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 제경공에게 어린 거지를 거두어 기르라고 권하다 중국 역대 제왕 중에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혼용(昏庸)의 무리가 적지 않았으나 그래도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대부분은 덕이 있는 정치, 어진 정치를 힘써 실행하였다. 혹간 하는 짓이 장식장 속 장식과 같은 수준에 불과하더라도 한번이라도 노력하기는 했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고위는 특히나 어리석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춘추시기에 제(齊)경공(景公)이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있는 어린 거지를 보고는 돌아갈 집이 없는 아이구나 말했다고 전해온다. 곁에 있던 재상 안영(晏嬰)은 황제께서 계신데 저 아이가 어찌 돌아갈 집이 없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사람을 파견하여 저 어린 거지를 맡아 기르게 한다면 모두가 그 일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라고 권했다.(『안자춘추』) 무슨 뜻인가? 큰 힘을 들이지도 않고 어린 거지를 거두어 기른다면 백성의 찬양을 받게 되고 마음으로 복종하게 되며 인정을 베푸는 국군이라는 미명을 얻게 된다는 의미다. 송 태종, 거지를 죽이는 계책을 실행하다 976년, 송(宋) 태종(太宗) 조경(趙炅)1)은 황위를 계승하여 국호를 태평흥국 원년으로 바꿨다. 그는 늘 어떻게 하면 내외의 사람을 자신에게 복
피난하다가 위(衛)나라를 경유할 때, 중이가 예전에 위나라가 건도(建都)하는 데에 진나라가 지지하지 않았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 원조를 거절하였다. 중이의 무리가 오록(五鹿)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배고픔을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농민에게 구걸했으나 농민은 진흙을 담아 주었다. 어쩔 수 없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과 말 모두 지쳐 기진맥진하게 되었다. 중이가 지치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하여 수행인 앞에 쓰러졌다. 수행인들이 산나물을 캐다가 탕을 끓여 허기를 채우려고 할 때 개지추(介之推)가 자신의 허벅지의 살을 베어다 탕에 넣고 끓여 중이에게 바치자 감격해 눈물 흘렸다. 이후 그들은 또 여러 번 방랑하며 평탄치 못한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진목공의 도움을 받아 기원전 636년에 국군이 되었다. 바로 문공이다. 문공은 9년 동안 재위하면서 진(秦)나라와 결맹하였다. 역사상 유명한 ‘진진지호(秦晉之好)’다.1) 이후 왕자대(王子帶)2)의 난을 평정하고 주(周)양왕(襄王)을 받아들였다. 초(楚)나라를 치고 송(宋)나라를 구하여 춘추오패의 하나가 된다. 『좌전』은 ‘하늘이 도와’(天助)서 성공했다고 했으나 사실은 19년 동안 유랑하면서 구걸하고 남에게
중국역사에서 한동안 거지로 전락했던 제왕은 한둘이 아니다. 어떤 역사적 배경과 우연적 개인의 환경 아래서 제왕과 거지의 인연은 재미있는 조건과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전기적인 일문(逸聞) 일사(逸事)가 발생하고 발전 변화하였다. 그런 사례를 통하여 역사를 증명할 수 있고 사회를 고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 민족문화전통 중의 관념 전승과 개별적인 여러 가지 고유의 갈등, 모순을 분석하고 투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비교적 명확하면서도 깊게 새로이 사회를 인식하고 역사를 평가할 수 있게 도와준다. 역사와 문화를 심도 있게 다시 고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비정상적인 상태 속에서 근원을 판별하고 왜곡된 사실 속에서 바른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양하면서도 어지러운 사회세태 중 한 부분이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정사 기록이든 야사나 필기소설이든, 지금까지 진귀한 사료로 남아있다. 정사에서 다루어진 거지 문제와 상응하는 정책, 대책을 제정한 것 이외에 제왕과 거지의 일문 전설은 여러 가지가 뒤엉키어 복잡하기 그지없는 인간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인생살이에 있어 물질이나 정신생활 상의 빈부는 고정돼 있거나 불변하지 않는 게 아니다.
