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재물에서 앞에 소개했던 박종실, 강성익, 황순하, 최원순, 이윤희, 최윤순, 김근시 등은 근대 제주경제의 토대를 형성한 대표적인 제주지역 기업가들이다. 이와 함께 대정과 서귀포지역에서 선구적인 기업가 활동을 했던 김임길(金壬吉)과 이도일(李道一)을 소개하고자 한다. 김임길은 1930년 9월 4일 대정면 하모리에 ‘협창상회(協昌商會)’를 등기 설립하여 해륙산물(海陸産物) 매매 및 일용잡화 판매를 시작하였으며 이도일은 1930년 우면 서귀리에 해륙산물 매매 및 일용잡화 판매 등을 취급하는 십일상회(十一商會)를 설립하여 활발한 기업가 활동을 했던 모범적인 제주 근대 기업가이다. 대정면에서는 1917년 10월 22일 대정면 하모리 72번지에 ‘김기수상점(金基洙商店)’이 등기되어 잡화판매 영업을 시작하였고(朝鮮總督府官報 32-429, 10. 29), 1930년 9월 4일에는 대정면 하모리 772-1번지에 ‘협창상회(協昌商會)’가 등기되어 해륙산물 매매 및 일용잡화를 판매했다(朝鮮總督府官報 87-594, 10. 9). 같은 해 11월 13일에는 대정면 하모리 1046-7번지에서 ‘영흥상회
▲ 1930년대 관덕정앞 오일장. 다음날 우리 삼인(三人)은 마침 열리는 시장(市場)에 나아갓다. 우리는 이상(異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면 아모 것이나 물어보고 싶엇다. 그러나 그들 농촌부녀(農村婦女)들은 우리의 묻는 말에 대답(對答)하려고도 안햇다. 나종에야 알엇지만 제주(濟州)에서 보통(普通)쓰고 잇다는 수병(水甁)을 가르치며 그 용도(用途)와 가격(價格)을 물엇드니 그는 대답(對答)은 물론(勿論) 본체도 안는다. 마치 사지도 안흘 것들이 무슨 “히야까시”냐 하는 태도(態度)엇다. 알려고 하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냉담(冷淡)하엿고 저윽이 반감(反感)비슷한 감정(感情)을 도발(挑發)한 것도 사실(事實)이다. 헐 수 없이 거름을 옴기어 계란(鷄卵)파는 부녀(婦女)의 곁에로 갓다. 한 개(個)의 값을 물엇을 때, 그는 “사꾸과?”하는 소리를 친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무슨 책망(責望)을 들은 듯 머니 선노라니 곁에 섯든 “노파(老婆)”가 그것을 친절(親切)히 통역(通譯)하여준다. 그는 육지(陸地)에 다녀온 듯한 노파(老婆)엇다. “사겟느냐?”는 말이다. 우리는 사겟다고 하는
▲ 서당 훈장과 학동들 [사진=제주도청] 본도는 대륙과 원격(遠隔)하야 문물을 옴 길 기회가 적엇스나 유교(儒敎)의 왕성(旺盛)과 지사(志士)의 본도로 교육이 광포(廣布)되엿는 바 타지방에 비하면 독서문필(讀書文筆)이 보급되엿다고 할 수 잇다. 근자 기미운동(己未運動) 이후 경향(京鄕)을 물론하고 교육열이 치성(熾盛)하엿슬때 부터 촌촌각리(村村各里)에 개량서당(改良西堂)을 설치 아니 한곳이 무(無)하엿다. 그러나 현하(現下) 중학기관(中學機關)으로 완전한 것이 일개도 무히야 일반 도민의 한탄불기(恨歎不己)하는 바이나 교육보급상황은 타지방에 후(後)하엿다 아니할 만큼 발달되야 타지방 유학생(留學生)이 수백명에 달한다(동아일보 1926년 10월 27일). 1925년 제주지역 보통학교 졸업자수는 남자 5262인 여자 1208, 중학교 졸업자는 남자 403명 여자 20명, 대학교와 전문학교 졸업자는 30명, 서당수업 2만2000명으로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았다. 1936년 기준으로 각종학교는 공립소학교 5개소, 공립보통학교 14개소, 간이학교 4개소, 공립실업 보습학교 1개소, 사립학교 4개소, 사립유치원 2개소, 공립실업학교 1개소, 서당 69개소였고 1939년
