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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 해병 3·4기 6·25 전투서 불패 신화 주역 활약
"'빨갱이'로 몰렸던 청년들 죽음 무릅쓰고 조국 지켰다"

 

1950년 한국전쟁의 판도를 단숨에 역전시켰던 인천상륙작전.

 

사람들은 2016년 7월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성공확률 5천분의 1'이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작전의 숨은 공로자인 한국 해군 첩보부대와 켈로부대(KLO·한국인으로 구성된 연합군 소속 스파이 부대) 대원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에는 그들 외에도 숨은 공로자가 많다.

 

인천상륙 및 서울수복작전에 참여했던 제주 출신 해병대원들도 대표적인 숨은 공로자로 꼽힌다.

 

그리고 그들의 참전 이면에는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비극 4·3의 슬픔이 깃들어 있다.

 

◇ 인천상륙작전의 주역 제주 출신 해병

 

제주 원도심인 동문로터리 한가운데 세워진 '해병혼탑'(海兵魂塔).

 

많은 사람이 찾는 동문재래시장이 바로 인근에 있어 타지역에서 온 관광객들도 한번쯤 눈여겨 봤을 법하다.

 

고대 이집트의 유물 오벨리스크처럼 하늘 높이 솟은 삼각뿔대 모양의 첨탑의 높이는 기단 1.83m를 포함해 10m에 이른다.

 

탑의 북쪽 면에는 해병혼(海兵魂)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휘호는 서예가 김광추 선생이 쓴 것으로, 그는 해병혼이란 글자 중 혼(魂)의 우변인 '鬼'(귀신 귀) 위에 붙은 꼭지(′)를 떼지 않으면 '죽은 혼'이 된다고 해서 삐침별(부수)를 뗀 한자를 썼다고 한다.

 

 

'여기 탐라(耽羅)의 푸른 넋이 엉켜 탑(塔)이 되다. 갈리운 땅덩이 위에 통일(統一)의 횃불을 높이 든 해병혼(海兵魂)은 솟았나니 평화(平和)를 염원(念願)하는 상(像) 앞에 겨레여! 옷깃을 여미이시라'

 

해병혼탑 기단에 적힌 문구는 탑이 세워진 이유를 짐작케 한다.

 

'귀신잡는 해병'으로 명성을 떨친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380명의 소규모 병력으로 창설됐다.

 

그리고 이듬해 6·25 전쟁을 맞았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됐고 두 달도 안 돼 경상도와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을 북한군에 내주었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는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북한군의 거센 공격을 저지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대반격을 준비해야만 했다.

 

이때 제주에서 학생, 교사, 농민, 여성 등 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이 군에 자진 입대했다.

 

여성 126명을 포함한 3천여명의 제주도민은 해병 3·4기 참전 용사로서 해병대 제2의 창군을 이뤄냈다.

 

이들은 1950년 9월 1일 지금의 제주항 서부두인 산지항에 마련된 수송선에 승선하면서 사실상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그들은 매우 용맹하게 싸웠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의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2004, 인물과사상사)은 인천상륙작전에 해병대 중대장으로 참여한 김연상 장군의 비망록을 인용해 그들의 용맹함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들(제주도 청년들)의 용맹성은 대단했다. 서로가 총알받이를 하겠다고 나섰을 정도로 충성심도 뛰어났다. (중략) 내가 전쟁을 세 번 치렀지만 지금 생각해도 당시 그들처럼 용맹스러운 군인은 별로 접해보지 못했다."

 

당시 인천상륙에 이어 서울수복작전 등의 선봉에 선 수많은 제주 출신 해병대원이 산화했다.

 

해병혼탑은 이들을 추념하기 위해 해병대 3·4기 제대 장병들이 주축이 돼 만들었다.

 

해병대 창설 11주년인 1960년 4월 15일 제막식이 열렸다.

 

해병대와 해병대전우회원 등은 오늘날에도 해병혼탑에서 헌화와 참배를 하고 있으며 해병대 3·4기가 산지항을 통해 출정한 9월 1일을 기념해 '제주해병대의 날'로 정했다.

