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회의 ‘근대’ 학계의 일치된 견해는 아니지만 한국사회에서 근대는 1876년 개항으로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는 시기를 말한다(허수열, 1984). 이 견해를 따르자면, 제주사회의 근대는 개항 이후 1945년 해방까지를 포함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근대 제주의 시점은 이와 다르다. 한국사회에서 근대의 기점으로 삼고 있는 개항의 의미와 실제가 제주사회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사회의 실질적 개항은 1870년대 일본 잠수기업자들의 제주어장 침탈 때부터라고 보는 것이 맞다. 제주도민들은 중앙에서의 정치적 의미의 개항보다 일본 잠수기업자들의 ‘제주어장 침탈’이 개항을 피부로 느낀 실질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870년대 일본 잠수기업자들의 제주어장 침탈사건을 제주사회 ‘근대(近代)’의 기점(起點)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울러 1945년 해방을 현대의 기점으로 삼는 것 역시 제주사(濟州史) 서술에 적합하지 않다. ‘제주 4․3’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일본과 완벽히 단절되었던
1911년 6월 29일, ‘광주농공은행(光州農工銀行) 제주도지점(濟州島支店)’이 제주성내에 설치되었다. 제주지역 금융의 시초다. 이후 1918년, 제령(制令)에 의해 분리되어 있던 농공은행을 합병(合倂)하고 그 권리와 의무를 승계(承繼)하여 같은 해 10월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으로 새롭게 금융 업무를 시작했다. 이에 따라 조선식산은행 제주지점(濟州支店)이 광주농공은행 제주도지점으로부터 기존 일체의 영업 업무를 인수받고 제주지역의 일반금융 및 농업금융 업무를 개시하였다. ▲ 조선식산은행 제주지점 모슬포지소 건물, 대정읍 하모리, 고영철 사진 제주금융조합(濟州金融組合) 감사 급 평의원 중 김시진(金時晋) 문창숙(文昌淑) 강해진(姜海晋) 삼씨(三氏)의게 오월 중 전남 광주에서 개최된 전선금융조합연합회(全鮮金融組合聯合會)에서 포상금(褒賞金) 육십원 식(式)과 포상장(褒賞狀)을 수여(授與)하얏슴으로 본월 삼일 하오 일시에 제주금융조합(濟州金融組合)에서 동 수여식(授與式)을 개최(開催)하얏다더라(동아일보, 1922.07.13). 1912년 6월 29일에는 ‘제주금융조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설립된 지 20년이 됐다. 제주지역은 대기업이 드물고 제조업이 빈약한 반면 농수산업과 서비스업 비중이 절대적이라 모금과 기부 총량 측면에서 불리한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매년 사랑의 온도탑 목표를 초과 달성할 뿐 아니라 아너 소사이어티 모집, 나눔 리더 모집 등에서 단연 전국 톱이다. 이러한 기부문화의 확산과 생활화는 제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역대 회장, 처장, 사무처 직원들이 발바닥에 땀나게 뛰어다닌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제주도민의 DNA 속에서 계승되고 있는 나눔문화의 실천적 발로라고 생각된다. 많이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없거나 부족해서, 물질적으로 항상 어려운 생활을 경험해 봤기에 나누고 같이 하는 나눔 문화와 정서가 자연 발생한 것으로 보아진다. 일제 강점기만을 놓고 본다면, 초창기에는 주로 기반 조성, 즉 학교나 공설운동장, 마을회관, 공동우물 등이나 대참사에 대해 큰 부자는 아니나(?) 자산을 선뜻 기부하는 미거(美擧)를 자주 볼 수 있다. 전영준(田永晙)씨의 미거(美擧) 제주도에는 오륙년 전부터 각종의 운동이 무던히 발달되엿스나 공설운동장(公設運動場)이
