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전체가 문화재이자 관광지로서 600년 전통을 이어온 성읍민속마을이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문화재 보호와 마을 정비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혈세만 낭비했을 뿐 성과가 없다는 비판이 주민과 학계에서 쏟아져 나온다. 600년 전통이 천 년 이상 지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성읍민속마을의 과제는 무엇일까. ◇ 600년간 명맥 이어온 민속마을 조선시대 제주의 모습을 그린 기록 화첩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정의조점', '정의양로', '정의강사'는 옛 제주현성에서 거행된 행사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정의조점은 이형상 목사가 정의현을 둘러보며 군사시설을 비롯한 각종 제반 사항을 점검하는 모습을, 정의양로는 정의현성에서 치러진 노인잔치 광경을, 정의강사는 동짓날 정의현에 머물며 시행한 강사(講射), 즉 글 외우기 시험과 활쏘기 시험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에는 동문·서문·남문과 함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는 정의현성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당시 성안에 수많은 민가가 밀집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의현감이 집무하는 현아(縣衙), 교육시설인 향교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성 밖에도 민가가 형성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천천미(靈泉川尾)라고 표기한 하천(지
제주 사람 중에도 제주의 전통주라고 하면 '오메기술', '고소리술', '쉰다리'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제주도무형문화재 3호 오메기술과 11호 고소리술은 좁쌀을 주원료로 한 술이다. 쉰다리는 쌀밥이나 보리밥에 누룩을 넣어 발효시킨 도수가 낮은 술이다.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강술', '오합주', '모주'도 거론된다. 강술은 오메기떡과 누룩을 반죽해 발효한 걸쭉한 상태의 술이고, 오합주는 좁쌀을 원료로 한 청주와 꿀, 참기름, 계란, 생강 등 다섯 가지를 섞어 만든 술이다. 모주는 조선 광해군 시절 제주에 유배된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의 시녀가 노씨를 봉양하기 위해 만들어 팔았다는 탁배기 같은 낮은 도수의 술이다. 일상적으로 언급되는 제주의 전통주는 이들 6가지 정도였다. 그런데 현재 제주에서 생산되는 전통주는 수십 가지에 이른다. 제주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전통주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가 정부가 주류의 제조와 유통 및 판매 활동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술이 생산, 유통되기 시작했다. 2010년 '전통주 등의 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전국 각지의 전통주 산업은 활기를 띠었다. 10일 제주도
제주 성읍민속마을은 조선시대 약 500년간 정의현청이 있던 정의현성의 중심마을이다. 과거 제주의 행정구역인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하나다. 성읍민속마을은 제주 전통 초가 등 제주의 옛 모습과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어 지난 1984년 국가 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된 이후 올해로 40주년을 맞았다. 주민들이 초가집에 거주하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지만, 보전과 정주여건 개선이라는 오랜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전통문화 원형 보전이라는 가치와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겪는 불편이 오랜 기간 쌓이고 쌓여 문화재이자 관광지로서의 옛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제주의 가옥과 마을,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난 2차례 연재에 이어 살펴본다. ◇ 문화재 보전, 정주여건 개선 놓고 갈등 지난 2월 23일 오후 찾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1리 제주성읍마을의 한 초가집. 10평(33.05㎡)이 조금 넘는 작은 초가에 90세 넘은 할머니가 홀로 생활하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상방(마루)엔 각종 살림도구가 가득해 손님이 오더라도 함께 앉을 만한 공간이 여의찮아 할머니는 구들방에서 동네 주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100
