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3특별법 제정 이후 시행령 파동으로 요동치더니 곧이어 위원회와 기획단, 조사 인력 등 인적 구성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최고 의결기구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다. 그 산하 조직으로 진상조사와 조사보고서 작성을 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작성기 획단’, 위원회의 의결사항을 실행하기 위하여 제주도지사 소속 아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실무위원회’를 두도록 했다. 또 사무기구로 행정자치부 산하에 ‘제주4‧3사건처리지원단’, 제주도 산하에 ‘제주4‧3사건지원사업소’를 각각 설치, 운영하도록 했다. 이들 기구 중 2000년 3월 3일 행정자치부 소속으로 4‧3지원단이 맨 처음 발족했다. 처음엔 행자부에서 파견한 행정고시 출신 박동훈 서기관(현 국가기록원장)과 제주도에서 파견한 2명 등 3명의 공무원이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그해
“우리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제정된 4‧3특별법은 4‧3 진상규명을 향한 도정에서 첫 단추만 꿰맨 것이지 어떠한 낙관도 금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향후 진행될 여러 후속조치, 즉 시행령과 조례 등 관련 하위법령의 제정 및 법안에 명시된 진상규명특별위원회의 구성 등이 도민의 염원과 민족적 양심에 부응하여 ‘시급히’ 그리고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꾸준히 감시하고 촉구할 과제가 주어져 있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특별법이 제정된 오늘을 4‧3 진상규명을 위한 제2단계 투쟁의 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위의 내용은 4‧3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던 1999년 12월 16일, ‘4‧3특별법 쟁취 연대회의’ 등이 발표한 공동성명에 나오는 글이다. 4‧3연대회의는 “특별법 제정은 제주도민의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하면서도 앞으로 있을 후속조치를 주시하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우려가 현실로…어처구니없는 개악 그런데 이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시행령 제
▲ 1999년 12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4‧3특볍법안 통과를 선언하는 박준규 국회의장. 행자위·법사위는 무난히 통과 1999년 12월 13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산하 법안심사소위가 심의하여 만든 4‧3특별법 단일안(행자위 대안)을 일부 조문의 수정 끝에 통과시켰다. 4‧3특별법안이 중요한 관문을 또 하나 넘은 것이다. 이제 4‧3특별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의 의결 과정만 남게 됐다. 국회 행자위 심의 과정에서 행자위 수석전문위원(박봉국)은 4‧3특별법 발의안에 대해 “지난날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의 한 부분을 치유하려는 취지를 가진 것”이라고 평가하고, 이 법안을 심사할 때는 “사건의 진상에 대한 역사의식과 정책의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날 행자위 전체회의에서 한 조문이 수정됐는데, 그것은 행자위 대안에 ‘제주4‧3사건 백서 편찬’으로 표현됐던 것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으로 바꾼 것이다. 즉 정부 차원의 위원
우여곡절 겪고 4‧3특별법 심의 돌입 1999년 12월 1일 극적으로 국회에 제출된 국민회의의 ‘제주4‧3특별법안’은 13개 조항으로 짜여졌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4‧3사건에 대한 정의’ 규정이다. “1947년 3월 1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빚어진 무력충돌 및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4‧3연대회의 등의 주장을 상당히 반영한 것이다. ▲ 변정일 전 의원(좌)과 고 양정규 전 의원 4‧3특별법안은 또 국무총리 소속하에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를 두고 이 위원회의 의결사항을 실행하기 위해 제주도지사 소속하에 실무위원회를 두도록 했다. 이밖에 4‧3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불이익 처우금지와 4‧3백서 편찬, 위령사업 지원, 제주4‧3평화인권재단 설립, 의료지원금 및 생활지원금 지급 등을 규정했다. 이는 11월 18일 국회에 제출된 한나라당의 4‧3특별법안(15개 조항)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다
