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 의원의 ‘4‧3 입문’ 숨은 사연
1999년 12월 제주4‧3특별법이 기적같이 국회를 통과하던 날, 나에게 최고의 공로자를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추미애 국회의원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도 ‛4‧3 입문’까지 숨은 사연이 있었다.
추미애 의원은 2014년 발표한 ‘제주4‧3 - 끝나지 않은 진실’이란 글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제주4‧3의 비극을 알았을 때 느낀 것이 있다. ‘모르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4‧3같은 인권 잔혹사를 풀어내는데 가장 큰 적은 바로 우리들 자신임을 알았다. 우리들의 무관심이 가장 큰 적이었고, 다음은 좌우 이념의 문제로 매사를 버무려 묻어버리려는 집단적 무지가 걸림돌이었다. 내가 제주4‧3을 위해 했던 일은 바로 우리 사회의 무관심을 깨뜨리고 집단적 무지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추미애 의원은 본래 대구 태생이다. 경북여고를 졸업했다. 그런데 그녀는 전북 정읍 출신인 남편(서성환 변호사)과 결혼했다. 한양대 법학과 동기 동창인 두 사람은 7년의 열애 끝에 결혼했지만, 가족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남편이 고등학교 때 큰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가 불편한데다 당시로선 영남 집안과 호남 집안의 혼사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덤으로 사는 삶을 봉사하겠다면서 고향 정읍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고, 아내는 법관의 길을 걸었다.
DJ 적극권유로 법복 벗고 정치생활 시작
법관 생활 10년 차에 접어든 추미애 판사가 광주고법 판사로 재직하던 1995년 8월에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다. 야당 거물정치인 김대중 부부가 추미애 부부를 만찬에 초대한 것이다.
그때 김대중 대통령의 공식 직함은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준비위원장’이었다. 김 위원장의 첫 마디는 “호남 사람인 제가 대구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였다고 한다.
김대중 위원장이 시국사범 영장 기각 때문에 ‛껄끄러운 판사’로 소문난 추미애의 영입에 직접 나선 것이다. 2시간의 대화 끝에 추미애는 법복을 벗고 정치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한다. 그만큼 노련한 정치인의 설득이 주효했다.
1995년 9월 5일 국민회의가 창당하던 날 추미애는 ‘사상 최초의 야당 여성 부대변인’으로 언론의 시선을 모았다. 1996년 총선에서 지역구(서울 광진을)에서 당선된 그녀는 1997년 대선 때는 부대변인 자격으로 전국을 누볐다.
선거 캠프에서는 DJ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추 부대변인이 수행하도록 했다. 그것도 DJ와 1보 뒤쪽의 자리까지 정해져 있었다. ‘판사 출신의 대구 여인’을 부각시켜 호남 색깔이 강한 DJ의 이미지를 희석시키려는 캠프의 전략이었던 것 같다.
특위 맡은 후 밤 새워 4‧3 공부
그래서 그녀는 DJ와 함께 제주까지 오게 되었다. 제주에서 그녀는 제주 지지자로부터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됐다. 그들은 DJ에게 대통령이 되면 반드시 4‧3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달라고 요구했고, DJ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아닌가.
추미애는 충격을 받았다. “내 스스로 지성인이라고 자부해 왔는데, 그때까지도 4‧3이 뭔지 몰랐다”. 이는 그녀가 필자에게 실토한 말이다.
DJ가 대선에서 승리하고,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직후 당내에 4‧3특위가 구성되면서 추 의원은 부위원장이란 직책과 함께 공청회를 꾸려가는 책임을 맡게 된다. 생각지 못한 차출이었지만, 추 의원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4‧3 공부에 돌입했다.
몇몇 자료를 입수하여 밤을 새우며 읽었다. 그 중에도 강력한 인상을 받은 책이 바로 제민일보 4‧3취재반이 쓴 『4‧3은 말한다』였다고 한다.
“밑줄 그으면서 읽었습니다. 때로는 격정에 겨워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요. 이런 참혹한 역사를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내가 몰랐다는 자책과 부끄러움이 더욱 눈물을 흘리게 했는지 모릅니다. 정치인으로 발을 들여 놓은 이상 한 시대의 야만과 폭력에 대해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보자고 마음에 다짐을 하고 또 했습니다.”