거지와 마의(馬醫) 전국시대 때에 제(齊)나라에 있었던 일이다. 가난 때문에 곤경에 빠지자 마을을 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거지가 미움을 샀다. 사람들은 그를 싫어하여 먹을 것을 나누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게 되자 거지는 전(田) 씨의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는 마의(馬醫, 수의사)의 조수 일을 하면서 연명해 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거지를 비웃으며 말했다. “마의를 쫓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얻어먹는 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거지가 답했다. “천하에 거지보다 더 부끄러운 것이 어디 있겠소? 내가 마의를 쫓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어찌 거지보다 못하다는 말이오?” 당시에 마의의 지위는 비천하였다. 봉건사회에서는 역대로 비천한 직업군에 속했다. 마을 사람들이 거지를 싫어해서 먹을 것을 얻지 못하게 되자 마의를 도와 노동하며 입에 풀칠하면서라도 살아가는 것은 원래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도 비웃음을 받고 조롱을 받았으니. 그렇다면 그 거지를 다시 길거리로 내몰아 비럭질하며 살아가라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거지는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가. 세속의 편견은 가난해 마의를 도우며 살 수밖에 없는 거지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다. 『열선전』 속 거지, 한음생 위진(
거지 구성원은 복잡다단하며 역사 속 거지 형상은 기이하기 그지없다. 색채 또한 각양각색이다. 불결하고 죄악으로 넘쳐난다.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곤궁에 있다.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여 목숨을 연명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이 걸었던 길이다. 지금도 여전히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거지가 된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거지왕국 중 점점 많아지는, 신비한 죄악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유혼(遊魂)은 거지 현상이 번식된 파생물이다. 거지 가사를 뒤집어쓴 범죄 무리로, 불량배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 찌꺼기들이 거지 단체 중에 갈수록 많은 부분을 차지하면서 거의 주체가 되다시피 했다. 걸식이라는 명목을 가진 불량배요 범죄 집단이다. 바로 ‘직업 거지’다. 정당한 직업을 가질 수 있으면서도 직장을 구하지 않는다. 정당한 직업에 종사하지 않은 일부를 포함하는 ‘직업 거지’ 현상과 ‘거지 조직’의 형성은, 성격적으로 거지 집단을 완전하면서도 철저하게 사회문명이라는 유기체 내의 부스럼이요 악성 종기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그런 악성 종기는 여러 가지 사회범죄와 한 덩어리가 되었다. 함께 행동하고 의기투합해 인류문명사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사회의 악이 되어 버렸다. 거지
‘이식위천(以食爲天)’,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먹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이다. 옛 중국인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의식주가 부족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다면 구걸하게 되고 거지가 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거지에 관한 여러 가지 조사의 대부분은 이런 상황에 주의하고 있다. 현장에서 여러 가지 구걸하는 추태를 대면했을 때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렇게 구걸하는데, 가장 기초적으로 가지고 있어야할 체면도 없고 염치조차도 필요 없다는 말이요?” 대답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면서 단순하고 명쾌하였다. “배고픔을 참을 수 없는데 체면을 살필 겨를이 어디 있단 말이요. 체면을 생각하면 굶어 죽고 얼어 죽게 생겼는데, 이런 상황까지 이르렀는데 체면이 뭐가 필요하오!” 이런 솔직한 대답을 들으면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논리에 맞는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동정하게 된다. 그런데 거지의 다른 면을 보면 어떻게 될까. 돈을 위해서는 어떤 나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돈이 생기면 주색잡기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한다. 먹고 마시며 오입질도 하고 도박도 한다. 매우 많은 거지들이 때때로 놀랄만한 금액을 집에 붙이기도 한다.……말문이