제주의 전통가옥인 초가가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4·3과 6·25 전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도 그 명맥을 이어왔지만, 새롭고 편리한 문물이 쏟아져 들어온 근현대를 거치며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오랜 세월 전통을 이어온 장인(匠人)들이 있지만, 그들 역시 늙고 병들어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제주의 가옥과 마을,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3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4·3에도 멀쩡하던 초가…근현대화에 사라져 40대 중반인 기자가 제주 전통 초가에서 생활한 적은 없다. 다만 어렸을 적 친할아버지·할머니가 살던 초가집에 대한 추억은 간직하고 있다. 친할아버지·할머니댁은 제주시내에서 자동차로 1시간 남짓 떨어진 한림읍 동명리에 위치에 있었다. 마당을 중심으로 안거리('안채'를 뜻하는 제주어)와 밖거리(바깥채), 모커리(안거리와 밖거리 사이에 가로 높인 부속건물)가 'ㄷ'자 모양으로 된 세거리집이었다. 1938년생으로 올해 90세 가까이 된 아버지는 옛날 초가집에서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자매와 살던 이야기를 가끔 들려주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고조부 이전부터 대를 이어 살았던 오래된 집이었다. 하지만 가족은 4·3
제주도의 오름은 공식적으로 368개이다. 등록되지 않은 것까지 합하면 오름 수는 이를 넘어선다. 하루에 하나씩 오르더라도 1년에 다 탐방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 1년 동안 하루에 하나씩 올라도 못다 오를 오름들 오름의 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제주. '오름 왕국'이다. 생성 시기, 생태, 인간 삶과 얽힌 사연이 오름마다 각양각색이다. 분화구 모양, 화구 능선 등 오름의 '개성'을 알아내고, 이런저런 사연에 귀 기울이며, 정상에 서서 바다, 하늘, 들판을 바라보고, 살갗을 간지럽히는 바람결의 미세한 차이를 느끼는 것은 육지 등산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매력이라는 게 제주 오름들을 거의 다 올랐다는 김상수 거문오름 자연유산 해설사의 설명이었다. 오름을 오르다 보면 아름답고 소중한 제주 땅의 자연과 역사를 몸과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다. 용눈이 오름은 평생 제주 사진을 찍어 제주의 매력을 알렸던 김영갑 작가가 사랑했던 오름이다. 용눈이는 한 봉우리 안에 분화구가 셋 있다. 용암이 세 번 분출했음을 뜻한다. 세 분화구가 연출하는 지형은 마치 용이 누운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용눈이는 해발 247m, 비고 88m이다. 20분 정도 천천히 걸어 올라가면 부드러운 능
옛것이 주는 포근함과 정겨움이 있다. 돌담 사이로 난 올레 끝에 마주하는 초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품처럼 따스한 가장 제주다운 것 중 하나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과 흙, 나무, 풀을 이용해 지은 초가집을 보면 산천초목뿐만 아니라 사람도 자연을 거스르기보다 자연에 순응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제주의 가옥과 마을,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3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새 베고 집줄 놓고 초가지붕 새단장 지난 1월 16일 제주성읍민속마을. 아침 일찍부터 국가민속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된 '객주집'에서 '초가지붕 잇기'가 한창이었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집은 일반 농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정의고을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어 나그네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거나 술·음식을 팔았던 곳이다. 옛 제주 전통가옥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마을주민들이 눈과 비바람으로 썩고 낡아 못 쓰게 된 해묵은 지붕을 걷어내자 초가집 속살이 드러났다. 이어 햇볕에 잘 말린 누런 '새'(억새풀의 일종인 '띠'를 뜻하는 제주어)를 초가지붕 위에 두텁고 고르게 덮은 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미리 꼬아둔 집줄을 이용해 바둑판 모양
