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호(1943~2021)는 사실주의 화가로 한국의 옛 기물이나 제주의 풍광을 즐겨 그렸다. 제주시 도남 출신으로 1963년 오현고를 졸업하고, 1967년 홍익대 서양화과와 조선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개인전 17회, 2010년 17회 개인전 이후 지병이 악화되어 작품 활동을 중단하였다. 국내외 다수의 개인전과 한·러 교류전, 아시아미술대전, 10개국 예술교류전, 서양화 중견작가 초대전 등에 참가하였다. 제주대 강사, 한국미술협회제주도지부장, 한국예총제주도지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문우회, 상형전, 이상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2015년 연갤러리 특별기획전 '강영호 화백 초대전'을 마지막으로 투병하다가 2021년 8월 타계하였다. '탐라이야기'(1993년)는 강영호 화가가 줄곧 관심을 가져온 제주의 옛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탐라의 옛 사람들이 남기고 간 유물에서 진정한 제주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한 작품이다. 애기대백이 허벅, 각지불, 불상, 석류가 서로 뿜어내는 조형적 아름다움이 과거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탐라이야기는 화면 전체가 과거의 회상처럼 보이려고 면을 겹치고 있으며, 점묘적인 마티에르가 사물 서로가 공간
부현일(1939~2022)의 호는 남도(南島),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서 출생했다. 작은 키에 어진 심성을 가진 사람 좋은 아저씨 인상을 가진 화가다. 한국화에서 매란국죽의 사군자를 가르치던 부현일은 마치 서당 훈장처럼 이해심이 많은 인물로 천성이 온순한 성격에다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는 제주대 한국화 교수였다. 1964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5년 동안 부산·마산 등지에서 중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1979년 제주대 미술교육과 강사, 1980년 전임강사로 임용되면서 제주대 미술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하였다. 1980년 제주 산호다방에서 제주풍경을 그린 20점으로 첫 개인전을 시작해 2008년까지 7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자연에 대해 진지하고 언제나 외경심(畏敬心)을 가지면서, 실경(實景)에 바탕을 둔 제주의 풍광을 소탈한 필치로 담아내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제주도립미술관 관장을 역임하는 동안 온갖 이해관계에 따르는 예술 행정가의 쓰라린 어려움을 절감하면서 그 휴유증으로 인해 결국 암과 투병하는 말년을 보냈다. 국내외 다수의 초대전 및 교류전에 출품하였다. 한국미술협회, 제주한국화협회, 정연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가버린 인생 돌이킬 수 없다 시간은 조석이 밀려오듯 많은 사람들을 어디론가 데려간다. 그 누구도 시간에 저항할 수가 없다는 것은 진리이며, 그 시간의 물살을 거슬러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세를 상상한다. 특히 종교인들은 현실의 편안함과 더불어 더욱 적극적으로 영생을 꿈꾼다. 그렇다. 종교는 믿는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믿는다는 것은 생각일 뿐 실존은 바뀔 수가 없다. 그 누구도 부활이라는 것에 대해 반증하지 못하였으므로 그것은 현실적으로 착각에 불과하다. 그저 생각뿐인 것. 삶이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감이 있다. 생명체의 태어남과 죽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모르는 생명체의 위대한 행로는 그 자페로 경이롭다. 최근 작고한 제주 작가는 누구인가. 2020년대 작고한 제주 작가는 강용택, 강광, 강영호, 백광익, 강길원 등 5명이다. 강광은 제주대 강사로 왔었고, 강길원은 제주대 교수로 재임했는데 본적이 육지 출신이지만, 직업상 제주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후진을 가르쳤다. 김창열은 한국전쟁 당시 경찰관으로 제주에 온 화가다. 그 인연으로 저지리 예술인 마을에 김창열미술관이 건립되었다. 강용택, 강영호, 백광익은 토박이다. 제주