바다의 조선명소로 제주도 등장 명미(明媚)의 다도(多島)와 탐라(耽羅)의 고국(古國) 철도국(鐵道局)서 관광을 선전 삼신산의 하나로 유명한 영주산(瀛洲山)이란 탐라고국 제주도(耽羅古國 濟州島)를 조선의 새로운 관광지로서 인식하게 되어 철도국에서는 제주도 관광의 연락활인(聯絡割引)을 사월일일부터 하기로 결정하야 근간 그 관광일정 여비 등을 발표하기로 되엇다. 이리하야 새로운 관광명소로서 소개될 제주도는 구화산구(舊火山口)를 둘러 폭포 삼림 등이 선창으로부터 일반 관객의 눈에 명미하게 비칠 터이고 제주로 가는 연해의 다도해 풍경이야말로 새로 해중 조선의 맛을 일반이 새삼스럽게 맛보게 되리라 한다(동아일보 1935년 3월 2일). 서울서 산 표 한 장으로 해녀(海女)의 나라에! 철도(鐵道)와 제주도간 교통편리 오는 사월일일부터 조선기선의 목포 제주도(목포 제주도)간의 항로와 철도국선의 좌기 각 역간의 려객급 수하물의 련대 수송이 개시되기로 되엇는데 이로써 경성정거장에서 “제주도 차표 주시오”소리를 할 수 잇게 되엇고 또 표 한번 사면 다른 번잡이 없게 되어 퍽 편리케 되엇다. 호남선과 광주선 각역, 경성, 용산, 영등포, 수원, 천안, 조치
본도(本島)는 교통불편(交通不便)의 관계상(關係上) 자연 상업도 미비부진(微微不振)하더니 근래(近來) 해륙교통기관(海陸交通機關)이 완비(完備)와 대판직항로(大阪直航路)가 개통(開通)된 이래(以來) 제주성내(濟州城內)를 중심(中心)으로 각지(各地)에 상업(商業)이 점차 은성(漸次 殷盛)하야 활기(活氣)를 정(呈)하고 남선(南鮮)의 유수(有數)한 상업지대(商業地帶)로 굴지(屈指)케 되엿다. 이출품(利出品)은 수산물(水産物)을 위주(爲主)로 면화(棉花) 관물(冠物) 추용(椎茸) 우피(牛皮) 양말등(洋襪等)인바 연액(年額) 백만원 내외에 달(達)하며 이입품(移入品)은 백미(白米) 맥분(麥粉) 면사포(綿紗布) 인촌(燐寸) 석유 기타 잡화 등인바 연액(年額)이 역백만원(亦百萬圓)에 달(達)한다고 한다(동아일보 1926년 10월 27일). 1915년 정미(精米) 1석(石)의 가격은 경성지역에서는 상 12.68엔, 중 12.19엔, 하 11.67엔이며 목포에서는 상 12.35엔, 중 12.04엔, 하 11.60엔으로 제주도는 이보다 30% 정도 비쌌다. 이는 제주도의 쌀(水稻) 생산량이 아주 적어 그 대부분을 타 지역으로부터 수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18년 정미 1
▲ 사라봉 쪽에서 찍은 제주읍의 전경.[사진=제주도청] 일반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의 건강상태와 영양상태를 살펴보는 적절한 자료로 신장, 체중, 흉위 등에 대한 조사가 주로 활용된다.1930년대 중반 제주지역과 서귀포지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루어진 신체검사 기록을 토대로 당시 제주도민들의 건강상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기록은 제주읍 9016호 중 600호, 서귀읍 400호 총 1000호를 대상으로 하여 7,8,12,13,14,18,19,21세에 해당하는 제주읍 남녀 502명, 서귀면 248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1930년대 조선인 남자 성년의 평균신장은 160~165cm, 여자의 경우 148~1499cm였다. 나이를 19세 이상으로 보고 제주도와 비교해 보면 제주읍인 경우 남녀 모두 평균 이상이다. 서귀포 19세 남자만 평균에 미달한 것으로 나타난다. 19세 이상 제주읍 남녀 모두 표준치 보다 앞선다. 1937년 기준으로 19세이면 1918년 출생인구로 생활수준의 변화가 영양상태에 반영되었을 나이이다. 제주시 12세 남자의 수치는 주변 나이와 비교하여 보았을 때 오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제주읍의 경우 19세의 연령층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신장이
