라 일본으로 돌아가는 대신 제주로 눈을 돌렸다. 애초 70여척에 달했던 규모는 다소 줄었지만, 조선 개국 이후 제주를 침략한 가장 큰 규모의 왜구였다. 을묘왜변 제주대첩의 서막이 올랐다. 며칠간 정탐을 벌인 끝에 왜구 1000여명은 6월 27일 제주 화북포로 상륙, 곧바로 제주성으로 쳐들어왔다. 전투는 동성(東城)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제주
제주 관광업계가 항공편 좌석 감소와 '비계 삼겹살' 논란, 고물가 등 부정적 이미지로 시름이 깊다. 1일 한국공항공사 통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4월까지 제주∼김포 항공노선 편수는 6만1096편으로 집계됐다. 이는 2022년 1∼4월 7만3111편에 비해 16.4%(1만2015편) 감소한 것이다. 2022년에는 코로나19 팬더믹으로 해외여행이 제한되자 여행객들이 발길을 대거 제주로 돌리면서 제주 관광업계가 특수를 누렸다. 제주∼김포 노선 운항 편수는 2021년 1∼4월 6만1159편, 지난해 1∼4월 6만2539편이다. 올해 같은 기간(1∼4월) 운항 편수는 2021년 대비 63편(0.1%), 2023년 대비 1443편(2.3%) 줄어들었다. 연도별 제주∼김포 노선 운항 편수를 보면 2023년 19만1065편으로 2022년 21만6445편에 비해 11.7%(2만5380편) 감소했다. 2021년 21만2690편과 비교하면 10.2%(2만1625편)가 줄어들었다. 제주∼김포 노선은 국내선 항공편 중 가장 많은 비행기가 투입된다. 항공사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종료 이후 해외여행 수요가 되살아나자 제주 출발·도착 항공편 좌석을 국제선으로 대거 돌렸다. 이로인해
제주를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 말고기 식당이 눈에 띈다. 오늘날 말고기가 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처럼 대중화된 음식은 아니지만 말의 고장 제주에서만큼은 점차 향토음식으로 자리 잡으며 인기를 끌고 있다. 제주의 말고기 식용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아본다. ◇ 알다가도 모를 제주의 말고기 식문화 언제부터 제주에서 말고기를 먹었던 것일까. 제주 신화를 통해 예부터 제주에 말고기 식용 문화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농경신이 된 자청비의 이야기를 담은 '세경본풀이'(제주에선 '신화'를 '본풀이'라 일컫는다)를 보면 자청비의 하인인 '정수남'이 아홉마리의 소와 말을 몰래 먹는 내용이 나온다. 이외에도 소와 말, 돼지 등을 먹는 육식신(肉食神)과 그렇지 않은 미식신(米食神)이 등장하는 여러 제주 신화를 보면 먼 옛날부터 말고기를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경사회에 들어서면서 말고기를 먹는 일이 크게 줄었지만, 고려 시대 몽골식 목마장이 들어서면서 제주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몽골식 도살법과 요리법이 전해졌다. 고려말 조선 초기에는 말과 말가죽 교역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고 도축 과정에 나온 고기를 먹었다. 제주에서 말은 농사의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제주 사람들은 웬만
제주 한라산 중턱의 마방목지에 가면 드넓은 초원에서 뛰노는 제주마를 볼 수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한번쯤 들러 예쁜 추억을 남기는 명소다. 오래전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는 제주마에 대해 과연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제주마를 일컬어 흔히 부르는 '조랑말', '과하마'라는 말은 맞는 말일까. ◇ 말의 산지 '제주' 그 유래는 언제부터 제주에서 말을 키우기 시작했던 것일까.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제주에서 말 사육은 탐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의 시조인 고을나·양을나·부을나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나 나라를 세웠다는 '탐라건국신화'에 그 일말의 단서가 남아있다. 세 신인은 사냥하며 가죽 옷을 입고 고기를 주식으로 생활하다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와 혼인한다. 중요한 건 세 공주가 당시 제주에는 없던 새로운 문물을 함께 들여오는데, 바로 오곡의 씨앗과 망아지·송아지 등 가축이다. 역사를 반영한다는 '신화'(神話)의 속성상 이는 수렵의 시대가 저물고 농경과 목축의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문헌 기록으로는 고려 문종 27년(1073년)에 탐라가 고려 조정에 말을 진상했다는 첫 기록이 있어 서기 1000년경 말이 본격
제주 목축문화를 복원하기 위한 제1회 제주마 입목 및 문화축제가 한창이다. 천연기념물 제주 조랑말(제주마)을 소재로 한 축제로 27∼28일 이틀간 제주시 봉개동 개오리오름 일대 제주마 방목지에서 열리고 있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로 보내라'라는 옛말처럼 '말'은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 중 하나다. 마찬가지로 조랑말을 키우며 삶을 이어간 말테우리는 제주 목축문화의 상징이다. 말테우리를 비롯한 제주 목축문화를 두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밭농사에 없어선 안 될 말테우리 조선후기 제주 문인 이한우(1818∼1881)는 제주의 열 가지 빼어난 경관을 정리해 '영주십경'(瀛州十景)이라 일컬었다. 이 중 마지막 제10경이 '고수목마'(古藪牧馬)다. 한라산 중턱이나 너른 초원에서 말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 모습을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중 하나로 꼽은 것이다. 20세기 초 이를 바탕으로 춘원(春園) 정재민(鄭在民)은 '영주십경도'(瀛洲十景圖)를 그려 병풍으로 만들었다. 그림을 보면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는 5필의 말과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생각에 잠긴 말테우리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림 우측 상단의 글귀는 '말'(馬)을 '산속의 사슴'(山中鹿)이라 적