서양화가 백성원의 제5회 개인전이 제주시 아라갤러리(대표 이숙희)에서 신작 15점, 오브제 9점 등 총 24점을 가지고 2024년 7월 13일부터 7월 28일까지 2주간 열리고 있다. 제주를 시각혼합 기법으로 바라보는 백 화가는 새로움을 시도하기 위해 신촌을 미학적으로 방황하던 시절 만난 제2의 회화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백성원은 세계미술사에서 점묘법이라는 신인상주의 방법을 수용하면서도 제주적인 회화의 창작방법론으로 전환하려는 현대미술의 응용적인 개척자가 돼 고뇌하고 있는 작가이다. 오늘따라 신천의 기운이 리듬을 타고 맑은 기운이 느껴진다. <편집자 주> 그림은 마음 속 언어, 존재 드러내기 보는 것은 최고의 즐거움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속엣 말을 해버리면 후련한 것과 같이 말이다. 아름다움에는 내면적 즐거움을 주는 황홀함과 감미로움이 숨어있는데 그림은 시를 읽으면 떠오르는 기쁨처럼 어떤 형태를 그려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매우 감미로운 감정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운 미적 감정은 때로 신비롭기도 하다. 우리 인간에게는 어떤 영성(靈性)이 있다. 자신마저도 그 깊이를 모르는 창조적
풍경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조화 풍경화는 눈 앞에 펼쳐진 전경(前景)을 그린 그림이다. 그것이 자연 경관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경관일 수도 있는데 인간이 눈에 그대로 보이는 경치를 서양화의 한 장르로 표현한 것이다. 풍경은 자연 속에서도 변하고, 삶의 공간에서도 변한다. 숲이 자라고 하천이 물길을 바꾸고 해안이 침식되며, 산과 계곡이 깎여나간다. 그 어떤 것도 그대로 인 것이 없다. 변화의 크기와 속도가 다를 뿐 지구 공간을 구성하는 사물들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시골 또는 도시의 형태도 늘 달라진다. 풍경은 한자 바람 풍(風)자와 경치 경(景)자로 구성되었다. 풍(風)은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바람, 흘레하다, 울리다, 뜨다(汎), 풍속, 경치, 위엄, 병풍, 모양을 말하고, 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나타내는 표현을 말한다, 경(景)이란 ‘경치, 빛, 밝다, 크다, 형상하다, 사모하다’ 로도 읽는다. 주로 사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상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그러므로 풍경이란 보이지 않는 의미와 보이는 대상의 아름다움을 서로 어울리도록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풍경화의 개념이 서양화를 그리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되묻기 우리는 생각을 하며 산다. 어느 오름이라고 이름을 들으면, 벌써 그곳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갈 것인가? 하고 아는 만큼 생각을 하게 된다. 만일 그 곳이 이름만 들어 알 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라면 상황은 훨씬 심각하다. 장소가 외국이면 그곳에 가본 적이 없으므로, 우리는 어디? 어떤 곳인지 몰라 매우 당황하게 된다.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분명 알지 못하는 것에 늘 긴장한다. 우리 문명은 지금껏 알지 못하는 것들을 소통시켜 온 것에 다름 아니다. 이름이라도 있으면 유추하거나 짐작을 할 수 있을 텐데, 또 그 이름 자체에서 드러나는 의미를 찾으려고 할 텐데 말이다. 그러니까 이름은 의미를 쉽게 구분하거나 찾으려는 행위의 결과다. 어떤 이름인 경우 생긴 모양이나 혹은 어떤 사람의 사건과 관련이 있었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특별함이 있는 이유가 있을 때 명명된다. 결국 이름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서로 알 수 있도록 공동 사용하기 위한 소통의 목적으로 지어졌다. 그래서 이름에는 나름대로 스스로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한자 문화권에 사는 우리는 한글에 많은 한자를 병행해야만 이해하는 글이 많다. 이는 한글도 한
