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괴는 항상 두 가지 물건을 지니고 다닌다. 이는 도교 미술에서 그를 구별하는 핵심 코드다. 하나는 ‘철지팡이(鐵拐)’이다. 무거운 철로 만든 지팡이로 ‘이철괴’라는 이름 자체가 ‘철지팡이를 짚은 이 씨’라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호리병(寶葫蘆)’이다. 모든 병을 고치는 신비한 영약이 들어 있는데 밤에는 이 호리병이 커져서 그 안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는 전설이 있다. 이철괴는 팔선 중에서도 유독 중국 민중에게 인기가 많았다. 약자와 소외계층의 수호신이기에 그랬다. 거지의 형상을 하고 있기에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신선으로 추앙받았다. 이철괴는 겉은 추하고 비루한 거지일지라도 그 내면은 신선(진리)일 수 있다는 가르침을 준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중국 민중의 철학이 담겨 있다. 거지는 단순히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빈틈을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거울이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철괴의 전설처럼 겉모습 너머의 본질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거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미래에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까? 관점을 바꿔야 한다. ‘개인의 실패’가 아닌 ‘시스템의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 과거에는 거
중국 고대 사회에서 ‘거지’〔걸개(乞丐)〕는 단순한 빈곤층을 넘어, 제국의 흥망성쇠를 비추는 거울이자 독특한 하류 문화를 형성했던 존재였다. 중국 거지의 역사는 단순한 빈곤의 기록이 아니라, 왕조의 흥망과 도시 경제의 발전, 그리고 종교적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시대별 흐름을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춘추전국부터 한나라까지는 초기 형성기라 할 수 있다. 생존을 위하여 구걸하였다. 초기에는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농토를 잃은 ‘유민(流民)’들이 일시적으로 구걸하는 형태였다. 오(吳)나라의 오자서(伍子胥)가 복수하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시장에서 퉁소를 불며 구걸했다는 설화가 이 시기 거지의 전형적인 ‘고난’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한나라 때에 수도인 장안 등에 고정적인 빈민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둘째, 당나라 때의 불교의 영향으로 종교와 복지가 결합하였다. 불교가 국교 수준으로 숭상되면서 ‘보시(자선)’ 문화가 정착했다. 사찰 주변에 거주하며 시주를 받는 거지가 급증했다. 국가 차원에서 최초의 구휼기관 ‘병방(病坊)’ 등 빈민과 병자를 수용하는 기관을 운영하여 거지를 제도권 안에서 관리하려고 했다. 셋째, 송나라 때에는 거지가 조직화 되고 직업화 되었다. 송나라에
다른 사례도 있다. 중국 북방의 어떤 지역의 주민들은 ‘기근으로 살 던 곳을 떠나 구걸한다’는 말을 대단히 금기시한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말만 듣고도 얼굴빛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다른 지역에서 구걸하러 온 사람에게는 성심성의껏 접대한다. 마치 제집에 돌아온 것 같이 마음 편하게 대접한다. 그곳에 거주하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은 모두 기근을 피하여 구걸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지에게 성대하게 대접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에 속했다. 