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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22) ... 범국민위 출범 ‘4·3의 전국화’ 시동

1999년 12월 16일 제주4‧3특별법이 극적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그리고 2000년 1월 11일 청와대에서 이 법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서명식이 있었다. 4‧3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시기는 20세기 100년의 마침표를 찍기 바로 보름 전이고, 이 법이 공포된 시점은 21세기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는 벽두여서 역사적 의미가 더 컸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그 과정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느껴진다. 그런데 그 ‘기적’은 어느 날 돌연히 일어난 일이 결코 아니었다. 4‧3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던 사람들의 헌신과 땀, 눈물의 결정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마지막 통과 과정이 너무나 긴박했고 극적이어서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4‧3영령의 도움일 수도 있었다.

 

제주4‧3특별법 제정 운동에는 크게 두 가지 축이 있었다. 하나는 1997년부터 시작된 서울에서의 4‧3범국민위원회의 활동이요, 다른 하나는 1999년 3월 제주에서 출범한 4‧3도민연대의 활동인데, 제주에서는 그해 10월 도민연대를 포함한 24개 시민단체가 참여한 4‧3연대회의가 발족되면서 연합활동으로 승화됐다.

 

여기에다 반공단체로 출범한 4‧3유족회의 변신과 특별법 제정운동 합류, 지방의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 김대중 국민의 정부 출범, 한나라당 제주출신 국회의원들의 발 빠른 특별법 제정 행보 등이 가세됐다.

 

이 흐름을 보면 한마디로 연합 작전이 상승효과를 올리며 기적 같은 성과를 거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도 이 역사의 수레바퀴 중 어느 하나라도 이탈했더라면 과연 4‧3특별법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박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4‧3범국민위에 전국 명망가 총망라

 

1998년은 4‧3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더불어 4‧3 진상규명 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지 1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였다. 50주년을 앞두고 그동안 4‧3 진실찾기를 해온 각계 진영은 새롭게 대오를 짜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제주에서, 일본에서 4‧3 50주년이 되는 해에 ‘진실을 향한 굿판을 크게 벌이자’는 목표가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것이다. 1997년 4월 1일 서울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추진 범국민위원회(4‧3범국민위)’ 결성식도 그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다.

 

이 행사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제주사회문제협의회(제사협)는 1989년 제주4‧3연구소 출범의 산파역을 했고, 1996년에는 서울 종로성당에서 ‘제주4‧3사건 특별법 제정촉구 시민 대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4‧3 진실규명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제사협은 4‧3 50주년 기념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여 전국적인 이슈로 부각시키고자 명망가들은 물론 전국단위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을 총망라한 범국민적인 조직 구성에 나섰다. 이 일을 위해 정윤형, 현기영, 김명식, 고희범, 강창일, 허상수 등 서울에 사는 제주사람들이 발 벗고 나섰다.

 

4‧3범국민위 결성식에서 발표된 위원 명단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종교, 학계, 법조, 문화예술 등 한국 진보진영 지도급 인사와 시민단체 대표들이 빠짐없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고문단에는 김성수(대한성공회 주교), 박형규(목사), 김관석(목사), 이돈명(전 조선대 총장), 신창균(전국연합 고문), 예춘호(전 국회의원), 변형윤(서울대 명예교수), 이세중(전 대한변호사협회장) 등 각계 원로 8명이 참여했다.

 

자문위원으로는 리영희(한양대 명예교수), 김진균(서울대 교수), 백낙청(서울대 교수), 신용하(서울대 교수), 고은(시인), 신경림(시인), 김창국(전 서울변호사회장), 한승헌(변호사), 이해동(목사), 문정현(신부), 지선(스님) 등 내로라하는 명망가 28명의 이름이 올랐다.

 

상임대표에는 김찬국(상지대 총장), 김중배(참여연대 대표), 강만길(고려대 명예교수), 정윤형(홍익대 법경대학장) 등 4명이, 공동대표에는 김동완(목사), 김승훈(신부), 효림(스님), 김상곤(민교협 대표), 구중서(민예총 대표), 최영도(민변 대표), 천영세(전국연합 공동대표), 권영길(민주노총 위원장), 박정기(유가협 대표), 김정기(역사문제연구소장) 등 각계 시민단체 대표 14명이 맡았다.

