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대만 등 외국인 180명 자비 참가 제주4‧3 5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1998년 8월 21일부터 24일까지 나흘간 제주그랜드호텔에서 열렸다. ‘21세기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이란 주제의 이 행사는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한국위원회(대표 강만길)를 비롯해 일본, 대만, 오키나와 등 3개 국, 4개 인권단체가 주최하고 제주4‧3연구소(소장 강창일)가 주관한 행사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학술대회는 전무후무한 4‧3 국제행사였다. 국내외 현대사 전문학자, 인권운동가, 정치인, 법조인, 예술인 등 500명이 참가했다. 외국인만 180여 명에 이르렀다. 외국인들은 자비로 참가하는 열의를 보였다. ▲ 연일 만석을 이룬 행사장. 행사장은 연일 만석을 이뤘고 토론의 열기도 뜨거웠다. 청중석의 자리는 빈 틈이 없었다. 국내외 참석자들은 "학술대회가 이렇게 열기 있게 진행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거기에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동티모르 독립운동가 호세 라모스 오르타 박사,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규명위원회’ 일본 대표 덴 히데오(田英夫) 참의원
▲ 1998년 4월 제주시 신산공원에 쌓아진 ‘4‧3 해원 방사탑’ 4‧3 진실찾기 운동은 4‧3 발발 50주년인 1998년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각계 진영이 50주년을 앞두고 나름대로 준비를 해온데다 50년 만의 평화적 정권교체로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해여서 진상규명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이미 서울에서 4‧3범국민위가 출범해 활발한 활동에 들어간 데 이어 제주, 일본 등지에서도 50주년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어 각종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참여하는 국제학술행사가 제주에서 열린 것도, 여당인 국민회의 안에 ‘4‧3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역사적인 공청회를 개최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제주에서도 4‧3 50주년 추진위 발족 1998년 2월 3일 제주시 가톨릭회관에서 ‘제주4‧3 50주년 학술문화사업 추진위원회(50주년 추진위)’ 창립대회가 각계인사 15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4‧3 발발 50주년을 맞아 4‧3 역사의 올바른 복원과 진
1999년 12월 16일 제주4‧3특별법이 극적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그리고 2000년 1월 11일 청와대에서 이 법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서명식이 있었다. 4‧3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시기는 20세기 100년의 마침표를 찍기 바로 보름 전이고, 이 법이 공포된 시점은 21세기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는 벽두여서 역사적 의미가 더 컸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그 과정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느껴진다. 그런데 그 ‘기적’은 어느 날 돌연히 일어난 일이 결코 아니었다. 4‧3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던 사람들의 헌신과 땀, 눈물의 결정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마지막 통과 과정이 너무나 긴박했고 극적이어서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4‧3영령의 도움일 수도 있었다. 제주4‧3특별법 제정 운동에는 크게 두 가지 축이 있었다. 하나는 1997년부터 시작된 서울에서의 4‧3범국민위원회의 활동이요, 다른 하나는 1999년 3월 제주에서 출범한 4‧3도민연대의 활동인데, 제주에서는
1993년 4월 21일자 『제민일보』에는 “4‧3과 흡사한 대만 2‧28사건 / 46년 만에 보상금 152억 지급 결정”이라는 박스 기사가 실렸다. 로이터통신이 대만의 언론보도를 인용해 타전해온 짤막한 기사를 토대로 김종민 기자가 내용을 보충해 보도한 기사였다. 그러자 예사롭지 않은 반응들이 나타났다. 도대체 대만 2‧28사건의 실체는 무엇이며, 대만 2‧28사건이 제주4‧3과 닮은 점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 보상까지 받게 됐는가? 하는 의문들이 꼬리를 이었다. 신문사에 문의전화도 잇따랐다. 나는 2‧28사건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자 보충취재를 하여 1993년 4월 24일자 『제민일보』에 ‘제주4‧3과 대만4‧3’이란 칼럼기사를 통해 2‧28사건을 소개했다. 그리고 중국 현대사 전문가를 수소문하던 중에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히는 리영희 교수(한양대)가 이 분야에 해박하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원고를 청탁했다. 그래서 그해 『제민일보』 창간 기념일인 6월 2일자 특집호에 “대만 2‧28사건 진상