현지사람처럼 똑 같이 대하기도 한다. 살아갈 만 하다는 듯이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자기 집처럼 농가 안으로 들어선다. 아무 것도 개의치 않는 듯이 큰 쌀 포대를 들고 주인에게 “돈 좀 버셨나요?”, “수확은 좋아요?”와 같은 길한 말을 건넨다. 인사를 나누는 셈이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땅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말아 피우면서 주인의 ‘도움’을 기다린다. 주인은 웃으며 맞이하면서 불을 피우고 밥을 한다. 밥이 다 되면 한 가족을 돌보듯이 그릇과 접시를 나무 쟁반에 올려놓고 부엌 가운데에 차려서는 편안하게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해준다. 식사가 끝나면 진한 전차 한 사발을 마시게 하고 잎담배를 피운 후
중국민족의 저열한 근성의 상당 부분은 불량배(건달, 부랑자) 근성에 있다. 근대에 원세개(袁世凱)는 군주제를 회복시키려고 여론을 조장하였다. 민의를 유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였다. “민의가 군주제에 있다는 것을 꾸미려고 하였다.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은 여자 청원단체가 부족하면 창기 청원단체를 만들었고 국민 청원이 부족하면 거지 청원단체를 만들었다.” 그것은 당시 원세개의 졸개 양(楊)모씨가 꾸며낸 익살극이었다. 그는 거지 두목에게는 100원을, 일반 거지에게는 1원을 대가로 주고 3일 동안 만여 명의 거지를 모은 후 원세개에게 황제에 오르라는 청원을 하였다. 당시 여러 청원서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서명하였다. 원세개도 거지 청원서에 앞쪽에 서명한 10명의 이름을 비밀 수첩에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비서에게 전체 이름을 베껴 쓰게 한 후 비서실 탁자 위에 올려놓고서 ‘훗날 은혜를 베풀려고 준비하였다.’ 나중에 주모자인 양 모씨가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내 그 거사는 고거육(顧巨六)이 운동한 기녀 청원단체보다도 백배가 많았소. 황상의 말과 표정을 살펴보니 기녀들은 성의 없이 아첨하니 거의 무시하는 것에 가까웠소. 그런데 거지들은 공민과 같은 계열
송대 위경지(魏慶之)가 편찬한 『시인옥설(詩人玉屑)』 10권 「한걸(寒乞)·걸아상(乞兒相)」에 「만수시화(漫叟詩話)」가 수록돼 있다. “강위(江爲)가 시로 읊었다. ‘사찰의 단향목 누각에 올라 시를 읊고 귀족의 대모로 장식한 자리에서 취했네.’ 어떤 사람이 ‘집안에 있는 축장 곡보에 있는 글자 모두 금도금했고 정원의 화초수목의 표기도 옥을 재료로 하고 위에 전자로 썼다’(거지의 모습이다, 부귀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라고 평하며 거지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였다. 호자(胡仔)가 ‘『청상잡기(靑箱雜記)』에도 그 일이 쓰여 있다’고 말했다.” 안원헌(晏元獻)이 말했다. “이 시는 거지 형상이다(궁색한 형상이라는 의미). 그래서 말했다. ‘부귀를 얘기하면서도 금옥이나 비단에 놓은 수는 언급하지 않는다. 오로지 기상을 말할 뿐이다.’ ‘누대 가장자리에 버드나무 뻗어있고 발 가운데에 제비 날아가네.’ ‘배꽃이 정원에 떨어지고 교교한 달, 버들개지 연못에 담담한 바람’의 부류가 그것이다. 공이 말했다 : 가난한 집안에 이런 풍경이 있는가? 『운재광록(雲齋廣錄)』에 근래 시인의 시 한 련이 수록돼 있다. ‘주렴과 수놓은 창문에 느릿느릿한 해, 버들개지와 배꽃에