거지를 보는 관점에 모순이 존재한다. 복잡하고 여러 특징을 가진 사람이 모인, 모순에 가득 찬,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구성원이기에 그렇다. 신비한 조합이 모순된 관점을 가지게 된 원인이다. 각양각색의 거지 유형을 식별하면 그 일부를 알 수 있다. 거지의 여러 가지 걸식 방법으로 분류하면, 거지를 크게 11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 첫째, 지팡이를 짚고 그릇을 들고 다니면서 거리에서 동냥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 그 다음으론 길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다니면서 동냥하는 거지, 그 다음으론 큰소리로 ‘동냥 줍쇼’ 외치며 다니는 거지가 많다. 여기에는 네 가지 부류가 있었다. 동항(東項), 서항(西項), 홍항(紅項), 백항(白項)으로 구분된다. 억지 부리며 강압적으로 구걸하는 거지는 홍항이고 애걸복걸하며 구걸하는 거지는 백항이다. 동항과 서항은 어떠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둘째, 전문적으로 경조사를 거행하는 점포, 매장, 가정에 가서 금일봉을 요구하는 거지다. 거지에게는 근거지가 있었다. 자기 경계를 넘지 못했다. 다른 근거지에서는 구걸하지 못했다. 규정과도 같았다. 금일봉 액수의 대소는 큰일을 치루는 가정의 크기에 따라 달랐다. 이외에 거지는, 신부를 맞을
청나라 때 A현에는 거지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었다. 집이 여러 채였다. 사람들은 ‘거지촌’이라고 불렀다. 끼어들기 좋아하는 호사가가 거지촌에 대련 한 폭을 선물로 보냈다. 상련은 “비록 관리도 장사치도 아니지만”이었고 하련은 “오히려 와호장룡(臥虎藏龍)의 안채다”이었다. 한 마디로 거지 집단의 구성원이 무잡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나쁜 사람들이 모여 있고 악행을 감추어주는 장소라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복잡다단한, 비열함을 간직한 곳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청나라 때 거지에 대한 허가(許珂) 부녀의 관점1)은 근래 사람들의 거지를 대하는 일반적인 인식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인구가 나날이 증가하니 생계를 꾸리기가 갈수록 어렵습니다. 외국 상품은 시장에 가득하고 국내 상품은 배제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업자는 더 많아졌습니다. 만약 국가 이익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구멍을 막지 않는다면 나라는 더욱 빈곤해질 것이요, 백성도 더더욱 곤궁해질 것입니다. 오랫동안 이런 지경이 계속되면 민족 공업은 쇠락하고 일용품조차 외국 상품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전국이 거지가 되는 국면을 변화시키기 어렵게 됩니다.” 그녀가 집안
거지라는 이름으로 사기 치거나 도둑질하거나 건달이 되는 등 사회 치안을 해치는 범죄행위를 자행하는 사람이 많았다. 송나라, 원나라 이래로 그 해로움은 극심해 졌다. 화갑이 넘은 늙은 거지 노파가 사기에 골몰하기도 하였다. 청나라 말기에 항주(杭州)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런 사례 중 하나다. 당시 항주에는 야간에 승객을 태워 강을 건네주는 선박이 있었다. 한밤중에 100리를 가는데 남녀가 뒤섞여 건넜다. 남녀 승객이 머무는 칸 사이에는 판자 하나가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인화(仁和)현(縣)1)에 풍류를 즐긴다고 자처하는 장(張) 씨 성을 가진 경망스러운 소년이 있었다. 어느 날 밤, 소년이 배를 타고 부양(富陽)으로 가고 있었다. 옆 칸에서 자신에게 웃는 듯 마는 듯 주시하는 여인이 있었다.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게 아니면 뭐겠는가. 밤 12시 경이 되어 승객 대부분이 잠을 청할 때였다. 장 씨 소년은 판자 너머에서 자신의 하체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소년은 기뻐 아예 양물을 꺼내 어루만질 수 있게 하였다. 손을 뻗어 상대를 만졌다. 여인이 틀림없지 않은가. 몸을 일으켜 상대를 덮쳤다. 아무 말도 건네지 않은 채 운우의 정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닭
