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위치한 '갓 전시관'.
조선시대 양반들이 외출할 때 일상적으로 썼던 모자인 '갓'을 테마로 한 전시관이 제주에 있다는 것에 관광객들은 의아해하곤 한다.
다양한 박물관들이 즐비해 제주를 '박물관 천국'이라 부르곤 하지만, '갓 전시관'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경복궁이나 한국민속촌 인근에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갓 전시관이 제주에 들어선 데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외할머니 고(故) 강군일(1883∼1952년) 선생, 어머니 고(故) 고정생(1907∼1992) 국가무형유산 갓일·양태 기능보유자, 장순자(84) 국가무형유산 갓일·양태 기능보유자, 그리고 장순자 선생의 딸 양금미(48) 이수자 등 4대(代)째 갓을 만드는 전통을 이어온 이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 어머니에서 딸로, 다시 딸에게로…4대째 전통 이어가
"고정생 할망이 일등이우다! 그 할망밖에 잘하는 사람이 어서….(고정생 할머니가 일등이예요. 그 할머니밖에 잘하는 사람이 없어요)"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서울에서 온 전문가가 제주시 삼양 일대 5개 마을을 돌며 양태일을 제일 잘하는 사람을 묻고 다니자 뭇사람들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한동안 대가 끊긴 국가무형유산 갓일·양태 기능보유자를 물색하기 위해 예부터 관모(冠帽, 옛날 벼슬아치들이 쓰던 모자) 공예가 발달한 제주까지 온 전문가들이었다.
장순자 선생의 어머니 고(故) 고정생 선생은 갑작스럽게 서울까지 가서 임명장을 받았고, 이렇게 인간문화재가 됐다.
1980년 11월 17일이었다.
고정생 선생은 오랜 세월 갓일, 그중에서도 양태 만드는 일을 해오던 제주의 소문난 장인(匠人)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갓을 만드는 일은 크게 3가지 공정으로 철저한 분업에 의해 이뤄진다.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실모양의 죽사(竹絲)를 만들고 이를 엮어 햇빛을 가리는 부분인 양태를 만드는 일, 말총을 엮어 원통 모양의 총모자를 만드는 일, 양태와 총모자를 연결해 먹칠과 옻칠을 통해 마감하는 일 등이다.
이 모든 공정을 거쳐 하나의 정교한 '갓'이 완성된다.
갓을 만드는 각각의 분야에서 장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을 '양태장', '총모자장', '입자장'이라 일컫는데 고정생 선생은 73세의 나이에 갓일·양태 기능보유자가 된 것이었다.
국가가 뒤늦게 기능보유자로 인정한 것일 뿐, 고정생 선생의 실력은 단연 최고였다.
"어머니는 양태를 정말 곱게 짰는데, 가장 질이 좋은 상품(上品)만을 만들어서 모두 주문 형태로 일이 들어왔어요. 하루에 4시간 주무시나 마나 밤낮으로 양태를 만들었죠."
장순자 선생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평생 양태 짜는 일만 해온 외골수였다.
봄철 제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고사리 채취는 물론 바다에서 물질할 시간도 없이 양태 짜는 일만 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 양태를 업으로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좋은 양태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가 양태 짜는 모습을 보며 자란 장순자 선생도 43살의 나이에 뒤늦게 본격적으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이가 많아 당시 국가에서 인정하는 후계자 신분이 될 수 없었지만 아무도 양태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좋은 대나무를 선별하고 가공해 실처럼 가늘게 대실(대오리)를 뽑고 엮는 일은 오랜 시간과 정성, 고도의 집중력을 요했다.
장사 일에 관심이 많았던 장순자 선생은 덜컥 맡게 된 후계자 신분이 너무나 부담이 됐고 어려움이 컸다.
심지어 양태일을 하지 않겠다고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1992년 어머니 고정생 선생이 세상을 뜨면서 마음을 다시 잡았다.
마지막으로 남긴 "양태일 열심히 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이 평생 가슴에 남았던 것이다.