1. 남반미술에서부터 20세기 일본 미술 일본의 근대는 메이지 유신과 함께 찾아왔다. 메이지 시대는 일본의 신구(新舊) 세력이 새롭게 재편되는 격동의 시기이기도 한다. 1889년은 일본 제국 헌법이 발포된 해이고 이어서 이듬해 교육칙어가 발포되면서 천황을 중심으로 한 근대국가체제가 확립되어 갔다. 이렇듯 일본의 근대적인 미술은 곧 그런 근대체제 위에서 피어난 것이지만 일본의 근대미술은 메이지 유신과 함께 시작된 것은 아니다.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내항으로부터 1858년의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에 의해 에도 막부에 서양화(西洋化)의 시작을 알렸고, 쇄국정책의 붕괴와 함께 바야흐로 일본근대체제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일본의 개항 항구 요코하마에는 미국, 러시아, 영국의 상선들이 빈번히 왕래하면서 외국인 거류지로 정비되어 갔다. 요코하마는 국제도시로써 서양의 문물과 기술, 예술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다.1) 일본미술사에서 서양 풍경화의 일본 유입은 1571년 최초의 포르투갈 배가 나가사키에 입항하면서부터 서서히 점화되고 있었다. 1639년(寬永 16)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 막부가 쇄국정책을 실행하기까지 약 70년간 외국 무역 상관(商館)이 운
풍경화(landscape painting)는 자연의 경치를 그린 그림, 혹은 자연과 함께 생활하는 전경을 그린 그림이다. 거기에는 산, 숲, 들판, 바다, 강, 호수, 개울, 계곡, 마을 등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모든 아름다움에는 관능적인 감정이 깊숙이 숨어있다. 풍경화는 회화의 한 장르로써, 르네상스 시기에 독립적으로 생겨난 개념이다. 물론 풍경화라는 장르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풍경 그림들은 동‧서양에 존재했다. 서양의 풍경화를 동양에서는 ‘산수화(山水畵)’라고 불렀지만, 두 지역이 종교적 세계관이 달랐고, 기름으로 그리는 유화와 물로 그리는 수묵이라는 재료가 다른 만큼 그 기법 또한 달랐으며, 특히 자연을 대하는 방식에서 크게 차이가 났다. 독립적인 풍경화가 나타나기 전, 순수한 미적 관조의 풍경을 그린 그림은 B.C. 30~20년경 ‘리비아의 저택(Villa of Livia)’에 프레스코로 그려진 아름다운 정원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지금으로부터 2100년 전 그려진 풍경 그림으로 아름다운 숲속에 과일나무와 자유롭고 노는 여러 마리 새가 그려졌다. 장소가 지하실 실내 윗벽에 초록과 청색의 싱그러운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도록 시원한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바로 걷는 자는 잘 넘어지지 않는다. 비열한 자를 칭찬하는 것은 선한 자를 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이다. 우리가 평소에 운동을 하는 것은 무언가에 대비하고자 함이며, 생명은 움직임에 의해서 존속된다. 살아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은 것은 굳어버린다. 생명활동은 부단하게 움직여 열에너지를 만들며 굳지 않게 살아가려는 것이다. 만사가 그렇듯 하나 이상의 대상과 접촉하면서 부딪치민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주 만물과 자연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공동체 사회도 생명체 개인들이 살아가려고 모여든 인간종의 무리일 뿐 자연적 존재이면서 사회적 존재인 우리는 부딪치며 나아가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2024년 지금 우리 사회는 매우 정치가 탁해서 당장 눈앞의 내일이 불안할 지경이다. 민의와 반대로 가는 지도자가 연일 국민과 다투고 있는 하수의 리더쉽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버티다가 포기한 시민들은 최후의 결단처럼 마치 적자생존에 내몰린 생물마냥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가고 있다. 민주주의 앞에서 해서는 안 될 행위 ‘각자도생'(各自圖生,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한다), 참 기가 막힌 일이다. 풍경화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지