 

운영위원으로는 박원순(참여연대 사무처장), 서경석(경실련 사무총장), 최열(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백승헌(민변 사무국장),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유홍준(영남대 교수), 곽노현(방송대 교수), 임헌영(문학평론가) 등 모두 55명이 참여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조직을 꾸려가는 상임운영위원장에 김명식, 사무처장에 허상수, 사무처 직원들은 제사협 회원들로 짜여졌다.

 

4‧3특별법 제정 촉구 결의문 채택

 

이날 결성식에서 고문으로 추대된 이돈명 변호사는 “4‧3에 대한 진실이 왜 정반대로 왜곡되었는지, 또 왜 이를 바로 잡아 보려고 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봐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올바르게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만이 세계 평화에도 이바지하는 길”이라며 정부의 각성을 촉구했다.

 

이날 행사에는 원로급과 젊은 세대에 이르기까지 300여 명이 참석해 장내를 가득 메웠다. 이 자리에서 ① 정부의 양민학살사실 인정과 4‧3 관련자료 공개 ② 국회 4‧3특위 구성 ③ 4‧3특별법 제정과 명예회복 조치 등을 촉구하는 결의문이 채택됐다.

 

또한 4‧3 당시 가장 참혹한 희생을 치른 조천읍 북촌리 학살사건에 대한 주민 홍순식의 생생한 증언도 있었다. 2연대 군인들에 의해 마을 주민 300여명이 일시에 학살당한 기막힌 내용이 전달되자 참석자들은 공분을 느꼈다.

 

이렇게 출범한 4‧3범국민위는 4‧3 50주년을 앞두고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4‧3의 실상을 전국에 널리 알리기 위해 「4‧3 역사신문」을 10호까지 발행했는가하면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등에서 거리 전시회를 열었다.

 

또 전국에서 참석자들을 모집해 ‘4‧3 역사순례’를 마련했다. 4‧3의 해법에 대한 각 정당의 입장을 밝히는 여야 4당 정책토론회도 개최하기도 했다.

 

4‧3 50주년이 되는 1998년에는 ‘제주4‧3 명예회복을 위한 도외 제주인 선언’을 채택해 중앙일간지와 제주지역 신문에 광고를 싣는 것으로 시작해서 3월 1일 ‘제주4‧3 명예회복의 해 선포식’을 갖고 전국에서 100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이어 3월 28일부터 4월 5일까지를 ‘제주4‧3 제50주년 추모 및 기념주간’으로 설정하고 학술심포지엄, 서울‧부산‧대구‧광주를 순회한 ‘강요배 역사회 전시회’도 개최했다.

 

또 정순덕 무녀의 이틀에 걸친 4‧3 희생자 진혼굿, 4‧3 역사사진전, 각 대학의 제주학우회나 총학생회를 통해 마련한 ‘4‧3 문화학교’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특히 이런 결집된 에너지를 모아서 4월 4일에는 서울 탑골공원에서 ‘4‧3 50주년 기념식 및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촉구대회’를 열고 대학로까지 거리시위를 벌이는 대장정을 시도했다.

 

탑골공원에서 4‧3 50주년 기념식

 

“제주4‧3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으로 이 민족의 양심과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사건발생 반세기나 된 제주4‧3의 진실규명을 토대로 희생자의 억울함을 풀고 짓밟힌 인권과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비단 제주도민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를 위한 일입니다.”

 

이는 1998년 4월 4일 오후 2시 서울 한복판인 종로2가 탑골공원에서 열린 ‘제주4‧3 제50주년 기념식 및 명예회복 촉구대회’에서 선언된 내용이다. 1919년 3월 1일 일본제국주의를 향해 독립선언문을 선포함으로써 3‧1운동의 발상지로 상징되는 유서 깊은 곳에서 제주4‧3의 명예회복이 선언된 것이다.

 

이 행사는 1년 전에 출범한 제주4‧3 제50주년기념사업추진범국민위원회(상임대표강만길‧김중배‧김찬국‧정윤형)가 그동안 각고의 준비과정을 거쳐 야심차게 주최했다.