한 때 이주 열풍이 뜨거웠던 제주가 인구 감소세로 돌아섰다고 한다. 시들해진 이주 열풍과 청년층 이탈, 고령화, 저조한 출산율 등 팍팍해진 서민들의 삶 탓이다. 과거에도 이 같은 현상이 있었다. 조선시대 지방관의 과도한 수탈 등으로 먹고 살기 어려워 도망치듯 섬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제주 인구가 크게 줄었다. 이때 궁여지책으로 나온 조정의 정책이 '출륙금지령'이었다. 약 200년간 제주를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이 철저히 격리해 놓았던 출륙금지령은 왜 생겨났고, 제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 "차라리 왜놈에게 죽겠다" 떠나는 제주 사람들 '제주(濟州)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유리(流離)하여 육지의 고을에 옮겨 사는 관계로 세 고을의 군액(軍額)이 감소하자, 비국이 도민(島民)의 출입을 엄금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조선왕조실록 인조 7년 8월 13일) 조선은 인조 7년인 1629년 제주에 '출륙금지령'을 내렸다. 국법으로 관청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제주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나갈 수 없도록 막아놓은 것이다. 이처럼 강력한 통제정책을 편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됐듯이 '제주 백성들이 유리(流離)'했기 때문이다. '일정한 집과
70여년 전 해방정국 혼란기 속에 발생한 참극 '제주4·3'. 4·3의 비극성은 치열한 이념 격돌의 한가운데 수많은 무고한 제주도민이 희생됐다는 데 있다. 하지만 제주도민은 국가 권력에 의한 무자비한 희생의 아픔을 딛고 각고의 노력 끝에 진실 규명을 이뤄내고, 화해·상생의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성공적인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사례로 평가받는 제주4·3은 또 하나의 도전을 앞두고 있다. '진실·화해·상생'의 가치를 담은 4·3기록물의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다. 서슬 퍼런 국가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4·3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분투한 사람들의 노력, 그들에 의해 수집·채록한 4·3기록물이 우리나라 현대사 속에 갖는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 ◇ 4·3 억압된 침묵의 기록 제주4·3은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학살이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單選單政,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 봉기했다. 이후 무장대와 군·경을 비롯한 토벌대는 서로를 각각 '통일 반대 세력',
제주삼다수가 가수 임영웅을 신규 브랜드 모델로 선정하고 새로운 도약에 들어갔다. 제주삼다수는 임영웅이 가진 특유의 바르고 겸손한 태도와 전 세대에게 신뢰를 주는 모습이 ‘믿고 마실 수 있는 물’ 제주삼다수의 브랜드 이미지와 잘 부합해 신규 브랜드 모델로 선정했다고 배경을 밝혔다. 임영웅과 제주삼다수의 또 다른 공통점은 업계 1위라는 점이다. 임영웅은 한국기업평판연구소가 올해 1월 조사한 가수 브랜드 평판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어 각종 음원차트 1위 및 전국투어 콘서트 전석 매진을 기록하는 등 독보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제주삼다수도 국내 생수시장에서 시장점유율 40.3%(2023년 기준)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출시 이후 26년간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제주삼다수는 이번 광고 캠페인을 통해 품질에 대한 자신감과 철저한 수질 관리 노력을 알릴 계획이다. 지난 21일 공개된 첫 CF ‘토지보호 편’에서는 제주삼다수를 지키기 위해 축구장 100개 크기의 땅을 매입했으며 ‘땅이 깨끗해야 물도 깨끗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제주삼다수는 한라산 국립공원 내 해발 1450m 높이에 스며든 빗물이 현무암과 천연 필터인 화산송이층을 통과하며 18년 동안 정화
제주삼다수를 생산·유통하는 제주개발공사가 올해 공공주택 사업에 총력을 질주한다. 공공임대주택은 물론 토지임대부 분양주택 사업에도 박차를 가한다. 제주개발공사는 도내 공공주택 공급 확대를 위해 국고보조금 등 약 291억원을 포함, 올 한해 719억원을 투입해 제주도내 공공주택 사업을 추진한다고 25일 밝혔다. 제주개발공사는 우선 도내 공공임대주택의 신속한 공급을 위해 약 301억원을 투입해 180호를 매입하고 임대를 추진한다. 더불어 건설형 공공주택인 ‘마음에온 연동·대림·법환·대정’ 건립 추진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오는 2026년까지 완공할 예정이다. 특히 제주에서 첫 추진되는 삼도이동 토지임대부 분양주택(72호) 사업은 내년 상반기 공사착공을 목표로 한다. 입주는 2027년 3월 예정이다. 토지임대부 분양주택은 토지의 소유권은 사업자인 제주개발공사가 갖고, 건축물 및 복리시설 등에 대한 소유권은 주택을 분양받는자가 가지는 주택이다. 분양가격에 토지가격이 포함되지 않아 ‘반값 아파트’라 불리며, 무주택 서민들의 자가소유기회 확대를 보장하는 주택이다. 삼도이동에 이어 서귀포시 동흥동 일원 후보지에도 토지임대부 분양주택이 공급될 예정이다. 공사는 더불어 지난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