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의 탁구 실력으로 중국을 다녀온 검프는 존 레넌과 함께 출연한 토크쇼에서 이런 말을 던졌다. “중국엔 종교도 없고, 사유재산도 없다.” 자신의 히트곡 ‘이매진(Imagine)’에서 그가 꿈꾸는 이상사회를 ‘종교도 없고, 소유도 없는 세상’이라고 노래했던 존 레넌은 깜짝 놀란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의문이 떠오른다. 모든 종교를 마약으로 규정하고, 사유재산을 제거한 마오쩌둥毛澤東의 혁명은 정말 이상사회를 만들어낸 걸까. ▲ 아스퍼거 증후군의 검프는 초절정의 집중력을 발휘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아스퍼거 증후군의 검프는 초절정의 집중력이라는 천재성을 발휘한다. 동네 악동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검프에게 검프의 유일한 친구인 제니는 “달려라!”고 소리친다. 검프는 그 한마디에 경주마처럼 달리기에 집중한다. 악동들을 따돌리는 것은 물론 대학 미식축구 경기장까지 질주한다. 검프의 집중력 높은 달리기는 미식축구 감독의 눈을 사로잡아 검프는 미식축구 명문 앨라배마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자원 입대한 검프는 군대에서도
포레스트 검프의 정신의학적 상태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는 애매하다. 일반지능은 통상적인 경계선인 80에 조금 미달하는 모양이다. 거기에 더해 자폐증 증상도 보이고, 아스퍼거 증후군의 특징도 보인다. 아스퍼거 증후군의 대표적 특징은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특정한 일이나 주제에만 몰두한다는 점이다. ▲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는 타인의 소망과 슬픔, 분노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오스트리아 소아과의사였던 한스 아스페르거(Hans Asperger)는 일반적인 자폐증상과는 차별화한 특징을 가진 그룹을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 명명했다. 그 특징은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교우관계 형성능력이 없다. 대화는 한곳으로만 쏠리고, 특정한 일이나 주제에만 몰두하고 동작도 어색하다. 또한 자신이 겪은 흥미로운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는 특징을 보여 한스 아스페르거는 이들을 ‘작은 교수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교수’라는 직책이 대개 편협한 자기세계에 갇힌 사람들이기는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세상 모든 일에 특별한 관심이 없지만 달리기에는 집중을 잘한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1994년)’는 설명이 필요 없는 걸작이다. 누가 어떤 기준에서 선정하든 영화 역사상 100대 명작에 반드시 포함될 만한 작품이다. 인생에서 소위 ‘천재’와 ‘그렇지 않은 이들’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 '운명론(fatalism)'과 '결정론 (determinism)’은 항상 어지럽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영화는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새털로 시작해서 다시 바람에 날리는 새털로 끝난다.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바람에 날리던 새털은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는 검프의 발치에 내려앉는다. 바람결을 따라 정처 없이 이리저리 날리던 새털의 목적지는 검프의 발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 검프가 아들을 학교버스에 태워 첫 등교를 시키고 버스 정류장에 하염없이 앉아 있을 때, 다시 하늘에 새털 하나가 이리저리 떠돌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새털은 어디에도 내려앉지 않고 하늘 멀리 어디론가 사라진
멜 깁슨의 ‘아포칼립토’는 두려움에 대한 보고서다.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두려움으로 일관한다. 사냥한 멧돼지 한 마리를 막대기에 매달고 의기양양하게 마을로 돌아가던 ‘표범 발’ 일행은 숲속에서 두려움에 질려 마을을 버리고 길을 떠난 다른 부락 사람들을 마주친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깨진다. ▲ 무너진 1500년대 초 마야사회에선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며 허우적댔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공포에 짓눌린 이웃부락 사람들은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지만 ‘표범 발’ 일행에겐 그 공포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전염된다. 모두의 마음속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자라기 시작한다. 말을 잃은 그들은 저마다의 생각에 빠진다. 마을 입구에 다다랐을 때 일행의 리더격인 ‘표범 발’ 아버지 ‘단단한 하늘’이 ‘표범 발’을 단속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눈에 서린 ‘막연한 두려움’을 경계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가 본 것을 말하지 마라. 공포는 전염되는 것이다.&