 

서울에서 열린 4‧3 관련행사 중 처음으로 야외에서 치러진 이날 행사는 화창한 날씨 속에 김원룡 목사, 김성수 주교, 이해동 목사, 김몽은 신부, 신창균 전국연합 고문, 이창복 전국연합 상임의장 등 사회 원로, 탤런트 고두심을 비롯한 재경 제주인사, 제주에서 올라간 김영훈‧박희수 도의원, 서울시민 등 1000여 명이 참석, 성황을 이루었다.

 

행사장 주변에는 ‘역사바로세우기 4‧3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4‧3 진상규명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플래카드 등이 나부꼈다.

 

이날 행사는 범국민위 정윤형 상임대표의 개회사와 고희범 사무처장의 경과보고, 김성수 주교와 김몽은 신부, 이창복 전국연합 상임의장의 격려사, 김영훈 4‧3학술문화사업추진위 상임대표의 연대사에 이어 범국민선언문 낭독, 미국정부 및 상‧하원에 보내는 메시지 채택 등 모두 2시간동안 진행됐다.

 

진관 스님이 낭독한 범국민선언문은 ① 김대중 정부의 4‧3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공약 성실 이행 ② 국회 4‧3특위의 즉각 구성과 광범한 조사활동 착수 ③ 명예회복‧피해배상‧기념사업 등의 조치를 담은 제주4‧3특별법 제정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또한 권영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낭독한 미국 정부 등에 보내는 메시지는 ① 미군정하에서 발생한 제주4‧3사건과 대규모 양민학살 사태에 대해 총체적으로 과오를 인정하고 사죄할 것 ② 미군정과 주한미군이 발한 작전명령 등 자료 일체를 공개할 것 ③ 미군 작전 통제 하에서 전개된 초토화 작전과 그로 인한 양민학살‧인권유린에 대한 책임 인정 등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4‧3진실 규명하라!” 거리행진

 

기념식이 끝난 후 참석자들은 풍물패의 선도를 받으면서 탑골공원에서 대학로 마로니에공원까지 3㎞에 이르는 거리행진을 벌였다. ‘50년을 넘길 수 없다! 4‧3진실 규명하라!’라고 쓴 대형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거리행진이 시작되자 일부 서울시민들이 행진 대열에 합세하기도 했다.

 

행진 도중 참가자들은 “특별법 제정!” 등의 구호를 외쳤고, 4‧3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유인물을 연도의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날 행사는 마로니에공원에 도착한 참가자들의 만세삼창을 끝으로 막이 내렸다.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그 준비에 노심초사했던 주최 측 일부 관계자들은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사실상 여기까지 오는 데는 범국민위 관계자들의 노고가 많았다. 명망가들과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을 망라한 조직 구성에서부터 시작해 1998년에 들어서서는 4‧3 알리기 운동에 매진했던 것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 그동안 4‧3을 ‘변방의 역사’로 치부해 침묵을 지켜오던 중앙 언론들이 4‧3을 재조명하는 기사들을 내보냈다. 행사 소개는 물론 각종 기획기사들을 통한 피해사례 소개,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칼럼, 정치권의 움직임 등 다양한 보도가 줄을 이었다.

 

이런 중앙 언론의 변화는 서울이란 중앙무대에서 4‧3 진상규명에 대한 논의를 공론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4‧3특별법 제정운동 돌입
자신감을 갖게 된 4‧3범국민위는 50주년 행사를 마친 후에 4‧3특별법 제정운동을 본격 추진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이를 위해 정책기획특별위원회를 구성, 4‧3특별법 초안 작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1999년에는 단체 이름을 ‘제주4‧3진상규명명예회복추진범국민위원회’로 바꾸고 정치권에 대한 실질적인 대응에 나섰다. 대열을 정비하고 본격적으로 4‧3특별법 제정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1999년 4월 3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제주4‧3 제51주기 추모식 및 명예회복 촉구대회’에는 시민, 학생 3000여명의 인파를 끌어 모으는 저력을 보여준다. 서울에서 열린 4‧3 관련행사 중 가장 많이 모인 이 행사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결국 범국민위의 출범은 ‘4‧3의 전국화’라는 외연을 넓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참여한 인사들은 4‧3특별법의 제정 운동뿐만 아니라, 특별법 제정 이후 4‧3위원회 구성 과정에서도 핵심적인 동력이 되었다.

 

즉, 강만길‧김정기‧서중석‧신용하‧이돈명 등이 4‧3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박원순은 4‧3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단장으로 참여해서 4‧3 진실규명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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