인기리 연재중인 양조훈의 4.3발굴취재 비사-4.3 그 진실을 찾아서는 이번 주 쉽니다. 집필자 휴가로 다음주 다시 연재를 재개합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해량 있으시길 바랍니다. [제이누리]
1991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방영한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방송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선풍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최고 시청률 58.4%, 평균 시청률 46.7%란 수치가 말해주듯 대한민국 국민들을 안방극장으로 몰입하게 한 드라마다.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시대부터 6‧25전쟁 발발까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재조명한 총 36부작 드라마. 그런데 한국 드라마 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된 이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제주4‧3이 소재로 다뤄졌다. 모두 6편 분량이었는데, 그 때까지 4‧3의 실상을 모르던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 <여명의 눈동자> 송지나 작가 물론 일부 연구자들은 이 드라마가 ‘4‧3항쟁의 정당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서 공중파 방송을 통해 안방극장에 4‧3의 실체와 토벌대 진압의 잔혹성, 미군정의 실책을 드러낸 그 자체만으로도 4‧3의 진실을 알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여명의 눈동자> 작가 송지나 그에 앞서
최고점수로 한국기자상 수상 "이번의 한국기자상 응모에서 큰 개가를 올린 부문이 ‘장기기획 보도부문’입니다. 응모작 중에서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는 압권을 이룬 작품이라는데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일치했으며, 전 응모작 중 최고점수를 받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1993년 8월 17일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25회 한국기자상 시상식에서 심사위원장 김정기 교수(한국외국어대)가 밝힌 ‘심사평’이다. 김 위원장은 “「4‧3은 말한다」는 방대한 기획 시리즈물이라는 점에서 한국 저널리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호평했다. 그 자리에는 이만섭 국회의장, 이회창 감사원장, 이기택 민주당 대표, 이경식‧한완상 부총리 등 정‧관계 인사들과 학계‧언론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4‧3취재반 연재물에 대한 심사위원장의 과찬이 있었기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았다. ▲ 4‧3취재반을 대표해서 한국기자상을 받고 있는 필자. 애초 한국
▲ 4‧3평화기념관에 유해 발굴 당시 모습을 그대로 재연한 다랑쉬굴 특별관. 1992년 발견된 ‘다랑쉬굴’ 유해 11구가 화장 후 서둘러 바다에 뿌려지는 과정은 의문투성이다. 그 의혹은 그 때나 지금이나 풀리지 않고 있다. 그 당시 사회분위기는 캄캄한 동굴 속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4‧3 유해들을 양지 바른 곳에 안식처를 마련해서 안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세였다. 다랑쉬굴 유해들은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처참하게 희생된 상징이고, 유족들의 한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도 도민적인 진혼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정언 제주도의회 의장이나 국회의원 당선자 신분인 양정규 의원 등도 공개적으로 “예의를 갖춰 영혼들을 안장시킬 수 있는 진혼의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당시 도정 최고책임자도 처음에는 이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4월 21일에는 종교계와 시민단체 등이 참여한 ‘다랑쉬굴 4‧3희생자 대책위원회’가 조직되어 범도민적인 장례절차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얼마 없어서 다랑쉬굴 유해들을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 흔적