원초적 적막감과 아득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제주의 아름다움은 화산 활동에서 왔다. 제주도는 약 180만 년 전에 생성됐다는 게 정설이다. ◇ 제주 탄생의 비밀…불과 물의 격렬한 만남 제주도 일대는 원래 얕은 바다였다. 깊숙한 지하에서 올라온 뜨거운 마그마가 바닷물을 만나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면서 더는 물에 잠기지 않는 높이의 지형이 형성됐다. 해수면 위로 육지가 드러난 뒤에도 화산활동은 계속돼 마그마가 분출했고, 분출한 마그마는 용암 대지와 수많은 오름을 만들어냈다. 화산활동은 약 1천 년 전까지 계속됐을 정도로 제주도는 젊은 화산도이다. 화산 지형의 원형이 잘 보존된 편이다. ◇ 제주의 영혼…백록담과 오름 섬 가운데서 수만 년 전 강력한 마그마가 집중적으로 분출해 한라산(1,947m)이 탄생했으며, 약 2만5천 년 전 한라산 정상에서 다시 용암이 분출해 백록담이 생겨났다. 제주도가 곧 한라산, 한라산이 곧 제주도인 '신비의 땅'은 물과 불이 뜨겁게 조우한 결과였다. 제주도에서 산은 '오름'이라고 불린다. '오름'은 산 또는 봉우리를 뜻하는 제주 사투리. '높다' '오르다' '성스럽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작은 화산체인 오름은 용암 분출구였던 분화구
제주의 신화, 전설 속에서 신령스러운 동물인 '영물'(靈物)로 통하는 거북. 제주 사람들은 거북을 '용왕의 막내딸'이라 일컬으며 해녀 물질작업과 조업 안전, 마을의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오늘날 바다거북은 각종 개발사업으로 인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 탓에 멸종위기에 놓였다. 사람과 바다거북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제주의 역사·문화 속에서 바다거북의 문화적 의미를 짚어본 지난 연재에 이어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자연의벗과 함께 자연환경적 의미와 가치, 공존 방법에 대해 살펴본다. ◇ 위치추적기 달고 3천847㎞ 헤엄쳐 베트남까지 지난 2008년 10월 21일 제주 서귀포 중문해수욕장에 푸른바다거북이 방류됐다. 석 달 전 제주시 한경면 신창리 앞 정치망 그물에 걸렸다가 구조된 것으로, 당시 나이가 7∼10살로 추정된 암컷 거북이었다. 63㎝ 길이의 등딱지 앞부분에는 거북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위성추적장치가 부착됐다. 우리나라에서 바다거북에 위성추적장치를 부착해 이동 경로를 관찰한 것은 처음이었다. 손바닥만 한 위치추적기를 단 거북은 엉금엉금 모래사장을 기어가더니 유유히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이후에도 제주와 부산 등지에서 그물에 걸
장수(長壽)와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거북. 바당밭(바다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제주 사람들에게 거북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제주 전역에서 바다거북은 제줏말로 '요왕사자' 또는 '요왕할망 말젯똘애기'로 인식된다. 용왕의 신하인 사자(使者) 또는 용왕신의 막내딸아기 정도의 뜻이다. 어떤 의미일까.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제주의 역사·문화 속에서 바다거북의 문화적, 자연환경적 의미와 가치, 공존 방법에 대해 2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바다거북의 고향 제주 지난 1999년 10월 18일 오전 7시께 제주 서귀포시 중문해수욕장 모래 언덕. 힘겹게 알을 깨고 나온 새끼 바다거북 100여마리가 엉금엉금 기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목격됐다. 중문관광단지의 한 호텔 총지배인이던 패리드 슈케어(43)씨가 백사장을 산책하던 중 모래언덕 밑에서 우연히 이를 발견한 것이다. 바다거북은 보통 6∼8월에 모래사장에 알을 낳는다. 지열에 의해 2달가량 지난 뒤 부화하는데 당시 제주에 비가 많이 오면서 온도가 평년보다 낮아 뒤늦게 부화한 것으로 보인다는 전문가 의견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이로부터 3년 뒤 같은 곳에서 바다거북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2002년
