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3특별법 제정 이후 시행령 파동으로 요동치더니 곧이어 위원회와 기획단, 조사 인력 등 인적 구성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최고 의결기구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다. 그 산하 조직으로 진상조사와 조사보고서 작성을 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작성기 획단’, 위원회의 의결사항을 실행하기 위하여 제주도지사 소속 아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실무위원회’를 두도록 했다.
또 사무기구로 행정자치부 산하에 ‘제주4‧3사건처리지원단’, 제주도 산하에 ‘제주4‧3사건지원사업소’를 각각 설치, 운영하도록 했다.
이들 기구 중 2000년 3월 3일 행정자치부 소속으로 4‧3지원단이 맨 처음 발족했다. 처음엔 행자부에서 파견한 행정고시 출신 박동훈 서기관(현 국가기록원장)과 제주도에서 파견한 2명 등 3명의 공무원이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그해 6월 김한욱 제주도 기획관리실장이 초대 단장으로 부임했다. 4‧3지원단 정원은 몇 차례 조정이 있었는데 많을 때는 21명이나 되었다. 지원단 발족 초기 애를 먹었던 것이 바로 위원회와 기획단 인선문제였다.
민간인 위원에 자기편 사람 심기 신경전
4‧3위원회의 구성은 특별법 시행령 상 20명 이내의 위원으로 하되, 위원장은 국무총리, 당연직 위원은 법무‧국방‧행정자치‧보건복지‧기획예산처 장관과 법제처장, 제주도지사가 맡도록 했다.
나머지 위원 12명은 민간인으로 구성하게 됐다. 특별법과 시행령이 제도적 장치를 만든 것이라면, 진상조사 등의 성패는 어떤 능력과 성향의 사람들로 위원회를 구성하느냐, 즉 인선문제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4‧3진영과 보수진영은 눈에 보이지 않은 각축전을 벌였다. 4‧3진영의 노력으로 4‧3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일부 보수세력이 4‧3특별법 운용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예비역 장성들이 조직한 이른바 ‘별들의 모임’인 성우회가 맨 앞에 나섰고, 이승만 대통령 양자 등이 가세했다. 성우회의 압력을 받은 국방부 역시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틈새에 끼인 것이 4‧3지원단이었다. 지원단은 이처럼 첨예하게 입장을 달리하는 진영뿐만 아니라 행자부-국무총리실로 이어지는 ‘상전’을 모셔야 하는 처지여서 이래저래 곤혹스런 입장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민간위원 위촉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원칙 아래 학계와 4‧3관련단체, 군‧경측에서 각각 3명씩, 법조계‧언론계‧시민사회단체에서 각각 1명씩 구성하기로 했다.
이때부터 각 진영은 자기들의 입장을 대변할 인물을 포함시키기 위해서 신경전을 벌였다. 그들은 상대 진영에서 어떤 성향의 인물을 추천하는지 정보파악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진우 변호사 위촉 지시 소식에 발끈
그러던 차에 그해 7월에 이르러 4‧3진영에 뜻밖의 정보가 입수됐다. 총리실에서 행자부에 ①이진우 변호사를 4‧3위원으로 위촉할 것 ②위원회 숫자를 20명에서 19명으로 줄여 민간인 비중을 줄일 것을 지시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이진우 변호사는 누구인가? 그해 2월 『월간조선』에 ‘국군을 배신한 대한민국 국회’란 제하의 기고문을 통해 4‧3특별법 제정 자체를 통렬하게 비난했던 장본인이 아닌가.
『월간조선』 2000년 2월호는 기고문의 표지 제목을 “국군을 배신한 국회-공산게릴라들에겐 면죄부를 주고 국군을 학살범으로 정죄(定罪)한 4‧3특별법”이라고 매우 선정적으로 달았다.
『월간조선』은 4‧3특별법 제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진우 변호사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특별법의 국회 통과를 개탄한다’와 이현희 교수(성신여대)의 ‘제주4‧3사건의 본질을 다시 말한다’는 기고문 두 편을 동시에 실은 것이다.
이진우 변호사의 글은 섬뜩함이 느껴질 정도로 과격했다. 즉 “4‧3특별법은 공산폭도들에게 면죄부와 함께 사랑의 꽃다발을 안겨주었고, 반면 이들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피와 땀 그리고 생명을 바친 대한민국 국군, 경찰관들에게는 ‛무차별 양민 대량학살’이라는 유죄판결을 내렸다”는 게 그의 논지였다.