일반적으로 당시 생활수준을 측정하기 위해 가장 먼저 살펴보는 것이 상식물(常食物) 현황이다. 어떤 식품을 어느 정도 먹었느냐는 그 가정의 경제상태, 개인의 건강, 영양상태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식국가(米食國家)였지만 제주도는 농업특성상 보리, 조, 피 등 전작물(田作物)을 상식(常食)으로 하고 이에 육류, 어류들을 추가 섭취했다. 당시 제주지역의 영양섭취는 지역, 지역과 경제수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조, 보리를 주식으로 했고 육류, 어류 등과 같은 부식물의 섭취는 비정기적으로 특별한 날에만 섭취했다. 물론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중산간마을이 경제적으로 나아 보이며 산촌이 가장 열악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절적으로는 겨울이 가장 곤궁(困窮)한 시기로 식사횟수가 2회로 줄고 내용물도 밥 대신 죽으로 대체된다. 소채류 중심의 부식이 주를 이루며 겨울, 산간마을과 같이 경제적 상황이 어려운 경우 피밥을 상용(常用)하며, 식사횟수 역시 2회로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식사횟수가 2회로 줄어든 것은 중산간마을이나 해안마을도 마찬가지다. 이 같은 상식(常食) 외로 가족의 경제상황에 따라 평소보다 특별히 더 먹는 날이
공업(工業)은 아직 유치(幼稚)하야 목하 자급자족(目下 自給自足)의 역(域)을 탈(脫)치 못하엿스나 농한기(農閑期)를 이용(利用)하야 가정공업(家庭工業)으로 소규모(小規模)의 주조(鑄造) 조선즐관물(朝鮮櫛冠物) 모자(毛子) 양태(涼太) 암건(岩巾) 탕건(宕巾) 망건(網巾)등(等)을 제조(製造)하며 근래 관힐(瓘詰) 패구(貝釦) 양말(洋襪) 주류(酒類) 조면등(繰綿等)의 공장(工場)도 설치(設置)되여 그 산액(産額)도 불소(不少)하야 본도 공업계(工業界)의 신기원(新紀元)을 작(作)하엿다(동아일보 1926년 10월27일). 일제강점기 지역자본에 의한 민족적 제주경제를 견인했던 제주근대 기업가로 앞서 소개했던 박종실, 강성익, 황순하, 최원순, 이윤희 외에 최윤순과 김근시의 기업활동과 경영활동 역시 모범적이라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김근시(金根蓍)는 제주지역의 면화매매 및 가공업 발전에 기여했으며 면화가공․판매업을 중심으로 해운업, 운송업, 소주제조업 등 여러 업종에서 제주기업가로서 활동하였다. 최윤순(崔允淳)은 해운업, 면화가공․판매업, 자동차운송업, 소주제조업, 어업운반업, 목재업 등 다양한 부문에서 기업활동
그들은 이러한 노동은 물론 저 험(險)하고 박(薄)한 자연을 상대로 싸워가며 영위하는 그들의 원시적 자족적경제(自足的經濟)에서 나오는 “부득기(不得己)"한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저러한 노동을 하지 안코서는 저 소박한 원시적 생활조차도 할 수 없으리 만치 그들의 노동은 너무나 과하고 너무나 무거울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즉도 노동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역사적 조건은 없섯든 것이다. 인류가 원래 가젓섯고 또 장래에 반드시 가지리라는 저러한 순진한 노동생활을 우리는 불완전하나마 그들의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잇는 것이다. 다만 그들의 저러한 노동생활에 시민적왜곡(市民的歪曲)과 사위(邪僞)가 석기지 안은 채로 그들의 생활이 문화적으로 향상될 수 잇다면 하는 기원(祈願)을 마지 안는다. 지금의 그것은 비록 순진하나마 너무나 원시적이고 너무나 비문화적(非文化的)인 까닭이다 그들의 “노동”은 너무나 과(過)하고 그들의 영양(榮養)은 너무나 조박(粗朴)하며 그들의 생활은 너무나 비문화적이다. 그들의 노동이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인류로서의 생활상 필요한 노동의 형태로서 향상된다면 그 얼마나 다행이랴!(동아일보 19