▲ 김만덕 국가 표준영정 제82호(2010년 7월21일 지정)/윤여환교수 제작 ‘만덕(萬德)’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얼까? ‘만덕할망’, ‘기녀(妓女)’, ‘거상(巨商)’, ‘구휼(救恤)’, ‘금강산 유람’, ‘의녀반수(醫女班首)’, ‘은광연세(恩光衍世)’, ‘채재공 만덕전(菜濟恭 萬德傳)’ 등과 더불어 ‘고두심’, ‘이미연’, ‘김만덕상’, ‘김만덕기념사업회’, ‘김만덕기념관’, ‘나눔쌀 만섬 쌓기’, ‘객주터’ 등. 개인적으로는 고(故) 김영란과 신사임당이 떠오른다. 2010년 작고한 김영란은 제주자치도 여성특보 시절, 2009년 발행될 오만원권 도안에 김만덕 초상을 올리고자 그 당시 한국은행 제주본부 고은호 본부장과 제주지역 여성단체 등과 같이 나름 엄청나게 노력했다. 현재 오만권 도
2000년대 초 일이다. 서울대를 나와 일본 츠쿠바대학 대학원에서 체육학 박사과정을 다니던 연구원이 조사차 제주를 방문했다. 그 연구원의 관심사는 일제강점기 제주지역 마을 조기축구였다. 마을 조기축구를 통해 일제강점기 제주도민의 문화와 정서, 일제에 대한 항거와 무언의 표현 등을 살펴보고자 했다. ‘축구는 일제강점기 제주도민 모두를 하나로 뭉치게 하고 스스로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는 마을 공동체적 경기다’는 것이 그 연구원의 가설이다. 1925년 7월 21일 제주축구단이 조직되었다. 제주도에는 오육년 전부터 청년 소년단을 통하야 축구(蹴球)가 성행됨에 불구하고 청년 풋볼팀이 하나도 엄슴을 유감(遺憾)으로 사(思)한 사계(斯界)의 유지 이십여 명은 대표적 팀을 조직하야 축구시합에 응(應)하는 동시에 차(此)의 지도 발전을 목적하자고 지난 십이일 제주향교(濟州鄕校)서 제주축구단(濟州蹴球團)을 조직하엿다는데 동단(同團)에서는 창립 기념 제일회 사업으로 팔월 초순을 기(期)하야 청년축구대회(靑年蹴球大會)를 개최하리라(동아일보, 1925.07.25). 제주축구단을 조직하엿는데 임원은 좌(左)와 여(如)하다러라. 강
1912년 조선우선주식회사가 목포-제주간 월 9회, 부산-제주간 월 5회 운항, 대판 기점 부산 경유 제주도 일주 월 2회 운항, 목포 경유 제주도 일주 월 3회 운항의 항로를 개설하면서부터 제주 바닷길이 본격적으로 열렸다. 이후 1922년에 제주상선회사가 발족되어 부산-제주 간 항로 개설에 이어 제주-대판 간 직행 항로를 개설했고 이때부터 제주와 일본(대판지역)과의 직교류가 급증했다. 1928년에는 고순흠이 기업동맹을 결성하여 1500톤급 순길환호를 대판-제주 항로에 취항시켰고, 같은 해 김문준, 김달준, 문창래 등이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하여 1200톤급 복목환을 취항시켰다. 복목환은 제주인 스스로 일본에 진출하는 제주인을 돕기 위하여 설립된 것이다. 이에 따라 3개 회사의 무한 경쟁 체제에 돌입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도내에는 이 배들이 정박할 수 있는 규모를 가진 양항(良港)이 없었기 때문에 이 배들이 먼 바다에 정박하면 종선(從船)으로 승객들을 날랐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명사고가 발생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1928년 대포항(大浦港)에서 일어난 조난 사건이다. 이십칠일 오후 네시경 전남 제주도 대포(大浦)에서 조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이 나거든 제주도로 보내라던 옛 조선 속어(俗語)에 잇는 바와 가티 제주도는 실로 조선 종량(種良) 마산지(馬産地)이다. 