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삼십 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소설 「순이삼촌」의 한 구절이다. 순이삼촌은 제주 4·3 학살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충격과 고통을 평생 안고 살다가 그 현장에서 생을 마감한다.
내 고장 대정읍은 수많은 순이삼촌의 한이 서린 곳이다. 일제 강점기와 제주 4.3. 계속된 수탈과 핍박으로 상처난 역사를 끌어안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군은 제주를 방어기지로 삼는 ‘결 7호 작전’을 위해 많은 대정읍민을 송악산 해안 진지구축에 강제 동원했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섯알오름 양민 학살터가 있다. 한국 전쟁 때 예비검속이라는 명목하에 무고한 마을 사람을 학살한 곳이다. 마을 어르신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충격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 후 대정읍은 여느 농촌처럼 젊은 사람이 떠나가며 인구감소 위기에 직면했다.
최근 대정읍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영어교육도시에 국제학교가 생기며 정주 인구가 늘었다. 폐교 위기던 보성초는 학생이 늘어 건물을 증축했고, 읍내엔 상업시설이 늘었다. 인구증가에 따라 소비가 늘면서 지역경제에 순풍이 불었다.
마을에도 활기가 돌았다. 특히 국제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돼 마을과의 화합을 끌어내고 있다. 노스런던컬리지에잇스쿨(NLCS) 제주 학생들은 마을회관을 방문해 어르신과 교류하고, 지역 초등학교 학생에게는 영어와 예체능을 가르친다. 브랭섬홀아시아(BHA) 학생들은 제주 4.3 관련 서적을 영어로 번역해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정읍은 핍박의 역사를 지나 비로소 희망의 서사를 쓰기 시작했다. 신규 국제학교 유치를 위한 양해각서(MOU) 체결 소식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반가운 이유다. 대정이 아픔의 역사를 딛고 새로운 역사로 나아가는 데 새로운 국제학교가 원동력이 되길 기원한다. / 조남준 보성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