1960년대 후반, 즉 감귤농사가 보편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제주지역에서 단순히 땅을 많이 가진 것만으로는 그리 유세할 거리가 못되었다. 오히려 ‘땅부자 일부자’라고 땅 많은 집에 시집가는 새색시를 보며 ‘시집가서 소처럼 일만 하겠네’ 라며 안타까워했다. 제주도의 전통농업은 낮은 토지생산성을 노동생산성(특히 여성노동의 강화)으로 충당하는 조방적 농업방식이었다. 즉, 화학비료와 제초제가 나오기 전에는 제주지역 농지 대부분이 토질이 안 좋았고 검질(잡초)이 많아 농사는 그야 말로 ‘검질과의 전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며느리에게는 잡초가 많은 진밭을 주고 딸에게는 잡초가 덜한 뜬밭을 준다고 했다. 제주농가에서는 땅의 크기가 아니라 논(水田)과 촐왓(茅田)를 포함하여 5가지 형태의 토지를 골고루 소유하고 있어야 진정한 땅부자로 인정받았다. ▲ 지세명기장 본문 일제강점기 제주지역 농어촌 마을에서는 어느 정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을까. 일제강점기 과세의 기준이 되었던『地稅名寄帳』을 기초자료로 하여 일제강점기 제주지역 농어민들의 토지 소유 면적과 지가(地價)을 살펴 볼 수 있다. 이 글
올해가 세계자연유산 거문오름 국제트레킹 10주년인 걸로 보아 벌써 10년 전 일이다. 거문오름 트레킹 첫해 첫날, 지금은 군대 간 아들과 거문오름 갔다가 우연찮게 귀인(貴人)을 만났다. 거문오름 옆 백하마을에서 태어나 거문오름에서 생활한 적도 있으신 이○○할머니(당시 81세)를 만난 것이다. ▲ 거문오름 숯가마 이 할머니는 1940년부터 1960년말까지 거문오름에서 소와 말을 키우며 농사도 짓고, 숯을 구어 팔고 양애, 드릅, 늘굽 등을 경작하며 살았다. 이할머니가 ‘우리오름’ 이라고 부르는 거문오름에는 사람들이 거주하던 움막터(농사나 숯을 구울 때, 소나 말을 방목했을 때 임시 거처지), 화전민 거주터, 종가시나무와 붉가시나무 등으로 숯을 구었던 숯가마터(돌가마)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할머니가 이 오름에서 농사짓고 숯을 굽게 된 것은 1940년경 이할머니 시아버지가 현금 100만원을 주고 이 거문오름을 산 뒤 부터이다. 1960년대 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 거문오름 소유가 몇 번의 재판과정을 거친 뒤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때 까지 이할머니는 숯을 구어 성안에 가서 숯 10가마니에 좁쌀 서말 받고 팔아 생활하였다고 한다.
▲ 산지항 개발 이전 산지포 부근(사진으로 보는 제주 100년) 제주도의 가장 오래된 항구는 건입포(建入浦)로 산지천이 바다로 유입되는 산지천 하류 일대로 추정된다. 기원전 100년~기원후 500년경부터 건입포가 제주와 육지를 잇는 입출항 포구(浦口)로서 외부와의 교역에 이용되었다. 제주에서 처음으로 항구가 건설된 것은 1735년 김정 목사가 부역으로 산지항 방파제 80간(間)과 내제(內堤)를 쌓은 것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산지항 항만 개발이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 산지항 개발 이전 산지포 부근(사진으로 보는 제주 100년) 제주도 산지항(濟州島 山池港)은 암초(暗礁)가 만코 수심(水深)이 천(淺)할뿐 아니라 방파(防派)할만 곳이 업슴으로 풍랑(風浪)만 심(甚)하면 선박(船舶)의 출입(出入)이 도저(到底)히 불가능(不可能)하야 지방발전(地方發展)에 막대(莫大)한 지장(支障)이 됨으로 일반(一般)은 차(此)를 유감(遺憾)으로 사(思)하던바 당국자(當局者)의 진력(盡力)으로 래칠월초순(來七月初旬)부터 삼개월(三個月)의 기간(期間)과 삼천만원(三千萬圓)의 예산(豫算)으로 일만칠천여평(一萬七千餘坪)이나 매립(埋立)하고 일백육십간(一百六十間)이나 되는 방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