실지로 가보니 소(牛)도 다른데 못지 안케 그 두수(頭數) 사만구백 여로 전 조선 축우(畜牛)의 삼십퍼센트 강(强)을 점하엿스니 전국에 제 일위며 마필 두수는 이만 이천 여로 전 조선 총수(摠數)의 사십퍼센트 강(强)이니 전국 제 이위다. 본도 목마 사우(飼牛)의 유래를 살펴보면 전설에서 본바와 가티 그 유래가 오랜 것은 사실일 것이다. 사승(史乘)에 의하면 고려 충렬왕 삼년 정축(丁丑)에 처음 목축을 시작하엿다 하엿고 원(元)나라 달로화적(達魯花赤)이 우마 수십두를 다리고 조천(朝天)에 상륙하야 마우(馬牛) 목장 이십 여개를 설정하고 감목관(監牧官)을 두어 기하(基下)에 우감(牛監) 마감(馬監)의 별관(別官)으로 하야금 직접 목자(牧子)를 지도케 하야 관용(官用) 우마를 사육식혀 량우준마(良牛駿馬)를 다수 산출해 오다가 최근 육칠십년 전에 관유(官有)우마는 민간에 배부하게 되어 현재에 일르럿다 한다. 일반적 방목식(放牧式)은 사사(舍飼) 계절적 방목, 종년방목(終年放牧) 삼종
▲ 추자도 1926년 5월 14일 오후 4시, 추자면(楸子面)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급히 목포와 제주경찰서 무장경관 삼십여 명이 출동해 현장에서 이십일 명을 검거하고 바로 경비선에 태워 추자도 떠나 목포로 이송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추자면이란 곳은 대해중의 외로운 섬으로써 지역이 협착하고 토질이 척박하야 도민은 남녀노소를 믈론하고 고기잡이를 하야 그날그날의 호구를 하여 가는대 만약 어업이 잘못되면 류리 걸식하는 참상을 이룬다(동아일보, 1926년 5월 25일). 1917년 당시 추자면장 원용배(元容培)와 해남사람 윤재호(尹在浩) 등 몇몇이 추자어민의 이익과 편리도모를 목적으로 추자어업조합을 조직했다. 1920년 이들은 추자어민의 이익과 편리도모와 별개로, 고기잡이 어구(漁具)를 사 들인다 칭탁(稱託)하야 추자어업조합의 명의로 식산은행(殖産銀行)제주지점에서 8000원을 차입(借入)하였다. 이 차입한 8000원 거액을 원용배와 윤재호 등이 공모하여 목포에서 횡령 소비하고 버리고 난 뒤 또 다시 식산은행에서 4000원을 차입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차입한 돈으로 소금을 매입하고 보통 시세의 배나 되는 가격으로 조합원에게 판
제주를 소개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들의 장점으로 풍부한 기개와 강고한 의지, 근면 질박(質朴)을 말하는 반면 시기심이 많고 사람을 의심하며 성질이 율한(慄恨)하다는 단점을 든다. 전자는 이 섬의 역사로 보아 원명(元明)에 속하였든 관계로 몽고의 대륙적 기개와 근면 질박한 생활의 유풍(遺風)이라 하면 후자는 도국(島國)의 일반적 근성, 즉 배타적 근성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망망한 대해의 험악한 파도와 싸우며 거기서 생활재료를 구하는 그들, 그리고 혜택없는 풍토에서 그 생활을 도(圖)하는 그들로서 모험적 기개와 강고한 의지를 가지게 되는 것이나 이러한 가운데서 그들의 생활이 근면하고 질박할 것도 필연이리라. 그들의 성격이나 풍속은 외래적 수입인 것이기 보다는 그 자연적 생활조건에서 생긴 바가 크리라 믿는다. 더욱이 그들의 사회적 생활관계가 간단하니 만큼 그 자연적 조건에 영향됨이 현저하다. 그들의 성격이 ‘표한(慓悍)’하다는 것도 이러한 그들의 생활환경의 험조(險粗)한 것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은 원시적 공동체적 자연생활을 영위한 역사가 오래이다. 이러한 그들에 있어서는 외래자에 의한 그들 생활의
