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꼬닥꼬닥 걸어왔다.
교사, 화가, 해양경찰, 회사원, 주부 등 각기 다른 일을 하며 제주에 사는 사람들….
그들이 그림책을 통해 제주를, 제주의 문화를 알리고 있다.
◇ 그림책으로 소통하며 20년간 제주문화 알려
"저희는 제주 연구자는 아니었지만 (중략) 거창하게 말하자면 결과적으로 제주 연구자가 된 셈이죠."
지난 5일 오후 제주한라도서관 1층 전시실에서 만난 제주그림책연구회 초대 회장이자 퇴직 교사인 이현미씨는 흘러간 20년을 돌이켜보며 이같이 말했다.
'꼬닥꼬닥 걸어 온 제주그림책 이야기' 창립 20주년 기념 전시회가 열린 장소는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놓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2003년 처음 '그림책'을 매개로 이들이 모였을 때만 해도 '제주'라는 주제로 그림책을 낼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저 각기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1년간 공통의 관심사인 그림책의 매력에 빠져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무얼 그리고 무얼 써야 할까…' 고민 끝에 나온 결과물이 바로 이듬해인 2004년에 펴낸 '제주가나다'였다.
기역(ㄱ)부터 히읗(ㅎ)까지 14개의 자음으로 제주를 풀어낸 그림책이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에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
곶자왈(숲을 뜻하는 제주어), 노랑굴 검은굴, 돌하르방, 록담만설(녹담만설), 태왁(해녀 물질 작업 도구), 팽나무, 한라산 등 14가지 제주 관련 테마가 그림책에 담겼다.
제주그림책연구회는 첫 그림책 이후 해마다 제주를 주제로 그림책을 발간하고 있다.
설문대할망 신화를 소재로 한 '오늘은 웬일일까요'(2005), 제주 원도심인 무근성 일대 동네 이야기를 담은 '우리 동네 무근성'(2006), 산지천 범람을 막아달라는 기원을 담아 조선시대 세워진 조천석(朝天石)에 관한 이야기 '하늘에 비는 돌, 조천석'(2007)이 차례로 나왔다.
이어 숨바꼭질이란 아이들의 놀이를 통해 제주의 전통 가옥을 소개하는 '곱을락'(2008)이란 제목은 '숨다'는 뜻의 제주어 '곱다'에서 나온 말이 앙증맞고 정겹게 느껴진다.
이외에도 '구멍 숭숭 검은돌', '오늘도 바람이 불어', '장태야, 은실아', '쉰다리, 쉰다리'(제주의 발효 음료), '바람의 신 영등', '도채비 자장가'(도깨비 자장가란 뜻의 제주어) 등 현재까지 20여권의 그림책을 냈다.
아직 발간하지 못한 그림책인 더미북(초안 상태의 가제본한 책)은 8권이나 된다.
제주그림책연구회가 다룬 소재는 제주의 신화, 갈옷, 향토음식, 바람·돌·곶자왈·남방큰돌고래와 같은 제주의 자연, 제주어, 제주 여성의 삶 등 다양하다.
이쯤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돋는다.
그림책과 동화는 같은 말일까?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 걸까
그림책연구회 회원들은 그림책과 동화책은 엄연히 다른 장르라고 설명한다.
동화책에선 그림이 삽화와 같이 하나의 보조 개념으로 들어가지만, 그림책에서 그림은 글과 함께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담아 전달하는 주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림책은 글과 그림이 반반으로 비슷한 비중으로 들어가는데, 간혹 글자 없이 그림만 있는 경우도 있다.
책 속에 담긴 메시지 역시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글자를 모르는 어린애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함께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장르다.
◇ 전문가만이 아닌 일반인도 함께 제주문화 명맥 이어
그림책으로 제주 문화를 알린다는 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구성원들이 제주 문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소재가 정해지면 관련 자료를 찾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각종 자료를 찾아 공부하며 이야기 방향을 정하고, 실제로 이야기를 쓰는 과정에서 수많은 토론과 답사, 논의, 합평 등 기나긴 시간을 보낸다.
자료가 충분치 않을 때는 어릴 적 기억을 더듬으며 모두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학계에서 충분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것들이 많아 그들의 삶 자체가 제주 문화의 한 축을 이룬다.
모두가 만족할 때까지 이 과정은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그리고 마지막엔 전문가의 감수(監修)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등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는 족히 1년의 시간이 걸린다.
많은 작품을 회원들이 함께 쓰고 그리지만, 일부 작품은 개인 작업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개인 작업이라도 회원들의 합평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을 거치는 만큼 어찌보면 공동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대가 바뀌고 세월의 흐름과 함께 사라져 가는 제주문화.
하지만 제주문화는 전문가만이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같은 노력으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직장에 다니며 시를 쓰는 김정선씨는 "(처음 시작할) 당시만 해도 제주를 알리는 책, 어린이들이 제주문화에 대해 쉽게 접근할만한 책이 없었다"며 "그래서 문화를 공부하고 논쟁하며 알아가는 과정을 거쳤다. 어찌 보면 우리 회원들에게 더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공동의 작업을 통해 회원 간 유대감, 끈끈함이 이어졌고, 이것이 원동력이 돼 20년을 이어오게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림책을 통해 제주문화를 알리는 일원으로서 기존 제주문화 연구와 정책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주부인 윤희순씨는 "제주어를 비롯해 제주의 문화를 보다 보면 도내 각 지역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도 많고 무엇이 맞는지 헷갈리는 등 어려움이 많다. 제주문화를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주도 또는 제주도교육청 차원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라져가는 제주문화뿐만 아니라 각종 개발 속에 옛 모습을 잃어가는 마을에 대한 고민과 안타까움을 털어놓기도 한다.
화가 김연숙씨는 지난해 펴낸 그림책 '글라 글라 내팟골'('가자 가자 내팟골'이란 뜻의 제주어)에 자신이 어릴 적부터 살았던 내팟골(지금의 동문시장 인근)로 다시 돌아와 살며 보고 느낀 생각을 정리해 담았다.
그는 "옛 그대로 오랫동안 이어오던 마을과 그 한편에 집들이 하나둘 사라지며 개발되는 상반된 모습을 보면서 개발과 보전이라는 가치, 우리 삶에서 재생돼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