그의 글만을 읽은 독자들은 ‘도대체 대한민국 국회가 어쩌다가 이런 큰 실책을 했단 말인가?’라는 우려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승만 양자가 ‘불법 4‧3계엄령’을 보도한 제민일보를 상대로 제기한 3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측의 대표 변론을 맡은 이가 바로 이진우 변호사였다.
이런 사람을 4‧3특별법에 의해 구성되는 4‧3위원회 위원으로 위촉한다는 국무총리실의 발상은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욱이 총리실이 민간인 1명을 줄여 위원회 위원수를 19명으로 구성하라고 지시했다면 그것 또한 무슨 의도인가? 벌써 총리실에서 가부 표결까지 의식한 발상이 아니냐는 게 4‧3진영의 시각이었다.
DJ정부가 출범했지만 성격은 JP와의 공동정부였다. 당시 국무총리는 보수정당인 자민련 출신의 이한동 총리였다. 이진우 변호사는 바로 그 자민련의 국회의원 공천 심사위원장을 맡았었다.
이런 뜻밖의 구상은 그런 인연을 발판으로 보수진영에서 한 것 같은 인상이 짙었다. 당시 4‧3진영에서는 위원회 인선문제 등에 4‧3범국민위 고희범 운영위원장이 발 벗고 뛰고 있었다.
그가 이 소식을 듣고 청와대 김성재 수석-윤석규 행정관 라인과 국회 추미애 의원 등과 긴밀히 협의하면서 대책을 모색했다. 그는 총리실 안이 강행됐을 때는 4‧3유족과 단체들이 전면 보이콧하는 상황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결국 청와대가 나서서 총리실을 설득, 이 방안은 철회됐다. 난고 끝에 4‧3위원회 민간인 위원 선임은 그해 8월에 이르러 가닥이 잡혔다.
각계 내로라하는 인사들로 위원회 구성
학계 강만길(상지대 총장)‧서중석(성균관대 교수)‧신용하(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 4‧3단체 김정기(서원대 총장)‧박창욱(4‧3유족회 회장)‧임문철(신부‧4‧3도민연대 공동대표), 군‧경 김점곤(예비역 소장)‧이황우(동국대 행정대학원장‧경찰학회장)‧한광덕(예비역 소장‧전 국방대학원장) 위원이 각각 추천됐다.
또 언론계 김삼웅(대한매일 주필), 법조계 박재승(변호사), 시민사회단체 이돈명(변호사‧참여연대 고문) 위원도 추천됐다.
2000년 8월 28일 4‧3위원회 민간인 위원 위촉식과 1차 회의가 중앙종합청사 국무총리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위원 인선 파동 직후에 열린 첫 회의이어선지 이한동 국무총리는 매우 신중하게 발언했다. “응어리진 제주도민의 과거를 조속히 치유하고, 4‧3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게 그의 첫 발언이었다.
이 총리는 이어 “후세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뤄지도록 필요한 지원과 조치를 다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4‧3위원회 첫 회의에서는 당면한 4‧3 진상규명을 위해서 다음달(9월) 초에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을 구성하는 한편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신고와 심사, 위령공원 조성사업 등을 조속히 착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상견례를 겸한 첫 회의를 마친 위원들은 곧바로 종로구 통의동 코오롱빌딩으로 옮겨 4‧3위원회 현판식을 가졌다. 현판식에는 최인기 행자부 장관, 조성태 국방부 장관 등 중앙위원 이외에도 현경대‧장정언 국회의원, 제주에서 올라간 4‧3 관련 대표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4‧3위원회가 발족하기까지 수차례의 험난한 고비가 있었지만, 위원들은 다른 어떤 과거사 정리위원회보다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중추적인 인사들로 구성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주4‧3위원회 위원 구성이 논란 끝에 가까스로 매듭이 되었다. 그런데 곧이어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구성 역시 심한 몸살을 앓았다. 그해 9월에 출범할 예정이던 4‧3기획단이 4개월이나 늦은 2001년 1월에야 겨우 발족할 수 있었으니 가히 그 산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4‧3기획단은 정부 차원의 4‧3사건 진상조사와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이란 막중한 임무를 띠었다. 기획단은 단장을 비롯한 단원 15명으로 구성하도록 돼 있었다.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 단원 15명 가운데 8명을 간부 공무원으로 임명한다는 초안이 나와 4‧3진영의 강한 반발을 샀다.