난데없는 국민회의 4‧3특위안 파동 1999년 11월 17일 난데없이 국민회의 소속 국회의원 101명이 발의한 ‘4‧3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이 대목에서 ‘난데없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는 이미 국회에는 1996년 제주출신 변정일‧양정규‧현경대 의원 등의 주도 아래 여야 국회의원 151명이 발의한 4‧3특위 구성 결의안이 계류되어 있었다. 그런데 국민회의가 이 결의안을 그동안 방치해오다 갑자기 별도의 결의안을 제출한 것이다. 둘째는 이 무렵 4‧3연대회의 등 4‧3진영이 한 목소리로 국회 4‧3특위의 효력이 매우 미미하기 때문에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이를 완전히 묵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셋째는 그동안 4‧3연대회의로부터 “도대체 뭐하고 있느냐?”고 집중포화를 받았던 국민회의 제주도지부가 하루 전에 발표한 4‧3특별법안 시안 공개와 추진 의지와도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나라당 제주출신 국회의원들이 먼저 4‧3특별법안
제민일보 소송 계기 24개 시민단체 총결집 1999년 10월 28일 ‘4‧3특별법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4‧3연대회의)가 닻을 올렸다. 이 연대회의에는 제주도내 시민사회단체들이 대부분 동참했고, 뒤늦게 4‧3유족회까지 합류함으로써 총 24개 단체가 참여하는 결집체로 발족했다. 4‧3 진실규명운동사에 가장 기념비적인 결집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결합이 가능했던 것은 ‘시급성’과 ‘절박함’이 강력한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출범하면 곧 4‧3매듭을 풀어줄 것 같았던 DJ정부에 대한 기대치가 무너지고, 20세기 마지막 국회에서마저 문제 해결의 단초를 찾지 못한다면 4‧3문제는 영구히 미제사건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퍼져갔다. 거기다 그해 3월 출범한 4‧3도민연대가 나름대로 4‧3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활동과 함께 10월 초부터는 거리로 나와 4‧3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였지만 도민사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데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 이심전심으로 뭔가 돌파구가 있어야 할 것이
지방의원 등 81명으로 꾸려 1999년 4월 4일 4‧3특별법 제정운동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출정식이 제주도의회에서 열렸다. 제주도의회(의장 강신정)가 주최하고, 도의회 4‧3특위(위원장 오만식)가 주관한 ‘4‧3문제 해결 촉구를 위한 대국민 홍보 및 국회 방문단’ 출정식이었다. ▲ 제주도의회 마당에서 열린 출정식 . 기대를 걸었던 김대중 정부에 대한 불만이 서울에서는 4월 3일 마로니에공원에서 3000여 명이 모인 ‘제주4‧3 명예회복 촉구대회’로, 제주에서는 지방의회와 4‧3관련단체 등이 공동 참여한 홍보단이 전국을 누비며 4‧3문제의 심각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정부와 국회를 압박하는 전략으로 표출됐다. 이 전국순례 출정에는 도의원 14명 이외에도 제주시의회(의장 강영철) 6명, 서귀포시의회(의장 한건현) 5명, 북제주군의회(의장 윤창호) 4명, 남제주군의회(의장 이종우) 5명 등 지방의회 의원 34명이 참여했다. 또한 4‧3희생자유족회(회장 박창욱), 4‧3도민연대(공동대표 김영훈‧양금석‧임문철), 4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도 있었다” 1999년 12월 16일 제주4‧3특별법이 극적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그리고 2000년 1월 11일 청와대에서 이 법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서명식이 있었다. 4‧3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시기는 20세기 100년의 마침표를 찍기 바로 보름 전이고, 이 법이 공포된 시점은 21세기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는 벽두여서 역사적 의미가 더 컸다. 나는 4‧3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던 날 “기적 같다”는 말로 밖에는 그 감격을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4‧3범국민위원회 법률특별위원장을 맡아 특별법 제정에 헌신했던 김순태 교수(한국방송대‧작고)는 이런 나의 심경을 글로 썼다.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는 특집(「4‧3반세기」 제10호)에서 “‘4‧3특별법의 제정은 비록 그 내용이 미흡하지만 기적 같은 일이라 여겨진다’는 양조훈 선생의 표현이 가슴에 와 닿는다”라고 기술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그 과정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느껴진다. 그런데 그 &ls