2024년 '갑진년'은 푸른 용의 해다. 십이지 중 5번째인 용은 실체를 알 수 없는 상상 속 동물이지만 우리나라 문화 곳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용과 관련된 지명도 전국적으로 많이 있다. 제주에서도 역시 오름이나 마을명 등 곳곳에서 용을 찾아볼 수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이 임진년인 지난 2012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용과 관련된 전국 지명 1200여개 중 제주의 지명은 12개(마을 8, 산 2, 바위 1, 곶 1)였다. 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건 '용두암'(龍頭巖)이다. 용두암은 제주시 용담동 해안에 있는 용머리 모양 바위다. 겉으로 드러난 부분의 높이가 10m가량 된다. 제주국제공항 인근에 있는 무료 관광지인데다가 탁트인 바다 풍경을 감상하기 좋아서 내외국인 관광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용두암에는 용과 관련된 여러 전설이 있다. 우선 용왕의 사자가 한라산에 불로장생의 약초를 캐러 왔다가 산신이 쏜 화살에 맞아 몸은 바다에 잠기고 머리만 물 위에서 바위로 굳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용이 승천할 때 한라산 신령의 옥구슬을 입에 물고 가려다가 산신령이 분노해서 쏜 화살에 맞아 바다로 떨어지며 몸체는 바다에 잠기고 머리만 울부짖는 모습으로 남았다는 이야
이형상 목사는 조선시대 제주를 거쳐 간 목사 중에 제주 관련 기록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이다. 기록화첩과 지도, 운문·산문·편지 모음집, 장계, 지리서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이처럼 많은 기록을 남긴 건 역대 그 어떤 목사보다도 제주에 깊은 애정을 쏟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근래 들어 이형상의 제주목사 재임 당시 주요 행적과 자취를 되새겨보며 다각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재조명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긍정과 부정 사이" 이형상을 바라보는 제주의 시선' 지난 연재에 이어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이형상 목사의 삶을 들여다본다. ◇ 짧은 재임 기간 제주에 미친 큰 영향 숙종 28년인 1702년 3월 제주에 도착해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이듬해 3월 파직돼 6월 제주를 떠나기까지 15개월 가량 제주에 머물렀다. 실제로 제주목사로 재임한 기간은 1년 남짓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가 제주에 미친 영향은 30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이 목사에 대한 제주 사람들의 관심은 '당(堂) 오백과 절(卍) 오백' 전설과 함께 전해 내려오는 신당 파괴에 집중됐다. 학자들의 선행연구 역시 대부분 음사(淫祀·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라고 칭해지던 신당 철폐 등에 집중됐던 것이
제주삼다수가 ‘탄소 없는 섬’ 제주도를 위해 다양한 플라스틱 절감 노력을 실천하고 있다. 제주도는 2012년부터 탄소 없는 섬(Carbon Free Island, CFI)이라는 목표 아래 에너지 전환 등 탄소 감축을 위한 정책을 시행 중이다. 또 지난 5월 제주도는 ‘2040 플라스틱 제로 제주 기본계획’을 발표하고 2040년까지 플라스틱 사용률 50% 감축, 재활용률 100%를 이뤄내 플라스틱 폐기물로 인한 환경영향을 제로화하겠다고 밝혔다. 제주삼다수는 제주 대표 브랜드로서 제주도의 플라스틱 절감 정책에 발맞춰 친환경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제주삼다수, 플라스틱 사용량 줄이기 위해 카카오, 교육청 등과 손잡아 제주삼다수는 탄소 감축, 환경 보호를 위해 여러 기업 및 기관과 힘을 모으고 있다. 제주삼다수를 생산, 판매하는 제주개발공사는 해양 환경문제를 제주 중심으로 해결하기 위해 카카오와 ‘제주 해양 폐플라스틱 자원순환을 통한 ESG경영 실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수거한 제주 해양 폐플라스틱으로 업사이클 제품을 제작하고 판매 수익을 통한 취약계층 지원 등의 활동을 약속했다. 공사는 또 제주 도내 플라스틱 사용 절감과 친환경 자원순환 생태계 조성을 위해 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