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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시평] '최악'의 등장을 저지해 온 선거의 역사 ... 국회는 우리 삶을 바꾼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는 고대 로마제국시대의 정치인이자 사상가다. 로마제국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남긴 유명한 경구가 있다. “행운이란 준비가 기회를 만날 때 일어나는 것이다.” 행운이란 준비된 자에게 다가오는 필연이지 우연이 아니란 것이다. 준비된 이라면 기회가 다가온 순간의 가치를 알아보고, 잡아챌 능력이 있다. 그래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어찌됐건 물체의 낙하운동에 의구심을 품었던 뉴턴이었기에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유심히 지켜봤다. 그 결과는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우리 국민은 이제 300명의 선량을 국회로 보내야 한다. 그 300명은 지역의 이해를 대변하기도 하고, 국가의 미래운명을 좌우할 중대결론을 논의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꾸는 법을 만드는 곳도 국회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며 만나는, 사실 우리를 규제하고 있는 법은 모두 국회에서 만들어졌다. 우리 삶이 앞으로 어떤 길로 가야할 지도 역시 국회란 곳에서 법으로 규정한다. 나라의 미래는 물론 각자의 미래 역시 국회에서 속박되고 규정된다. 국회는 그런 곳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선택은 진정 신중해야 한다. 한 개인이 아니라 세력을 눈 여겨 봐야 한다. 굳이 이탈리아 정치인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정치는 세력이 하는 것’이다. 개인이 하는 게 아니다. 그 세력이란 정치적 가치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그룹이다. 혈연·학연·지연에 휘둘려 투표하는 건 그래서 우매하다. 한 표를 호소하는 정치꾼의 립서비스에 휘말리는 결과이지만 결국 당선되면 그가 내릴 결정에 고려요인은 아니다. 그저 투정이 나오지 않도록 어르고 달래야 할 유아기적 인연인 것이다. 혈연·학연·지연 그룹을 세력의 영역으로 놓고 보던 시대는 이미 한 세기 전 유물이다. 21세기 한국정치판은 그렇게 작동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정치판은 그렇게 작동되지 않을 것이고, 또 그렇게 작동돼서도 안된다. 불공정의 상징이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데이빗 이스턴(David Easton)은 또 이런 말을 했다. “정치는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다.”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풀어쓰면 이렇다. 우선 정치의 목적은 ‘배분’이다. 최소의 비용(cost)으로 최고의 효용(benefit)을 추구하는 ‘경제’의 원리와 달리 정치는 나눠주는 걸 목표로 한다. 그것도 권위적으로 나눠준다. 여기에서 ‘권위’(Authority)는 인정, 즉 정당성(legitimacy)을 갖추고 부여받은 지위다. 총·칼로 권력을 찬탈한 것과 민주적 투표로 정당히 선출된 권력이 갖는 권위는 서로 비견할 바가 못된다. 그런 정치과정에서 나눠줄 가치는 무엇일까? 돈일 수도, 일자리일 수도, 문화적 향유권일 수도, 함께 지켜야 할 자연유산일 수도 있다. 그 가치를 보는 눈은 그래서 서로 다르다.

 

정치판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공유하는 집단은 바로 ‘정당’(political party)이다. 선거 때마다 정당간판을 바꾸고 나오는 후보들이 있다. 그때 그때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면 그의 말을 믿기도 어렵지만 과연 정치과정에서 무얼 국민들에게 나눠줄까란 공익적 고민을 할지 의심스럽다. 선거는 수시로 말을 갈아타는 인사들에 대해 준엄한 심판을 내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민주주의(Democracy)는 이념이 아니다. 다만 지금껏 인류가 고안하고 찾아낸 가장 합리적인 제도일 뿐이다. 합의와 결론을 도출하는 방법으로 우리가 서로 약속하고 인정한 최상의 절차일 뿐이다. 그 민주주의 정치과정에서 선거는 마지막 의식(final ceremony)이다. 결론을 내는 가장 중요한 절차란 뜻이다. 다수의 뜻이 선거로 결론이 나기에 그 결론이 언제나 최상일 수는 없다. 다만 ‘최악’의 등장은 저지해 왔던 게 그동안 인류의 선거역사다. ‘최선’을 알아챌 대중은 소수일지 모르지만 ‘최악’은 그동안 숱한 선거에서 다수의 유권자들이 걸러내는 지혜를 보여줬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선거란 함수관계에서 ‘투표’는 소중함을 넘어 정치꾼(politician)의 등판을 저지하고 제대로 된 정치인(statesman)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는 유권자의 최후권리다. ‘행동하는 양심’은 그 권리행사만으로 충분하다. 그런 권리를 포기한다면 ‘최악’의 등판에 사실상 동조한 셈이나 다름 없다. 투표참여가 우리 민주사회 작동을 위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는 이제 더 거론할 필요가 없다.

 

선택의 시간이다. ‘시민의 조직화된 힘’은 투표함에서 활화산으로 돌변할 때 의미가 있다. 그 기준은 어느 후보가 준비돼 있는가란 것이다. 준비란 살아온 이력이다. 준비되지 않은 이에게, 가치기준도 오락가락하는 이에게 행운이 안기도록 좌시해선 안되지 않는가? 우리의 기회가 그런 ‘정치낭인’들의 기회로 뒤바뀐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파국열차를 타게 된다. [제이누리=양성철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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