1992년 4월 2일 구좌읍 중산간에 있는 ‘다랑쉬굴’ 4‧3 희생자 유해 11구 발견 사실이 언론에 의해 발표되었다. 44년 전 참혹하게 몰살당한 모습 그대로라는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큰 충격을 주었다. 정밀조사 결과 이들은 초토화의 광풍이 몰아치던 1948년 12월 18일 당시 9연대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4‧3 학살의 잔혹성을 온 몸으로 보여준 이 유해들은 햇빛 속으로 나오자마자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에 의해 허겁지겁 화장이 된 후 바다에 뿌려졌다. 당시 공안당국은 그것을 ‘흔적 지우는 일’이라고 쾌재를 불렀을지 모른다. ▲ 다랑쉬굴 유해 발견 사실을 알린 『제민일보』 1992년 4월 2일자 1면 보도기사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유해 처리가 오히려 이 사건의 생명력을 더욱 북돋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랑쉬굴 참상은 지워진 것이 아니고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 지난 역사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다랑쉬굴 사건은 결과적으로 4‧3의 총체적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고 말았다. 피난 입산 &rar
1992년 미 문화원에서 이례적인 제의 『제민일보』 1992년 4월 3일자에 “미국은 4‧3과 무관한가”란 제목의 칼럼을 쓰고 한 달 여가 지난 5월 말께 주한 미문화원 관계자가 나를 찾아왔다. 한국계인 그는 “양 선생의 글을 잘 보고 있다”면서 존 메릴 박사와의 토론 대담을 제안해왔다.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나는 제주도에서, 존 메릴은 워싱턴에서, 통역은 버지니아에 있으면서 위성중계 토론 대담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삼각 전화 위성 인터뷰를 할 수 있도록 미 문화원에서 신문사에다 장비를 설치해주겠다고 했다. ▲ 존 메릴 박사 매우 이례적인 제안이었다. 나는 이미 그 전에 제주도를 방문했던 존 메릴 박사와 두 차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미 문화원의 제안이 특이한데다 때마침 『제민일보』 창간 2주년 특집호를 준비하고 있을 때라 흔쾌히 응했다. 여기서 잠시 존 메릴(John Merrill) 박사를 소개해야겠다. 그는 1975년 미 하버드대학교에서 제주4‧3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제목은 「제주도 반란」(The
▲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가 있던 중앙청에 걸렸던 일장기가 내려지고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게양되면서 미군정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4‧3의 진상을 조사하다보니 ‘불편한 진실’을 만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책임문제다. 나는 요즘 “4‧3의 발발 원인과 유혈 진압에 대해서 미국은 상당한 부분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표현을 하게 된 내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다. 오해가 있을까봐 한마디 더 한다면, 그렇다고 ‘남로당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 역할은 서로 다르지만, 미국과 이승만 정권, 남로당 제주도당이 4‧3 발발과 유혈사태에 ‘더불어’ 책임이 있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1988년 4‧3취재반이 출범할 당시 젊은 기자들은 ‘민중항쟁론’을 주장했고, ‘미국의 책임’ 문제를 제기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몰고 온 들뜬 사회 분위기로 재야 진영에서는 당연시하던 담론이었다. 그러나 4‧3취재반장인 나의 입장은 달랐다. 그런 담론을 언론에서 당당
4‧3의 진실을 추적하면서 절감한 사실은 4‧3의 진실규명은 중앙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중앙의 정치지형이 진보적인 판세냐, 아니면 보수적인 흐름을 타느냐에 따라서 4‧3 진실규명의 역사도 명암을 달리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민주화 바람, 1988년부터 시작된 국회 광주 청문회 등은 4‧3 진실찾기를 촉구하는 강력한 촉매가 되었다. 1988년 대선에서 승리한 노태우 정권도 이듬해 4월 총선 결과 ‘여소 야대’ 국회로 바뀌자 동력을 잃고 이런 흐름에 제동을 걸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판도를 일순간에 바꿔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1990년 1월 전격적으로 단행된 민정‧민주‧공화 3당의 합당이었다. 새로 탄생된 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은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221석을 차지하는 ‘공룡’으로 변했다. 국민들이 투표로 정해준 정치 구도를 인위적으로 뒤엎은 것이다. 이로 인해 4‧3 진실찾기도 시련을 맞게 됐다. 공안정국이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경찰, 4‧3추모제 봉쇄하고 400명 연행 공안정국은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