결국 기획단은 법무부‧국방부‧행정자치부‧법제처 국장급 공직자와 제주도 부지사 등 공무원 5명과 유족 대표, 관련 전문가를 포함한 민간인 10명으로 구성하는 것으로 조정됐다. 단장은 4‧3위원회 위원장(국무총리)이 단원 중에서 임명하도록 규정됐다.
1차 관문은 민간인 단원 선정 문제였다. 논란 끝에 추천 비율은 학계 3명, 4‧3 관련단체‧법조계‧군경 측 추천인사 각각 2명, 유족 1명으로 정해졌다.
여기에서도 4‧3진영과 보수진영은 정보전을 펼치면서 막후에서 힘겨루기를 했다. 각각의 단체에서 2배수의 후보를 추천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자기 쪽에 유리한 사람을 위촉할 수 있게 노력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민간인 단원으로 강종호(재경4‧3유족회장)‧강창일(제주4‧3연구소장)‧고창후(변호사)‧김순태(방송대 교수)‧도진순(창원대 교수)‧박원순(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오문균(경찰대 공안문제연구소 연구원)‧유재갑(경기대 통일안보복지전문대학원장‧대령예편)‧이경우(변호사)‧이상근(국사편찬위원회근현대사실장)이 선임됐다.
2차 관문은 기획단장 임명 문제였다. 4‧3진영에서는 제주4‧3연구소장이면서 배재대 교수인 강창일을 단장 후보로 강하게 밀었다. 그런데 그해 10월 국사편찬위원회 이상근 근현대사실장이 단장으로 내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4‧3진영이 발끈했다.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국사편찬위원회에 대한 불신의 벽이 높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까지도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4‧3을 “북한공산당의 사주 아래 발생한 제주도 폭동사건”으로 기술돼 있었다. 진실과 다른 이 규정이 4‧3의 논의조차 금기시하는 토대가 됐다.
4‧3특별법이 제정된 2000년에 이르러 국사 교과서에 북한 지령설이 삭제되긴 했지만, 국사편찬위원회는 여전히 4‧3의 성격을 ‘폭동’이란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기관의 공무원이 4‧3의 진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파헤쳐야할 기획단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게 4‧3진영의 시각이었다.
2000년 10월 4일, 제주도내 4‧3 관련단체와 제주시민단체협의회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4‧3 기획단장 내정을 즉각 취소하라”고 주장했다.
이 성명은 국사편찬위원회가 그동안 4‧3의 진실을 어떻게 왜곡‧폄훼했는지 사례를 열거하고 “공무원 신분의 사람을 기획단장에 임명하고자 하는 것은 행정자치부가 4‧3 기획단을 장악하려는 시도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기획단장으로 국사편찬위원회 근현대사실장을 내정한 것만 아니라 이미 이한동 국무총리로부터 임명 사인까지 받은 상태였다. 일국의 총리가 서명한 내용을 번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3인물로 박원순 변호사가 기획단장 맡아
이 때에도 4‧3범국민위원회 고희범 운영위원장이 발 벗고 뛰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천성 기대해 볼 수 있는 곳은 청와대뿐이었다. 수시로 추미애 의원과 연락하면서 청와대 한광옥 비서실장, 김성재 정책수석 등과 협의했다. 청와대 인사들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두 달이 흘러갔다. 언론은 4‧3기획단의 발족이 마냥 늦어지고 있는 사실을 질타했다. 4‧3특별법은 위원회 구성 후 2년 이내에 자료 조사를 하고, 그 후 6개월 이내에 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시한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 허송세월을 보낼 것이냐”고 지적한 것이다.
2000년 12월 말에 이르러 그동안 기획단장으로 거론됐던 두 사람을 제외한 제3의 인물을 추대하자는 안이 제기됐다. 그래서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가 추천됐다. 처음엔 본인이 고사했지만 주변의 설득으로 이를 수락했다. 진통을 겪은 후에 기획단은 2001년 1월 17일에 비로소 발족할 수 있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