장순자 선생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피나는 노력 끝에 지난 2000년 60세 나이에 어머니에 이어 국가무형문화유산 갓일·양태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지금은 그의 딸 양금미씨가 서울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생활하다 제주로 내려와 이수자 신분으로서 어머니의 뒤를 잇고 있다.
외할머니 강군일(1883∼1952년) 선생, 어머니 고정생(1907∼1992) 선생, 장순자 선생, 그리고 그의 딸 양금미 이수자까지 어머니에서 딸로 그리고 다시 딸에게로 4대(代)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 어머니 생애, 양태일 잊히지 않도록 갓 전시관 세워
"박물관에 가도 '갓'만 있지 '양태'는 없어요. 어머니 작품(양태)도 없고…. 갓일 그 역사를 잘 알아야 하는데 아쉽죠."
기능보유자가 된 이후 장순자 선생은 고인이 된 어머니의 생애와 양태일이 세상에서 잊히지 않도록 어머니의 역사를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에서 보내온 옛 문화재 관련 월간지를 읽기 시작하면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국가유산으로서 갓의 중요성, 더 나아가 갓의 역사, 제작과정을 알리고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한 전시관을 건립해야겠다는 꿈을….
그리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인간문화재로서 전시관을 설립하려면 작품 60점 이상을 갖춰야 한다는 규정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양태만 놓아두면 별 의미가 없으니 나는 한술 더 떠서 총모자, 탕건, 망건 작품도 모두 전시하자고…."
당시 말총을 엮어 만드는 관모공예 장인들을 찾아가 전시관 설립 의의를 설명하고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했고, 양태와 총모자를 조립한 갓 완성품도 직접 구입했다.
이뿐만 아니라 관모공예에 쓰이는 각종 도구 등도 수집하는 등 수집한 작품과 도구는 700여점에 달했다.
이 모두를 장순자 선생이 감귤 농사 수입과 국가유산청에서 나오는 보조금 등 사비를 들여 마련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시관 건립을 승인받기 위한 각종 행정절차 등 높은 문턱이 남아있었다.
"도청을 찾아갔는데 문화재 가치가 없다는 황당한 답변만 받았어요. 내가 인간문화재인데…. 너무 화가 나서 바로 비행기를 타고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에 가서 '제주에선 전시관 설립을 위해 3년을 도전해도 문화재 가치가 없다고 하는데 왜 나를 인간문화재로 지정해줬느냐'고 하소연과 함께 그간의 노력을 설명했어요. 그러자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오히려 제주도의 대응을 어이없어하며 설립비용을 보내겠다고 하더군요."
국가유산청에서 보내온 전시관 설립 예산 8억9000만원에다 장순자 선생이 마련한 800평(2644㎡) 부지를 기부하는 조건으로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09년 '갓 전시관'이 건립됐다.
갓 전시관은 장순자 선생의 노력과 신념, 어머니 고정생 선생의 혼이 담긴 결과물이었다.
장순자 선생은 "사람은 죽으면 끝이지만 그래도 작품과 흔적은 남겨야 하니까 이렇게 역사를 알리려고 외길로 걸어온 인생이었다"며 "지금도 외롭고 서러운 마음이 있다. (우리가) 신나게 운영할 수 있도록 제주도와 정부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의 딸 양금미 이수자는 "어머니를 도와드리다 여기까지 오게 됐지만 사실 양태일이 제 직업은 아니다. 직업이라고 하면 생계를 이을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로선 이 일로 생계유지가 안 되기 때문에 참 어려운 길"이라면서도 "할머니, 어머니가 이뤄놓으신 것을 제가 끝낼 수는 없으니 책임감도 크고 여러 가지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오랜 시간 현대화 시도를 했지만, 양태가 가진 고유의 대나무라는 소재를 이용한 현대화가 참 어렵다"며 "현재로서는 할머니, 어머니가 가진 기술적 경지에 일단 도달하는 게 목표"라고 전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