그러나 국민회의 4‧3특위는 두 차례의 공청회를 개최했을 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국회 사정이 녹록지 않았다. 그러자 4‧3 진영으로부터 “여당 특위가 이렇게 뒷심이 없느냐”는 힐난이 들어왔다.
4‧3공문서 찾으러 정부기록보존소 뒤져
초조해 하던 추미애 의원 사무실에 1999년 초, 한 ‘백조일손’ 유족이 보낸 연좌제 관련 자료가 접수되었다. 자료 제공자는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해서 탐라대 교수로 재직하던 이도영 박사였다.
그 자료는 서귀포 도순리 주민들 중 4‧3 때 처형됐거나 수형됐던 사람과 그 유가족 동태를 기록한 서귀포경찰서 작성 문건이었다. 한 눈에 유가족 주변을 수시로 관찰해온 연좌제 적용 서류임을 알 수 있었다.
추 의원은 경찰 문건에 나오는 도순리 주민들의 상황을 『4‧3은 말한다』의 내용과 비교했다. 『4‧3은 말한다』는 체험자의 증언 위주로 기록된 것이지만 경찰 문건 내용과 정확히 일치했다고 한다.
4‧3 관련 공문서의 존재를 확인한 추 의원은 이에 힌트를 얻고 먼저 정부가 소장하고 있는 4‧3 관련 기록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녀는 곧바로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 보관창고를 뒤지기 위해 대전으로 향했다. 정부기록보존소 본소가 대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추 의원의 정부기록보존소 방문에는 4‧3취재반 김종민 기자, 도순리 ‛형살자 명부’를 제공했던 이도영 박사가 동행했다. 추 의원이 4‧3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행정자치부(행자부) 산하 정부기록보존소 측은 추 의원 일행을 정중하게 맞았다. 당시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소속인 추 의원은 행자부 업무를 예리하게 파고드는 깐깐한 일 솜씨에다 국민의 정부에서 ‘잘 나가는 국회의원’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초선인데도 대통령직 인수위원, 국민회의 총재특별보좌역 등 그녀의 직함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추 의원 일행은 샘플로 남로당 제주도당 핵심간부를 지낸 조몽구의 판결문을 요청했다. 조몽구가 좌익활동을 했던 이유 하나 때문에 그의 아버지, 아내, 그리고 조미연(9세) 남철(7세) 미근(4세) 남후(2세) 등 네 자녀가 1948년 12월 표선백사장에서 경찰에 총살됐다.
그런데 정작 그 ‘폭도의 괴수’라는 조몽구가 1951년 부산에서 검거되어 구속되었다. 대한민국 법정이 그에게 내린 죗값은 징역 10년이었다. 그는 모범수가 되어 옥살이 7년만에 출옥해 고향인 표선면 성읍리에 돌아와 살다가 병사한다.
그런데 정부기록보존소가 제출한 조몽구의 판결문은 이름과 주요 내용 등을 도려낸 너덜너덜한 것이었다. 정부기록보존소 측은 신중을 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그만큼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추 의원은 정부기록보존소의 소극적인 자세를 질책했다. 추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이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수차례 약속했다.”면서 정부 기록물의 공개도 공약사항이기 때문에 정부기록보존소가 분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추 의원 측은 이어 4‧3 관련 재판기록 일체와 연좌제 적용자료, 심문조서, 군‧경의 작전‧정보 기록 등을 요청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정부기록보존소는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와 일반재판 기록을 찾아냈다고 추 의원에게 통보해온 것이다.
추 의원은 1999년 8월 무더위 속에 한걸음에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로 달려갔다. 4‧3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는 그 부산지소 보관창고에서 50년째 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마치 4‧3 영령이 뭔가 풀리게끔 도와주고 있다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고 실토했다.
1999년 9월 15일, 추미애 의원은 정부가 소장하고 있던 4‧3 당시 1650명의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와 1321명의 일반재판기록을 발굴해 공개했다. 4‧3 관련 정부문서 공개는 4‧3 발발 5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어서 제주언론뿐만 아니라 중앙언론도 크게 보도했다.