『금병매사화』 제60회 ‘이병아(李甁兒)가 우울증으로 병을 앓자 서문경(西門慶)이 바로 비단이불을 깔다’에서 서문경이 여러 사람에게 술자리를 마련하라고 명하자 응백작(應伯爵)이 빙빙 돌려서 말했다. “성급하게 달려오는 남자애, 왼손엔 콩 바구니 들고 오른손엔 면화 마대를 들고 오로지 앞을 향하여 뛰어가다 황백 얼룩개와 부딪쳤다.……어느 손으로 개를 막아야할지, 개는 어느 손을 물어야 할지 몰랐다!” 말을 마치자 서문경이 웃으며 욕했다. “너 이 도둑놈, 헛소리로 창자를 끊어놓으려고. 뒈질 놈! 어느 누가 한 손으로 개와 싸운다는 말이냐? 개에게 한 입에 물릴 텐데?” 응백작이 변명하였다. “누가 몽둥이 들고 다지지 말라 그랬나요! 나는 지금처럼 거지가 성난 개를 막을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지 못했소.” 그때 같은 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즐기고 있던 사희대(謝希大)가 말했다. “나리, 화자(花子)를 보세요, 자기 집이 비참한 꼴이 되었잖아요, 그를 거지라 그러잖아요.” 응백작은 ‘응화자’라는 별명이 있었다. ‘화자(花子)’는 물론 거지다. 이 말에 대한 실마리를 찾으려면 청대 ‘몽필생(夢筆生)’이 『금병매』 속작으로 쓴 『금옥몽』을 보면 된다. 당시 서문
빈자(貧者)가 말했다. “응응. 주인에게 쫓겨나게 되니 말이 많아지고 비웃음 사게 됐구려. 마음에 품은 바를 다 말하려 하오. 옛날에 내게도 조상이 있었소. 현명한 덕을 숭상하여 요임금을 보좌할 수 있었고 법칙 준수를 맹세하였소. 흙 계단 초가집, 조각도 장식도 없는 곳에서 살았소. 말세에 방종해지고 혼미하게 되었소. 탐욕스러운 무리가 많아지고 가난한 자가 부귀를 쉽게 얻게 되었소. 우리 조상을 경시하며 오만하고 방자하게 굴었소. 으리으리한 누각, 화려한 집을 드높이고 술이 흐르는 연못에서 고기를 쌓아 안주 하였소. 홍곡과 같이 높이 날아 멀리 떠나서 그 조정에 처하지 않았소. 내 몸을 세 번 반성하기에 나는 잘못이 없다 말할 수 있소. 당신의 집에 살았던 게 태산 같은 복이었소. 내 큰 덕은 잊고 내 작은 빈한함만 생각하는 게요. 추위와 더위를 이겨낼 수 있는 습관을 만들 수 있었고, 추위와 더위에 잘못되지 않으니 신선처럼 장수할 수 있었소. 하걸, 도척이 주의하지 않고 무뢰배들이 무례한 짓을 하지 않았소. 모든 사람이 층층이 쌓인 곳에서 살았지만 당신은 홀로 탁 트인 곳에서 살 수 있었소. 모든 사람이 근심걱정 했지만 당신 홀로 우려하지 않았소.” 말을
요 몇 년 사이에 민속학이 중국 인문과학계에 새로 각광을 받고 있다. “문학은 사실과 영혼이 서로 부합한 이후의 재현이다”(Honoré de Balzac)라고 하기도 한다. 중국 대륙의 당대 거지 조사 중에 당대 거지의 구걸, 축하, 욕, 오락에 대한 가요(歌謠)를 주의해 수집하면서 “거지 가요는 인류사에서 거지가 생긴 이래 존재하고 전해져 내려오며 발전한 것이다”1) 라고 생각한다. 거지 노래는 이렇다. “선의는 복을 받고 악의는 귀신이 용서하지 않는다네. 부처를 믿으면 착한 일하고, 내가 가난뱅이라는 것을 불쌍히 여기네. 많은 돈을 바라지 않소, 오 푼이면 되오. 당신이 내게 돈을 주면 하늘이 평안하게 보우할 것이외다.” 이것은 남경 계명사(雞鳴寺) 부근에서 ‘무릎 꿇고 앉아서 구걸하는’ 거지들의 노래다. 기도하러 사찰에 가는 사람의 감사를 드리는 마음에 맞추면서 부처를 빌어 구걸하고 있다. “대나무 판을 치면서 거리에 왔네요, 한 길 두 곁채 장사 잘 되네요. 황금 글씨 은 간판, 동쪽에서 줍고 서쪽에서 당기 듯 걸려있네요. 요 며칠 내가 오지 않으니, 상점 주인이 부자 됐다 하네요. 주인이 부자 되면 나도 덕을 보고, 당신은 교자를 먹고 나는 탕을 마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중국 대륙의 연해 도시에 외국인 거지가 등장한 적이 있었다. 역사 기록은 이렇다. “상해에는 거지가 많다. 여러 성에서 온 거지다. 빈곤한 집안 자식들이 생계를 유지하려고 상해에 왔으나 생계를 이루지 못하여 거지로 전락하였다. 외국인 거지도 있다. 모두 상해로 모여들었다. 능력이 박약한 자나 행동거지가 단정치 못한 자가 결국 그런 지경에 빠진 것이다. 서양인에게 구걸할 뿐만 아니라 화려한 저택을 가진 중국인에게도 다가가 구걸한다. 오랫동안 꿇어앉아 구걸하였다. 외국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습성이 된 나는 파란 눈동자에 금색 머리를 한 거지를 보기만 하면 아무런 인색함 없이 은화를 던져주었다. 보통 거지에게 한 푼 주는 것이 애석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보산로(寶山路)에 성모 예배소가 세운 여학교가 있다. 작은 키에 둥글고 납작한 얼굴, 높은 코, 파란 눈의 여학생이 있다. 서양 옷을 입어도 밉지가 않다. 아침저녁으로 책을 끼고 왔다 갔다 하는데 그 부모는 보흥로 거리에 있는 집에 산다. 여학생의 얼굴과 무척 닮은 거지 부친은 영국인으로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중국에 오래 살았다. 함풍, 동치시기에 미국인 워드(Frederick T