영화 ‘아포칼립토’에 등장하는 인디언의 이름은 소박하고 정겹다. 주인공은 ‘표범 발’이고 그의 아버지는 ‘단단한 하늘’이며 주인공의 외동아들은 ‘달리는 거북’이다. 주인공은 이름 그대로 뜀박질이 일품이다. ‘표범 발’의 아들은 ‘달리는 거북’이다. 꼼지락거리며 노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아버지 ‘단단한 하늘’은 차돌멩이처럼 작지만 다부지다. ▲ 인디언들에게 '시간'이란 현재의 한순간이 아니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인디언 이름은 케빈 코스트너가 감독·주연을 맡았던 영화의 제목 ‘늑대와 함께 춤을’일 듯하다. 평원에서 외롭게 늑대 한 마리를 벗 삼아 지내는 주인공을 멀리서 지켜보던 인디언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인디언들은 자연과 영혼을 두려워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달과 함께 걷다’도 있고, ‘숨죽인 천둥’도 있고, ‘수다스
주인공 ‘표범 발’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개기 일식’이다. 쿠쿨칸 피라미드 꼭대기에 인신공양 제물로 끌려간 ‘표범 발’은 같이 잡혀 온 ‘제물’들과 온몸에 파란 물감을 칠하고 죽음의 순간을 기다린다. 쿠쿨칸 신에게 바쳐질 인간 제물들에게는 모두 파란색이 칠해진다. 눈부시게 빛나는 ‘인디고 블루(indigo blue)’다. ▲ 권력자들은 독점한 지식과 정보를 부나 권력을 유지하거나 확대 재생산하는 데 동원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인디고 블루’는 하늘과 통하는 신성한 색이다. 그래서 바빌론의 거대한 문이나 이슬람 사원들도 인디고 블루를 애용했던 모양인데, 이는 마야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온몸에 눈부시게 ‘예쁜’ 파란 칠을 하고 줄지어 선 인간 제물들이 하나씩 제단에 묶여 산 채로 심장이 꺼내어지고, 여전히 숨 쉬는 심장은 신에게 바쳐진다. 심장을 빼앗긴 인간의 잘린 목은 쿠쿨칸의 91개 계단을 굴러 내려가고, 행사 진행요원들은 목 없는 몸통을 피라미드 아래로
‘아포칼립토’는 아포칼립스(Apocalypse·묵시록)의 그리스 어원이다. ‘신의 계시 실현’을 의미하기도 하고 거대한 사변의 발생으로 하나의 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종말은 항상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우리말로 하면 ‘판갈이’ 쯤 될까. ▲ 스페인은 마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끔찍한 폭력을 저질렀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옥의 ‘쿠쿨칸’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 ‘표범 발’을 8명의 추적자들이 집요하게 추적한다. 위기의 순간마다 어느 소녀가 노예상인들에게 했던 저주의 ‘계시’가 하나씩 이뤄지면서 노예상인 추적자들이 차례로 죽어간다. 우리나라 영화 ‘최종병기 활’이 표절했다고 논란이 일었던 쫄깃쫄깃한 장면들이다. 그렇게 7명의 추적자들이 하나씩 죽어가고 마지막 남은 최후의 추적자가 주인공 표범 발을 땅끝 해변까지 몰아붙인다. 더 도망갈 곳 없는 해변에 도달한 최후의 추적자와 표범 발앞에 거대한 스페인의 전함이 떠 있
마야의 대제사장은 인신공양의 한바탕 ‘축제’를 벌이기 위해 노예상인들을 고용한다. 노예상인들은 밀림을 헤치고 평화로운 마을들을 습격한다. 기껏해야 멧돼지 사냥이나 하던 평범한 ‘작은’ 마을 주민들의 전투력이나 무기로는 고도로 훈련된 노예상인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 웅장한 유물의 뒤편엔 '폭력'이 숨어 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작은 것들은 아름답지만 대개 야만적인 힘에 굴복하곤 한다. 마을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고 양민들은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한다. 노예의 시조는 처음부터 노예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노예의 자식은 대대로 노예가 된다. 노예상인들에 끌려 지옥의 행군 끝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거대도시’ 치첸잇자(Chichen Itza)의 악명 높은 ‘쿠쿨칸(Kukulkan)’ 피라미드다. 천문에 밝았던 마야인들은 ‘쿠쿨칸’ 피라미드 동서남북 4개의 계단을 91개씩 만들어 364계단을 구축하고, 꼭대기 계단 하나를 더해 정확히 365계단을 쌓았다. 그다음 매년 춘분과 추분에 꼭대기의 그림자