세상에 처음 나온 4‧3 관련 재판기록 중 특히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가 이목을 끌었다. 제주4‧3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군법회의는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두 차례 실시되었다.
1차 871명과 2차 1659명 등 모두 2530명이 저촉되었다. 추 의원이 공개할 때에는 2차분 중심으로 그 일부인 1650명의 수형인 명부가 발표됐다. 그러나 4‧3 당시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절차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은 ‘탁상 재판’이었다. 2003년 정부 4‧3위원회는 4‧3 군법회의가 불법적인 재판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가 화제를 모은 것은 명단이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대상자들이 대부분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이다. 군법회의 대상자들은 그 당시 제주도에 형무소가 없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그런데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각 형무소별로 ‘불순분자 처리방침’에 따라 상당수가 총살되었다. 과거 정부는 그렇게 처리해 놓고도 유족들에게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유족들은 반세기가 넘도록 부모 형제가 어디서 희생되었는지 내용도 모르고, 시신도 찾지 못한 채 한 맺힌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뿐만 아니라 군법회의는 형량도 턱없이 무거웠다.
사흘 만에 345명을 사형 선고했다는 기록도 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한국 사법사상 최대의 사형 선고 기록이다. 아니, 세계사에서도 매우 드문 사형 판결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중대차한 재판 결과가 국내외 언론에 단 한 줄도 보도된 바 없다. 왜 그랬을까? 앞에서 지적한 대로 그 군법회의는 일종의 탁상 재판이요, 판결문도 없는 엉터리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해당 피해자들이 60년만인 2008년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옆에서 시신으로 뒤엉킨 채 발굴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추미애 의원이 뿌린 씨앗이 의외의 결실을 맺은 것이다.
결국 이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 발굴은 4‧3 행방불명 희생자의 역사를 새로 기록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랜 세월 숨죽이며 살아온 그 유족들은 2000년 3월 ‘제주4‧3 행방불명인 유족회’를 결성하고, 4‧3 진실찾기의 가장 강력한 유족모임으로 탄생했다.
이후 그들의 끈질긴 노력은 군법회의 수형인들의 정부 4‧3 희생자 인정, 제주국제공항에서의 유해 발굴, 4‧3평화공원 안의 발굴유해 봉안실과 행방불명 희생자 개인 표석 설치 등의 결실로 이어졌다.
4‧3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국회 국정감사(국감)의 시초는 1989년 9월 국회 내무위원회의 제주도 국감 때였다. 당시 민주당 소속 최기선 의원은 4‧3 유족을 증인으로 내세워 4‧3의 참혹상을 드러냈다.
유족의 입을 통해 참상을 드러내고 곧바로 정부와 제주도를 상대로 진상조사를 촉구했다. 그 후로 국감 때가 되면 간헐적으로 4‧3 문제가 다루어졌다. 그때까지 수감 대상은 주로 제주도였다.
그런데 1999년 국감 때는 그 대상이 경찰로 바뀌었다. 그해 9월 29일 제주도와 제주지방경찰청을 대상으로 한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의 국감에서 여당인 국민회의 소속 추미애 의원이 경찰을 집중 공략한 것이다.
그것도 ‘형살자 명부’라는 물증을 들이대면서 연좌제 적용의 근거인지를 추궁했다. 중문면 도순리 주민 52명에 대한 총살 집행 기록을 담고 있는 이 경찰 문서에는 사망자의 본적, 나이, 성별, 남로당과의 관계, 총살 일시, 총살 장소뿐만 아니라 유가족의 사상과 동태까지 상세히 실려 있었다.
문서 하단에는 작성한 경찰관의 이름도 적혀 있어서 한 눈에 경찰이 취급해온 연좌제 관리 자료임을 알 수 있었다. ‘연좌제’란 자기 행위가 아닌 가족이나 친족의 행위 때문에 처벌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이 제도는 조선시대에 성행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 때 조선왕조는 “범인 이외에 연좌시키는 법은 일절 시행 말라.”고 선포함으로써 구시대 악법을 털어냈다. 그러나 4‧3의 광풍 속에서 이 악습이 되살아났다. 집안의 청년이 사라지면 연좌제를 적용해 그 부모형제를 학살한 것이다.
