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학원(五賢學園)을 설립한 우공(牛公) 황순하(黃舜河)의 본관은 상주(尙州), 호는 우공(牛公)이다. 1896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나 1978년 별세했다.
그는 제주상선주식회사(1922), 제주주조주식회사(1928), 제주도산소주판매주식회사(1935), 제주도해조주식회사(1938) 등에서 취체역(取締役)을 역임하였다. 지금의 대표이사다. 이후 1939년 제주도어업조합 감사, 1942년 조선해면기업(주) 취체역, 동년 제주도물산(주) 취체역, 1943년 영화 연극 및 부대사업을 취급하는 조일구락부(주)를 설립하여 감사역을 역임하였다. 그는 여러 사업을 경영하는 한편 전라남도평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다.
황순하는 1925년 제주면에 대성통조림공장을 설립하여 공장대표로서 제주도 제조업 발전에 적극적인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 공장은 자본금 4,000원으로 시작하여 전복, 소라 등을 제조하였다. 연간 노동력은 6명으로 연간 470상자를 생산하여 판매한 매출액은 5,520원으로 제주도에서는 소규모의 공장이었다.
이후 제주도에서 조직형태를 가진 회사들이 연이어 설립되면서 그는 근대기업가로 변신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는 1922년에 설립한 제주상선주식회사의 취체역으로 취임한 이후 기업설립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제주주조주식회사(1928)를 비롯하여 제주도산소주판매주식회사(1935), 흥아상공주식회사(1942), 조선해면기업주식회사(1942), 제주무해주조주식회사(1944) 등의 회사경영에 참여하였다.
특히 흥아상공주식회사, 조선해면기업주식회사는 황순하에 의해 1942년에 직접 설립한 기업들이다. 반면 나머지 회사 가운데 제주주조주식회사, 조일구락부주식회사는 일본인에 의해 설립된 회사들이다. 그리고 이들 회사에 참여한 회사들은 1940년 초반 설립된 회사로 자본금 규모가 점차 증가하였다.
황순하는 회사설립에 관계된 9개사에서 취체역으로 재직하였다. 취체역의 재직은 제주주조주식회사 4회, 제주도산소주판매주식회사 2회를 역임하였으며, 나머지 7개사에서 1회를 역임하였다. 이를 업종별로 보면 해조류가공․판매업 4개사, 소주제조업 3개사, 해운업 1개사, 영화․연극 1개사로서 이중 대부분을 해조류가공 판매업과 소주제조업에서 재직하였다.
제주주조주식회사는 1928년 5월 4일 일본인 衛藤伊三郞․角健 輔가 자본금 4만원을 공동으로 투자하여 제주면 건입리에 설립된 주조회사이다. 영업목적은 주류 제조 및 판매업을 주로 하고 기타 부대사업도 취급하였다. 경영진 구성을 보면 취체역은 衛藤伊三郞․角健 輔, 萩原駒藏, 최윤순(崔允淳), 石井榮太郞, 김근시(金根蓍), 박종실(朴宗實) 등이며, 감사역은 이윤희(李允熙), 村田嘉藤治이 선임되었다.
당시 제주도에는 일본인 3개사, 한국인 4개사 등 총 7개의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황순하가 경영에 참여한 제주주조주식회사는 자본금 4만원으로 다른 회사에 비해 자본금이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신용, 지불, 업태는 B등급으로 다른 4개사에 비해 비교적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제주주조주식회사는 1935년 5월 25일 임시주주총회에서 취체역 황순하(회사대표 취체역), 황진수(黃鎭秀), 황청하(黃淸河), 황거하(黃巨河), 황지하(黃智河) 등을 선임하였다. 또한 동사는 정관 제2조를 개정하여 영업목적을 주류제조 및 판매, 부동산 매매 등을 취급하는 것으로 변경하게 된다.
제주주조주식회사는 1939년 9월 30일 정기주주총회에서 황순하는 재선 중임하고 감사역은 임기 만료함에 따라 이착현(李着賢)이 선임되어 취임하게 된다. 1940년 6월 10일 임시주주총회에서 동사는 주류제조, 판매 및 이에 따른 부대사업, 부동산 및 유가증권의 매매이용, 운송업 및 이에 따른 부대사업으로 정하여 기존의 영업목적을 변경하게 된다.
황순하는 인재를 중요시하고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는 유능한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기업의 경영활동에는 유능하고 유익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까지 포함되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황순하는 교육을 통해서만 나라의 기틀을 다져나갈 수 있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실행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민족사의 정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갖고 있었다. 그가 기업가로서의 길을 택하고 주조업을 사업영역으로 정한 것은 애국애족 정신에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회사설립 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여 기업가의 사회적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실제로 황순하 5형제(黃淸河, 黃巨河, 黃喆河, 黃奎河)는 1936년 6월 18일에 그의 부친 황진수의 회갑기념으로 2천원을 희사하였다. 1천원은 출생지인 조천읍 조천리 유년교육사업과 나머지 1천원은 남원면 위미리 교육사업에 기증하였다.
황순하의 교육이념은 인재제일주의 정신에서 이룩되었으며 오현선생(五賢先生)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교육목표는 용기, 겸손, 기상하는 민주적인 도민으로서의 기질을 길러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참된 인재양성에 두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처럼 이미 육영사업에 뜻을 굳히고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던 황순하는 제주도 교육발전을 위한 학교설립에 필요한 기금을 내놓아 1946년 2월 제주제일중학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를 모태로 동년 10월 22일 오현중학교로 개칭되어 정식 중학교로 인가되었으며 1951년 오현고등학교가 개설되고 1964년 3월 6일 오현학원을 설립하였다.
오현학원의 탄생은 1945년 10월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조직된 지식층 청년들의 모임인 로고스(Logos)회가 모체가 되었다. 로고스 모임의 주요 멤버는 이승택(李昇澤), 강순현(姜淳現), 김성만(金聖萬), 양명률(梁明律), 이경수(李慶守), 문영길(文榮吉), 문태오(文太午), 문옥주(文玉柱) 등이다. 이들은 무보수로 교사생활을 하고 있었고 학교운영자금 등 재정적 뒷받침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이런 여건 속에서 이들은 학교설립에 따르는 막대한 자금 소요를 감안하여 당시 전라남도 의원이며, 제주주조주식회사 사장이던 황순하를 제주제일중학원 유지회 회장으로 추대하였던 것이다.
오현학원은 개교 당시부터 제주지역의 인재양성에 초점을 맞춰 나갔다. 그것이 민족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오현학원은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이 나라의 희망은 오직 인재양성이라는 학원 설립자의 취지에 따라 도내 최초로 인문계 남자고등학교로 개교를 하게 되었다.
황순하는 평소 어떤 일에 종사하든 간에 자기에 앞서 이웃과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만이 올바른 삶의 자세라고 강조해 왔다. 이러한 오현 학원 설립자 황순하의 교육관과 정신은 ‘학행일치(學行一致)’라는 교훈(校訓)으로 현재까지도 교육현장에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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