추미애 의원의 ‘4‧3 입문’ 숨은 사연 1999년 12월 제주4‧3특별법이 기적같이 국회를 통과하던 날, 나에게 최고의 공로자를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추미애 국회의원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도 ‛4‧3 입문’까지 숨은 사연이 있었다. 추미애 의원은 2014년 발표한 ‘제주4‧3 - 끝나지 않은 진실’이란 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제주4‧3의 비극을 알았을 때 느낀 것이 있다. ‘모르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4‧3같은 인권 잔혹사를 풀어내는데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들 자신임을 알았다. 우리들의 무관심이 가장 큰 적이었고, 다음은 좌우 이념의 문제로 매사를 버무려 묻어버리려는 집단적 무지가 걸림돌이었다. 내가 제주4‧3을 위해 했던 일은 바로 우리 사회의 무관심을 깨뜨리고 집단적 무지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추미애 의원은 본래 대구 태생이다. 경북여고를 졸업했다. 그런데 그녀는 전북 정읍 출신인 남편(서성환 변호사)과 결혼했다. 한양대
김대중 대통령 “메모해서 수시로 점검” “나는 수첩에 제정해야 할 법안들을 메모했다. 그리고 수시로 들여다보았다. 지난 수십 년간 생각해온 것들이었다. 법과 제도로 민주주의를 지키고,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했다. 한을 풀어 주어야 했다. 여소 야대의 정치 환경에서도 이를 꾸준히 추진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장관들을 독려했고, 정당 또는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을 만나 수없이 토론했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보상, 제주4‧3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군사정권 하의 의문사 진상규명, 국가인권위원회 설치, 국가보안법의 개폐, 선거법 개정 등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김대중 자서전』에 나오는 글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 재직시절의 수첩에 제주4‧3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건 등을 메모해서 수시로 들여다보았다는 이야기다. 1998년 2월 ‘국민의 정부’ 출범은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뤘을 뿐 아니라, 한때 사형수였던 인물이 ‘
1999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이인수)가 ‘불법 계엄령’ 보도에 대해 제민일보사를 상대로 ‘정정보도 및 3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왔다. 이 후안무치한 처사에 4‧3 진영뿐만 아니라 제주시민사회단체까지 들고 일어났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소송은 원고가 패소하고, 피고인 제민일보사가 승소했다. 대법원 확정판결 때까지 2년여가 걸린 이 소송의 진행과정에서 4‧3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법정에서 계엄령 하의 양민 학살 실태를 증언하기도 했다. 결국 이 소송을 통해 사법부가 공권력에 의한 불법학살극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컸다. 또한 이 송사가 4‧3 진영의 외연 확장과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계엄법도 없는데 계엄령 선포해 논란 1997년 4월 1일 『제민일보』는 “4‧3계엄령은 불법이었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신문은 “제주4‧3 때 제주도민 대량학살의 법적 근거로 알려진 계엄령은 당시 이승만 정권에 의해 불법적으로 선포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 충격파를 던졌다. ▲
제주 전마을 돌며 초토화피해 조사 『제민일보』 연재물 「4‧3은 말한다」는 1996년 10월에 340회를 넘기면서 대규모 유혈사태를 몰고 온 초토화 작전의 실체와 그 참상을 다루게 되었다. 광란의 한복판에 들어선 것이다. 나는 이 무렵 초토화 상황의 취재 방향을 놓고 고심에 빠졌다. 초토화 피해가 컸던 몇몇 마을을 선정해 상징적으로 다뤄야 할지, 전수조사하여 제주도 전체 마을의 피해상황을 두루 보여줘야 할지 선택해야 했다. 김종민 기자 등은 초토화 작전 기간에 전도에 걸쳐 워낙 많은 사건이 동시에 벌어졌기 때문에 초토화의 실상을 제대로 파헤치기 위해선 전수조사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 취재안은 초토화 작전의 실상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반면, 연재가 장기화되는 부담이 있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은 당초 6명에서 3명(양조훈, 김종민, 김애자)으로 재편되어 있는데다, 내가 그해인 1996년 8월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현장 취재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2명의 기자가 이 일을 감당해야만 했다. 또 다른 이유는 경영주와의 관계였다. 제민일보사는 1990년 사원주와 도민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