비극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토벌대에게 가족이 희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유족들은 공직 진출이나 승진, 사관학교 입학, 해외 출입 제한 등 온갖 불이익을 당했다. 유족들은 차디찬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있었다. 한마디로 멍에가 대물림된 것이다.
추미애 의원이 공개한 경찰 문건은 5‧16 직후인 1960년대에 작성된 것이다. 연좌제를 위한 문건이었다. 그런데 연좌제가 공식적으로 폐지 선포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1980년 전두환이 이끄는 ‘국보위’에서였다.
정권을 찬탈한 국보위 세력은 민심을 얻기 위해 연좌제 폐지를 발표했다. 그렇다고 연좌제 폐해가 금방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추 의원은 국감에서 “과거 사관학교 진학이나 공무원 임용, 외국여행까지 제한했던 연좌제를 적용할 당시 어떤 자료에 근거했는지를 밝히라.”고 따져 물었다.
추 의원은 또 “도의회에서 4‧3 피해 보고서를 발간할 때 경찰이 ‘4‧3 전담반’을 구성해 피해신고를 한 사람을 대상으로 일일이 확인 작업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가?”고 추궁했다.
이에 경찰 측은 “1981년 3월 24일 내무부의 연좌제 폐지 지침으로 연좌제의 적용은 사라지게 되었고, 제주경찰청은 이 지침에 의거해 4‧3사건 관련 자료를 폐기 처분했다.”고 밝혔다.
또 “4‧3 전담반은 운영한 사실이 없고, 다만 제주도의회에서 피해자 신고를 받은 건에 대해서 신고 내용이 사실인지 여부를 일부 확인하다 그만둔 적이 있다.”고 꼬리를 내렸다.
대정부질문 전부를 4‧3으로 채운 뚝심
1999년 들어 수형인 명부 발굴, 형살자 명부 공개 등 4‧3 진실찾기의 굵직한 걸음을 해온 추 의원의 행보는 그해 12월의 4‧3특별법 국회통과 때 절정에 이른다. 그런데 그 이전에 기억해야할 행적이 있다. 4‧3에 대한 ‘추 의원의 집념과 진정성을 가늠케 하는 실화’라 할 수 있다.
추 의원은 1999년 10월 29일 제208회 정기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발표 제한시간 20분 모두를 4‧3에 관한 질의로 채웠다. 대정부 질문의 제목은 ‘인권유린의 20세기를 정리해야 합니다.’였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이처럼 오랫동안 제주4‧3을 거론한 일은 그 전에도 없었고, 아마도 앞으로 없을 것이다. 제주출신 국회의원 어느 누구도 못했던 일을 추미애 의원이 해낸 것이다. 추 의원의 국회 본회의장 발언은 북촌사건, 토산리사건, 동광리사건 등 4‧3의 피해 현장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 불법 계엄령, 역사교과서 왜곡, 제주도민의 가슴앓이 ‘레드 콤플렉스’ 문제 등을 조목조목 지적한 후 국무총리에게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와 대통령의 공개 사과 등을 건의할 용의가 있느냐고 질의한 것이다.
그에 앞서 국민회의 원내총무실에서는 추 의원의 질의요지를 보고 기겁을 했다고 한다. 2000년 5월 총선을 코앞에 두고 열리는 제15대 마지막 정기국회여서 본회의 질의를 위한 국회의원들의 신청이 쇄도하고 있었다. 그만큼 경쟁률이 높았다.
그것도 대부분 총선을 의식, 지역구 관련 질의를 하기 위함이었다. 박상천 원내총무가 4‧3문제만 질의하겠다는 추 의원에게 강하게 재고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음해 총선 때 추 의원의 서울 광진을 선거구에선 여지없이 ‘빨갱이 국회의원’이란 삐라가 나돌았다. 심지어 “추미애는 제주4‧3 법을 만들어 우리 구민의 혈세를 공산폭도에게 보상하려 한다.”는 해괴한 유인물도 있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