역사학자 여영시(余英時)는 8편의 논문을 종합하여 『사(士)와 중국문화』를 편찬하였다. 비교적 계통적이며 깊이 있게 역사상 ‘사(士)’ 계층과 중국문화의 관계를 해부하였다. 중국역사상 ‘거지’는 사회단체다. 하층사회 중에서도 작은 층면에 불과하다. ‘사(士)’처럼 중국민족문화 구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더라도 거지 현상은 난감한 사회문제 중 하나다. ‘거지문화’는 비정상적인 변태문화이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다. 이 ‘거지’ 문제는 이전에는 사람들에게 그리 주의를 받지 못했다. 당대에 와서 거지의 직업화가 갈수록 현저해지고 거지 현상이 사회 치안에 해를 끼치면서 관련된 분야와 언론계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다음 몇 가지 보도를 먼저 보자. 1985년, 광주(廣州)시에 거지 12,662명이 있다. 1987년, 광동(廣東)성에서 유랑하며 걸식하는 사람 29,600명을 수용하고 심사 후 783명이 살인, 강도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색출해 냈다. 1986년, 주해(珠海)시가 유랑하며 걸식하는 사람을 수용한 숫자가 1979년보다 10배나 많아졌다. 1986년, 하얼빈(哈尔滨) 철도 공안부에서 적발해 체포한 각종 형사사건 범죄자 중 30%
민간전설 중에 사람들은 현실생활에서 먹기만 하고 일은 하지 않는 거지와 ‘신선 거지 철괴리’를 연결시켜 ‘신선 거지’가 ‘사람 거지’를 교육했다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전하는 바는 이렇다 : 옛날에 젊은 거지가 한 명 있었다. 먹기만 하고 일은 하지 않았고 도박에 빠져 있었다. 조부가 남겨준 재산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탕진하여 돌아갈 집이 없게 되었다.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밤에는 철괴리의 사당에서 잠을 잤다. 젊은 거지가 먹을 것이 없어 아사하기 직전에 철괴리에게 보우를 기도하자 철괴리의 신력에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도 젊은 거지는 나쁜 습관을 고치지 못했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던가, 욕망은 한이 없었다. 신선이 되어 한가롭게 노닐 꿈만 꾸었다. 결국 철괴리는 시 네 구절을 읊어주며 가르침을 주었다. “네게 원보를 준들 긁어모으는 데에 게으르고, 관리가 되게 한들 조정에 나가는 데에 나태하구나. 사지를 쓸 노력은 하지 않고 공상에 빠져 있으니, 그저 걸식하면서 쪽박이나 품고 있는 게지.” 나무 우리에 앉아 동냥하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걸하는 행각도사와 의술을 행하고 약을 팔거나 길흉을 점치며 돌아다니는 도사 이외에 이른바 ‘좌관(坐罐)’하며 동냥하는 도
이제, 도교에 대하여 알아보자. 고대 무술(巫術), 진한(秦漢)시대 신선방술에서 기원하고 있는 도교는 중국 본토에서 생겨난 고유의 종교다. 재미있는 것은 도교도 수행하고 고행하면서 도를 얻는 방법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탁발과 유사한 구걸을 중히 여긴다. 민간문화 중 도교 전설 속 신비로운 인물의 형상은 대부분 청빈하고 걸식하는 거지 형상을 갖추고 있다. 심지어 거지인 채로 직접 출현하기도 한다. 구처기(丘處機)와 증구절(蒸九節) 금(金)대의 유명한 도사, 도교 전진교 북칠전(北七傳) 중의 한 명이 구처기(丘處機)이다. 19세 때에 영해(寧海) 곤유산(昆崳山, 현재 산동 모평(牟平) 동남쪽)에서 출가해 왕중양을 스승으로 모셨다. 금대 세종 대정(大定) 14년(1174)에 걸식하며 살았고 도롱이 하나만 걸치고 다녀 ‘사의(蓑衣)선생’이라 불렸다. 나중에 농주(隴州) 용문(龍門)산에 은거하며 수도하여 용문파의 창시자가 되었다. 원 왕조가 들어선 후 원 태조가 구처기에게 ‘나라를 다스릴 방도’를 묻자 경천애인을 근본으로 삼으라 하였고 ‘장수하는 도리’를 묻자 청심과욕이 요체라고 말했다. 원 태조는 그 말을 깊이 믿어 ‘신선’이라는 호를 내리는 한편 ‘대종사’의 작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