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3대 소주(燒酒) 중 하나로 개성 소주, 안동 소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술이 있다.
제주의 '고소리술'이다.
오늘날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록병 속의 소주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재료의 맛과 향을 날린 순도 95% 알코올에 물을 탄 희석식 소주와 달리 고소리술은 발효와 증류·숙성의 과정을 거쳐 원재료인 좁쌀의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는 전통 소주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지난달 25일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술익는집에서 제주 전통주인 고소리술의 명맥을 잇는 김희숙(65) 제주도 무형유산 기능 보유자를 만났다.
◇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제주 전통주 고소리술
제주에 '다끄다'라는 말이 있다.
'술을 얻기 위해 증류시키다'란 뜻의 제주어인데 '술 다끄다'라고 하면 '밑술을 증류시켜 소주를 내린다'는 뜻이 된다.
화학적 용어인 '증류'를 일컫는 제주어가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그 옛날 인위적으로 알코올 도수를 높인 증류주를 제주에서 만들어 마셨다는 사실도 신기하게 여겨질 법하다.
고소리술은 발효주인 오메기술을 증류해 만든 제주 전통주다.
증류기인 소줏고리를 뜻하는 제주어 '고소리'에서 나온 말로, 넓게는 고소리로 증류시켜 내린 술을 모두 고소리술이라 할 수 있다.
고소리술의 탄생은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3세기 말 고려가 중국 대륙을 평정한 원나라에 항복한 이후 제주는 삼별초 항전과 원의 일본 정벌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인다.
원나라는 제주를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보급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고 제주에 군마 생산용 목장을 설치했다.
많은 몽골인이 제주에 거주하면서 목축 기술과 함께 가져온 것이 바로 중동에서 발명돼 실크로드를 타고 전파됐던 증류 기술이었다.
당시로선 최신 과학기술이었던 알코올 증류법이 일찍부터 제주에 도입된 이유다.
화산섬 제주의 독특한 자연환경 속에 오랜 역사를 가진 오메기술이 증류법을 만나면서 새로운 맛과 향을 지닌 술로 변화했다.
과거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좁쌀로 오메기술을 빚는 것도 어려웠지만 오메기술을 다시 증류시켜 고소리술을 만든다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김희숙 장인은 "밥도 제대로 못 먹던 시절이었지만 제사 또는 명절 때, 또 신당에 제를 지낼 때 반드시 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어렵사리 집마다 술을 만들었다"며 또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판매용으로 술을 만들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형편이 어려워 좁쌀을 구하지 못하면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으로 밑술을 만들어 다시 고소리로 소주를 내려 만들었다.
실온에서 상하기 쉬운 오메기술(12∼15도)과 달리 고소리술은 알코올 도수가 40도가량 되기 때문에 오랜 기간 보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옛 고서를 보면 동국여지승람(1481)에 '혼인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춘다. 풍속에 소주를 많이 쓴다'고 했고, 제주로 유배 온 조선 중기 문신 김정(金淨)의 '제주풍토록'(1520)에는 '청주가 극히 귀해 겨울이건 여름이건 간에 소주를 사용한다'고 기록했다.
전통적 방법으로 고소리술을 만드는 데는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다.
오메기술을 무쇠솥에 넣고 그 위에 '고소리'를 얹어 아궁이에 불을 때 가열하면 오메기술의 알코올 성분이 먼저 증기로 변한다.
이때 고소리 윗부분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인 '장탱이'(넓은 옹기그릇을 뜻하는 제주어)에 찬물을 부어주면 알코올 증기가 다시 이슬로 맺히며 고소리 안쪽 벽을 타고 고소리 코를 통해 흘러내린다.
이를 작은 허벅(물을 길을 때 쓰는 항아리를 뜻하는 제주어)에 담아 2년 정도 숙성시키면 고소리술이 완성된다.
김 장인은 "술은 물보다 낮은 섭씨 78도에서 기체로 변하기 때문에 불 조절이 까다롭다"며 "증류를 통해 단순히 알코올 성분만 담기는 것이 아니라 원재료 향과 맛은 물론 숙성 과정에서 오래 보관하면 할수록 그 이상의 풍미를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장인은 "고소리술 하면 지금도 모르는 분이 많다"며 "이렇게 오메기술을 불로 진하게 고아 내린 소주가 진짜 정통 고소리술"이라고 강조했다.
◇ "제주 어머니들의 고된 삶의 흔적 이제는 문화유산"
고소리술에는 제주 어머니들의 고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겼다.
제주의 어머니들은 낮에는 밭일하거나 물때가 좋으면 바다로 달려가 해산물을 채취하고, 저녁에는 식구들 끼니를 챙기며 보살핀 뒤에야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고소리술을 만들었다.
"고소리술이 고소리 코를 통해 한 방울씩 항아리 안으로 떨어질 때 '살그랑 살그랑' 하는 소리가 나요. 그게 마치 자장가처럼 들려 제주 어머니들은 밤새 졸다 깨다가를 반복하면서 술을 고아냈어요"
김희숙 장인은 "이렇게 술을 내려받다 보면술 향기가 그대로 어머니 몸에 배는데 새벽녘이 다 돼서야 술 다끄는 일을 마무리하고 아이들 곁으로 가서 잠을 청하면 아이는 꿈속에서 고소리 술 향기를 은연중에 맡게 된다. 바로 어머니의 향기"라고 말했다.
그래서 고소리술의 별칭이 어머니의 향기를 닮았다고 해서 '모향주'(母香酒), 어머니를 생각하는 술이라 해서 '사모주'(思母酒)다.
또는 어머니의 땀 한 방울 눈물 한 방울처럼 뚝뚝 떨어진다고 해서 '한주'(汗酒)다.
김 장인은 "옛날에는 집마다 어머니들이 다 고소리술 장인이셨다. 그런데 지금은 점차 잊혀 가는 술이 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원천 기술이 한번 사라지면 그 원형을 다시 복원한다는 것은 너무 어렵고 그걸 뼈저리게 알고 있다"며 "한때 바람 앞의 등불처럼 사라질 뻔한 위기가 참 많았다"고 회고했다.
제주 전통주 오메기술과 고소리술은 성읍민속마을에서 10대를 넘게 살아온 강씨 가문의 며느리인 고(故) 이성화(1888∼1989) 선생, 다시 이 선생의 며느리인 고(故) 김을정(1925∼2021) 선생으로 이어졌다.
이 중 오메기술은 김을정 선생의 딸인 강경순(69) 장인이, 고소리술은 며느리 김희숙 장인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김희숙 장인은 "고소리 술 전통을 후세에 잘 전승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어깨가 무겁다"며 "지금은 아들까지 해서 4대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소리술에 대한 김 장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는 "고소리술은 단순한 '술'이 아닌 제주의 문화유산이자 제주 사람들의 삶과 추억이 담긴 술"이라고 강조했다.
김 장인은 "외국인들이 고소리술을 마셔보고 '맛있다'고 극찬해주곤 할 때 우리 술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하며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며 "앞으로 고소리술이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게 우리의 장기적 목표"라고 말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