김산의 상징적인 담론들 ‘폭낭’은 제주어로 팽나무를 말한다. 제주에서 폭낭은 깊은 의미가 있다. 폭낭은 오래된 마을일수록 수령(樹齡)과 형태가 을씨년스러울만큼 기괴하지만 그 나무의 역할도 중요하다. 특히 바닷가 마을일수록 그 형태가 상상을 초월하며 풍향수(風向樹)로써 한라산을 향해 빗자루처럼 누워있다. 폭낭의 역할 중 한 가지는 폭낭이 있는 곳이 마을의 중심지가 된다는 사실이다. 평소에는 더위를 쫓는 쉼터의 역할도 하고, 마을 소식도 서로 전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지만 긴급할 때 마을 공회(公會)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또한 폭낭은 대표적인 神木(신목)이 되기도 한다. 본향당 안에 오방색 물색(컬러)을 걸고 신체(神體)가 되는 것이다. 해안 마을은 신체가 석상이나 잡목이 되지만 중산간 마을에선 폭낭이 주요 신체가 되고 있다. 김산이 폭낭을 마을의 중요 사건을 지켜본 목격자, 시간의 증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 나무가 인간보다 훨씬 오래도록 역사 앞에 의연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풍경’이라는 담론은 풍경 속에 은닉(隱匿)된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찾는 것이었다. 멀리서 자연 그대로 보이는 풍경도 가까이에서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으로 생채기를 입고 있다.
김산은 최남단 항구도시 모슬포 출신의 젊은 작가로 2023년 제49회 제주특별자치도미술대전 대상 작가이다. 2024년 3월 20일부터 4월 8일까지 서울 인사아트센터내 제주갤러리에서 유화작품 22점으로 김산 초대개인전 ‘염원’을 선보이고 있다. 화가 김산은 제주대학교에 미술학과에 출강하고 있으며 현재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2010년 대학 2학년 때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9회의 개인전과 70여 회의 초대전·단체전에 참가했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신진 작가 발굴 프로그램인 ‘젊은 모색 2021’에 선정된 바 있는 유망작가이며, 2024년 3월 이중섭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함께 열고 있다. 이번 서울 제주갤러리 초대전 ‘염원’은 작가가 죽음의 문턱에서 느꼈던 삶의 소중함에 대한 염원(念願)을 통해, 생명의 근원은 자연이며, 자연과 사람이 서로 교감해야만 상생공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자각에는 고향에서 느꼈던 ‘본향(本鄕)’에 대한 깊은 애정의 결과이며, 본향은 제주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써 거기에서 나오는 ‘본향의식’이야말로 자신의 정체성의 본질이라는 것을 작품마다 진득하게 담고 있다. 지나온 시간의 흔적을
영상 시대에 거꾸로 가는 고민철의 행보 지금은 로컬리티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서울과 지방이라는 2분법적 구도의 경향론(京鄕論)은 중심부와 주변부로 차별하면서 문화의 지배구조를 이뤘지만, 오늘날은 그 구조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다원주의(多元主義)의 영향도 한 몫을 하고 있고, 지역으로 향하는 이주 인구의 확대, 시장경제의 세계화 전략이 지역의 특성들을 균일하게 일반화하면서 차이가 사라지고 있다. 오히려 새로운 문화적 대안으로서 로컬리티가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어디에나 있다. 지역 간 색깔이 점점 줄어들면서 제주 로컬리즘이라는 정체성은 과거 농업사회와 해양·목축사회에 기반을 두었던 풍토적인 삶에서 드러났었지만, 점점 그 정체성마저 해당 삶의 방편들이 산업사회로 대체됨으로써 사실상 점점 축소되거나 소멸되고 있다. 지금의 현실은 하이브리드 시대다. 이 혼성(混成)의 시대는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한데 마치 구산업(석유)이 신산업(전기)으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병존하는 과도기처럼, 혹은 이주하는 종족과 원주민이 새로 섞이면서 하나의 퓨전 문화가 되는 변화의 운동단계가 되고 있다. 갈수록 인류가 지구인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