쏟아지는 TV 프로그램, 광고, 인터넷 정보, SNS가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때론 없던 욕망까지 열심히 발굴해낸다. 욕망이 커지는 만큼 소비를 늘릴 수 있다면 문제없겠지만, 다함께 소비를 무한대로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모두들 불행해진다. ▲ 현대자본주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찬양하고 고무시킨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영화 ‘아포칼립토’는 마야족 작은 마을 주민들의 사냥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을의 젊은 사냥꾼들이 울창한 숲속에서 멧돼지처럼 생긴 짐승 한마리를 쫓는다. 10여명이 창을 들고 숲속에서 멧돼지와 숨바꼭질하며 몰아 결국 포획에 성공한다. 그 자리에서 자신들의 소중한 양식이 되어줄 멧돼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숨통을 끊는다. 그리고 즉석에서 배분이 이루어진다. 배분의 순서는 사냥에서 세운 공로의 정도를 기준으로 한다. 모두 큰 불만 없이 분배가 완료된다. 나뭇가지에 멧돼지를 매달고 마을로 돌아오는 젊은이들을 마을의 아녀자들이 몰려나와 맞이한다. 갈리아를 정복하고 로마시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개선행진을 벌이는 시저의 군대가 부럽지 않다. 마을에서는 멧돼지 한 마리로 밤늦
‘아포칼립토(Apokalypto·2006)’는 영화배우로 익숙한 멜 깁슨이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은 대작 영화다. 배우가 순간적인 객기로 감독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멜 깁슨은 감독으로도 출중한 기량을 보여준다. 2004년 감독 데뷔작인 ‘예수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에서도 만만치 않은 기량을 뽐낸 바 있다. ▲ 묵시록엔 ;하나의 위대한 문명은 내부로부터 먼저 붕괴되고, 그다음에 외부 세력에 정복당한다'고 명시돼 있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아포칼립토는 미국에서 만든 ‘외국어 영화’ 같다. 모든 대사를 사라진 고대언어 ‘아람어’로 채웠던 2004년 작 ‘예수의 수난’처럼 ‘아포칼립토’에서도 사라진 마야 언어를 최대한 복원해 사용하고 영어 자막을 서비스했다. ‘자막 영화’ 보기를 끔찍할 정도로 싫어하는 미국 관객들에게 고집스럽게 영어 자막 영화를 들이대는 멜 깁슨의 오기와 원칙이 감탄스럽다. 메가폰을 잡은
폭력조직 ‘골드문’의 회장 석동출이 의문사를 당하고, 조직의 2인자 정청(황정민)과 3인자 이중구(박성웅)의 ‘왕좌의 게임’이 본격화한다. 폭력조직의 후계구도 경쟁에 난데없이 경찰이라는 ‘외세’까지 개입하면서 판이 어지럽게 돌아간다. ▲ 담장 위를 걷는 경계인은 자신을 '도구'가 아니라 '정'으로 받아주는 사람들 쪽으로 떨어지고 싶어 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폭력조직과 경찰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는 와중에 조직의 내부정보가 거의 실시간으로 경찰에 털리는 것을 눈치챈 2인자 정청은 중국 최고의 해커를 동원해 경찰이 조직에 심어놓은 빨대가 다름 아닌 자신의 형제와 같은 최측근 이자성(이정재)임을 알게 되고 깊은 번뇌에 빠진다. 결국 정청은 조직을 배반하는 한이 있어도 ‘브라더’ 이자성을 보호하기로 한다. 열심히 계산기 두드려보는 ‘타산’보다 ‘정’이 앞선다. 6년 전 목포바닥에서부터 다져온 ‘정’을 저버릴 수 없다. 이자성도 조직에서 자신의
경찰은 우리사회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어야 한다. 제아무리 짙은 어둠도 먼동이 트면 물러가게 마련인데, ‘골드문’이라는 어둠의 세력은 아무리 빛을 비춰도 물러가기는커녕 어둠은 점점 짙어지고 넓어진다. 이대로 뒀다가는 미국의 마피아처럼 통제불능 상태가 될지도 모르겠다. ▲ 하얀 종이 위의 검은 점을 검정 물감으로 지우려면 결국 종이 전체가 검어진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어둠을 몰아내야 할 경찰은 점점 초조해지고 위기감에 사로잡힌다. 몽양 여운형 선생도 해방정국의 혼란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비상한 시국에는 비상한 사람들이 비상한 각오로 비상한 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특단의 대책을 세운다. 여운형 선생처럼 경찰청의 ‘비상한 사람들’이 ‘일이 틀어지면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는 ‘비상한 각오’로 아예 경찰을 ‘골드문’ 조직 회장에 앉히려는 ‘비상한 작전’에 들어간다. ‘비상(非常)’이란 말 그대로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