 

 

◇ 해병대 무적 신화 속 제주4·3의 슬픔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작전, 도솔산지구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해병대 불패 신화의 주역으로 활약한 해병대 3·4기의 용맹함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4·3의 슬픔이 깃들어 있다.

 

어떻게든 용맹함을 보여서라도 자신이 소위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걸 보여야 했던 처절함, 생존의지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6·25 전쟁은 제주4·3의 연장선에 있었다.

 

1947년 3·1 발포사건 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출입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7년간 제주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군경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이 희생됐다.

 

1948년 4월 3일 좌익 세력의 무장봉기 당시 무장시위대와 군·경찰 및 우익 단체들은 서로를 '통일 반대 세력'이나 '빨갱이'로 규정하고 총부리를 겨눴다. 이후 이런 흐름은 걷잡을 수 없는 폭풍우처럼 섬 전체를 집어삼켰다.

 

'빨갱이 섬'으로 낙인찍힌 제주에서 이 기간 적게는 1만4천명, 많게는 3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주도민은 '빨갱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던 시절이어서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제주도민 청년 대부분이 나이만 되면 모두 입대했다고 한다.

 

참전 제주인은 육군 1만여 명, 해병 3000여 명을 합쳐 총 1만3000여 명에 달한다.

 

소설가 현기영은 1978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순이 삼촌'에서 '귀신 잡는 해병'이라고 용맹을 떨쳤던 초창기 해병대는 섬 출신 청년을 주축으로 이룩된 것이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용맹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건 따지고 보면 결국 반대급부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빨갱이란 누명을 뒤집어쓰고 몇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그들인지라 한번 여봐란듯이 용맹을 떨쳐 누명을 벗어 보이고 싶었으리라.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어쩌면 거기엔 보복적인 감정이 짙게 깔려 있지 않았을까? 이북 사람들에게 당한 것을 이북 사람에게 돌려준다는 식으로 말이다. 섬 청년들이 6·25 동란 때 보인 전사에 빛나는 용맹은 한때 군경 측에서 섬 주민이라면 무조건 좌익시해서 때려잡던 단세포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큰 오류를 저질렀나를 반증하는 것이 된다.'(순이 삼촌, 창비 83쪽)

 

김종민 제주4·3사건 중앙위원회 위원은 '4·3 이후 50년'(1999, 역사비평사)에서 "제주도에서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앞다투어 군에 입대했다. 어느 날 갑자기 집합해 이유도 모른 채 총살당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의지대로 총알을 피할 수 있는 전쟁터가 훨씬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토벌대에게 가족을 잃었거나 토벌대의 눈총을 받아 곤욕을 치렀던 사람일수록 '해병대 3기로 자원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는 군경력을 강조했다. 이러한 현상은 제주도가 얼마나 공포의 땅이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고, 빨갱이 잡는데 앞장선 사람이 어째서 빨갱이일 수 있느냐는 항변이자 자기변호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극심한 이념 갈등 속에 제주도민은 '죽느냐 사느냐'의 살얼음판을 걸어왔다.

 

그들의 삶의 역사는 비로소 이념 전쟁을 뛰어넘은 화해와 상생의 과정으로 인정받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 2018년 4월 3일 제주 4·3평화공원에서 열린 4·3희생자 추념식 추념사에서 "좌우의 극렬한 대립이 참혹한 역사의 비극을 낳았지만 4·3 희생자와 제주도민은 이념이 만든 불신과 증오를 뛰어 넘어섰다"며 "고 오창기님은 4·3 당시 군경에게 총상을 입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3기로 자원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고, 아내·부모·장모·처제를 모두 잃었던 고 김태생님은 애국의 혈서를 쓰고 군대에 지원했다. 4·3에서 '빨갱이'로 몰렸던 청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을 지켰다. 이념은 단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했다"고 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

 

[※ 이 기사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순이삼촌'(현기영),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강준만), '조봉암과 1950년대'(서중석), '일도1동 역사문화지'(제주도), 학교가 펴낸 우리고장 이야기(제주도교육청) 등 책자 등을 인용·참고해 6·25 전쟁과 제주4·3을 소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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