한자어 ‘걸개(乞丐)’의 여러 명칭을 보면 거지의 본래 뜻은, 재물을 동냥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극빈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동냥하는 사람이 극빈자가 아닌 경우도 있었다. 부자도 기꺼이 빌어먹었다. 예를 하나 들면 이렇다. 청나라 때에 상해(上海) 가정(嘉定)현 남쪽에 유명한 사찰 명칭에 따라 이름 붙여진 남상진(南翔鎭)이 있었다. 진의 동쪽에 큰 부자라고는 할 수 없어도 넉넉한 토지와 부동산을 가진, 그리 부족함이 없는 중산층 가정이 있었다. 자식과 며느리도 있어 생활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도 홀연히 집을 떠나 거지가 되었다. 집안사람들이 그를 강제로 집에 끌고 가서 애걸복걸하며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그의 족제의 집안도 부유하여 그에게 100묘(畝)의 전지를 주겠다고 하였다. 그가 가진 전지도 2경(頃, 약 2만여 평)이 넘으니 100묘를 더한다면 의식주에 걱정이 없었지만 그는 한사코 응하지 않았다. 부모도 외아들인 그에게 사정사정했다. 그는 부모에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 천하에 거지가 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저는 정말로 사해를 집으로 삼아 빌어먹으며 살기를 원합니다. 이미 제게는 아들이 있습니다. 두 분께서는 손자를 곁에 두고
옛 한어(漢語)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인 단음사(單音詞), 즉 한 글자가 한 단어가 되는 경우가 많아 지극히 간략하였다. 거지의 뜻인 ‘걸개’를 ‘개(丐)’라고만 부른 고대 문헌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하급 관노, 머슴, 거지〔개(丐)〕 모두 부모의 무덤에 가서 성묘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거지〔개(丐)〕 무리가 에워싸 절하며 구걸하였다”1)라고 했는데 거지를 ‘개(丐)’ 한 글자로 표현하였다. 현대 한어뿐 아니라 청나라 말기 이전에 거지에 대한 호칭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 책에는 ‘걸인(乞人)’이라는 호칭을 쓰기도 하였다. “발로 차면서 주면 걸인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음력 11월에 걸인을 만나면 저고리를 벗고 그와 함께 하였다”, “만승의 주인은 길 위의 걸인을 구하였으나 얻지 못했다”2)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어떤 책에는 ‘걸아(乞兒)’라고 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범(范) 씨 문도가 길에서 걸아, 마의(馬醫)를 만나면 모욕을 주지 않았다”, “육장 옆에 파리매 모여들어 우레처럼 시끄럽고 걸아들이 다투어 짊어지고 사그라진 재로 향하네", “패루(牌樓) 높이가 20장 … 밑에 걸아 수백이 거처한다”3)라는 구절이 보
거지는 ‘남에게 빌어먹는 사람’이다. 한자어 개걸(丐乞), 걸인(乞人), 걸개(乞丐), 유개(流丐), 유걸(流乞), 화자(花子, 化子)가 같은 말이다. ‘거지’의 옛말인 ‘것 ㅸㅏ Δㅣ’는 15세기 문헌부터 나타난다고 한다. ‘거지’는 한자인 ‘걸(乞)’과 ‘어치’가 결합한 말로 ‘거러치’, ‘거러지’, ‘거어지’로 변했다1)고 해석하기도 한다. ‘빌어먹다’는 ‘돈이나 곡식, 물건 따위를 거저 달라고 빌다’ 뜻이다. 같은 말은 ‘구걸(求乞)하다’, ‘걸식(乞食)하다’, ‘동냥하다’이다. ‘동냥’은 ‘동령(動鈴)’이라는 불교용어에서 왔다. 동령은 번뇌를 깨뜨리고 불심을 강하게 일으키기 위해 흔드는 도구다. 여러 불교의식은 물론 스님이 걸식 수행의 한 방편으로 탁발하는 과정에서도 흔들었다. 이 동령이라는 말에 ‘거지 등이 구걸하는 행위, 또는 그렇게 해서 얻은 물건’이라는 속된 의미가 결부되었다. ‘동녕’을 거쳐 ‘동냥’이 됐다는 해석이다. 빌어먹는 사람의 상황이나 방법은 여러 가지가 뒤엉키어 복잡하다. 임시방편으로 시장 거리나 가게, 골목에서 구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장기적으로 걸식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거지 신분으로 구걸은 하지 않고 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