섬 아가씨가 파라솔을 지니기 시작했다. 또 겨드랑이에 지녔던 바구니가 헨드백으로 변해간다. 면(面)마다 두부집이 생겼다. 조선초신이 고무신으로 바뀌었다. 이 무슨 변화냐고 섬의 고로(古老)들은 말한다. 정말 대단한 변화이다(마스다 이치지, 1934). 재일 제주인의 일본으로의 이주(移住)는 1945년 해방 이전과 1945년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1945년 해방 이전 일본 노동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1910년에서 1939년에 이르는 시기와 일본이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징용과 징병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동원시켰던1940년에서 1945년 해방까지이다. 1945년 해방 이후는 ‘밀항(密航)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다시 해방 이후 1959년 북송사업이 시작되기까지의 밀항 도입기와 1960~70년대의 밀항 절정기, 198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 불법 체류하며 취업했던 밀항기로 구분할 수 있다. 해방 이전 제주도민 도일(渡日), 즉 일본으로의 이주는 일본 내 노동력 부족과 일본과의 직항로 개설로 인한 이주비용 하락 등으로 당시 제주도 전체인구의 1/4 규모의 대규모 이주가 이
지질로 말하면 이 섬은 전체로 원래 화산(火山)이엿든 관계상 전도(全島) 지하에 용암(熔岩)이 첩적(疊積)되여 잇을 뿐 아니라 전면적으로 돌밭을 일우고 잇다고 하여 과언이 아니다. 제주에는 삼다(三多)또는 사다(四多)라는 말이 잇다[석다(石多), 풍다(風多), 마다(馬多), 여다(女多)] 해안지대(海岸地帶)고 초생지대(草生地帶)고 할 것 없이 돌담은 이곳의 명물(名物)이다. 인적(人跡)이 간곳, 돌담 없는 곳은 없나니 우리 육지인의 안목으로서는 이것은 자기의 집, 자기의 밭(田) 자기의 평원(平原)을 둘러 싸어 노은 한 개의 사유를 표시하는 경계선(境界線)으로만 보여 지는 것이다. 예로부터 제주도의 명물인 돌담은 단순히 사유를 표시하는 경계의 의미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바람을 막고, 가축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은‘경지(耕地)’를 개간(開墾)할 평원(平原)을 방목(放牧)에 이용하고 교통로(交通路)를 만들기 위하야서 전면적으로 널여 잇는 돌덩이를 모아서 싸어 노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은 역시 이곳의 삼다(三多)를 형성하는 바람(風)과 말(馬)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다(동아일보, 1935. 10. 02).
제주도(濟州島)야 말로 참으로 민요(民謠)의 나라이다 고랫노래라고 하야 방애찌흘 때에 부르는 노래도 잇고 바다 우에 배를 띄워 노코 저허가며 노에 맞추와서 부르는 뱃노래도 잇스며 들에서 김을 맬 때에 그 힘들고 괴로움을 조곰이라도 더러 볼가 하야 이 고랑에서 멕이고 저 고랑에서 밧는 엄부가(嚴父歌)도 잇다(조선일보, 1938.06.07). 이어도 호라 이어도 호라 이어 이어 이어도 호라 이어 홈민 나 눈물 난다 어어 말난 말아근 가라 이어도 하라 이어도 하라 이어 이어 이어도 호라 강남(江南)가건 해남을 보라 이어도가 반이라 혼다 (이어도 노래) 이 섬의 노래가운데서 가장 대표되고 특징을 나타내는 것은 ‘이어도’의 노래가 첫재일 것이다. 이와 가티 이어도가 늘 부터 다니니 그러면 이 이어도라는 것은 무엇일가? 이것은 한 전설(傳說)의 섬이니 이허도(離虛島)라고 까지 쓰는 사람이 잇서서 본도(本島)와 지나(支那)와의 사이에 위치를 둔 섬이지마는 본도에서는 퍽 먼 곳에 잇스므로 보이지도 안코 또 일즉 한사람도 가본 일이라고는 업는 그런 신비스럽고 허무(虛無)한 전설의 섬으로 알아오는 이가 만타 그리하야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