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고뫼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독자 김수오씨 제공> 어버이날이었던 8일 오랜만에 ‘오름’에 올랐다. 연휴의 마지막 날 산바람이나 쐬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사실 주목적은 집안의 선묘를 합장(合葬)하기 위한 준비의 산행이었다. 다소 힘들게 장례지도사와 오른 ‘녹고뫼’ 정상은 장관이었다. 가는 빗방울 속에 서녘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국내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파노라마다. 절경이 따로 없다. “벌초 때지만 그래도 수시로 오른 내가 이런 감동을 느끼는데 뭍 관광객들은 이런 광경에 가슴이 벅차리라.” 잠시 숨을 고르며 그 녹고뫼 정상에서 상념에 잠겼다. 내 고향 땅 제주의 가치는 어느 지점에서 가장 빛나는가? 눈 앞에 제주의 오름 군락군이 펼쳐졌다. 제주가 그동안 유네스코(UNESCO)의 세계자연유산이자 지질공원으로 이름을 올린 그 한복판엔 어김 없이 기생화산, 즉 ‘오름’이 있다. 물론 제주 안에서 그 이름은 오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악(岳), 봉(峰), 뫼(메) 등 제각각의 이름이 따로 있기도 하다. 기생화산(parasitic volcano)이 아닌 측화산(側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2항으로 구성돼 있다. 그 2항은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 대한민국 헌법 제1조, 그리고 '종이돌'(paper Stones) [제이누리 그래픽] 잠시 우리의 헌법 이야기를 논외로 하고 한 정치학자의 진술을 옮겨 본다. “민주주의는 적어도 정치적 자유를 유지하면서 갈등을 평화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방식이다. 이것은 갈등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내전(civil war)보다 더 나은 방법임이 분명하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는다. 언제나 청렴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민중(people)들이 평화와 자유 속에서 살도록 한다.” ▲ 아담 쉐보르스키 교수 미국의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Adam Przeworski)가 한 말이다. 미국 뉴욕대 정치학과 교수다. 폴란드 출신으로 이제 만 76세다. 민주주의의 본질, 민주화 이행의 조건, 민주주의와 시장의 관계 등에 관한 주요저작을 냈다. 한국정치학계에서 이론가로 꼽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
대학 캠퍼스는 꽃으로 물들었다. 온통 진홍·노랑 빛깔이 형형색색 앞다퉈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해 봄 한껏 꽃망울을 터뜨리던 진달래와 벚꽃의 향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죄다 생명의 기운을 한껏 틔우는데 책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교정 벤치에 앉아 한없는 낭만에 사로잡혔다. 청춘이었다.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1986년 새내기 대학생이 돼 들어선 캠퍼스의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혈기왕성한 스물의 나이에 ‘제주촌놈’이 만난 서울의 대학 캠퍼스 풍경은 한껏 마음을 부풀게 만들었다. 사실 20년 세월을 제주촌놈으로 살았던 지라 서울 땅을 밟아본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한강이 그리 긴지, 강폭이 그리 넓은 지 버스를 타고 한참을 걸려 한강대교를 건너서야 알았다. TV에서나 보던 기차 역시 그 시절 처음 눈으로 구경(?)했다. ‘촌놈’이었다. 하지만 따뜻한 봄바람에 일렁이던 가슴은 우리네 그 시절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입학하고 나서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동창들 얼굴도 모르던 시점에 우린 일주일여간의 ‘학생중앙군사학교’ 입교와 훈련에 돌입했다. 고교시절 교련교육의 연장선이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2002년 9월의 일이다. 세계적 음료기업 미국 코카콜라의 아시아담당 사장이 은밀히 제주도지사 집무실을 찾았다. 그가 제주행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민선 2기에 이어 3기까지 연거푸 재선에 성공한 도지사의 의중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먹는샘물 ‘제주삼다수’를 생산하는 기업 제주개발공사의 인수 가능성 타진이 목적이다. 지사로부터 명쾌한 답은 얻지 못했지만 그는 지사를 접견하고 난 뒤 곧바로 조천읍 교래리 제주개발공사로 달려갔다. 당시 지사의 측근이자 선거공신이었던 개발공사 사장을 만나 다양한 경로의 의견을 주고 받았다. 그가 내세운 논리는 “이왕 민영화 할 생각이면 세계적인 기업인 우리에게 넘겨 달라. 값은 후하게 쳐주겠다”는 것이었다. 일찌감치 제주삼다수의 가능성을 주목한 글로벌 기업다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아무리 도지사로 당선됐다한들 ‘도민의 물’이자 ‘도민의 공기업’을 민간에 팔아치우겠다는 발상은 제주도민사회가 용납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삼다수를 제조하는 제주지방개발공사는 지금도 제주도가
제20대 총선이 60일 앞으로 다가왔다. 정치의 계절이다. 후보들의 움직임이 어느 때보다 바쁘다. 조금이라도 더 인지도를 올려야 할 정치신인이나 익히 알려져 있더라도 더 지지율을 끌어 올려야 할 경륜의 후보도 다 속이 타들어가는 시점이다. 그 모든 후보들이 지금 사활을 걸고 달려드는 격전장이 있다. 여론조사다. 본선에 가기도 전 각 당내 경선마저도 여론조사 결과로 판정이 날 상황이기에 더 그렇다. 하지만 설 직전 제주도내 여러 언론기관이 공동·합동여론조사의 이름으로 그 결과를 내놨지만 각기 달랐다. 헷갈릴 노릇이다. 여론조사는 처음에 시장조사에서 발전했다. 정치문제에 관한 여론의 반응을 조사하기 위해 시장조사기법을 이용한 실험을 시작한 건 1935년 미국의 통계학자 조지 갤럽에 의해서다. 미국의 당면한 정치·사회적 문제들에 관한 전국적인 의견조사를 실시하기 시작한 이후 미국에서는 영리단체와 학술기관에서 실시하는 여론조사가 가속화되었다. 후에 미국여론조사협회(일명 갤럽 조사)의 기관지가 된 〈계간 여론 Public Opinion Quarterly〉이 창간되면서 여론조사는 대세가 됐다. 한국의 경우 선거판에서 여론조사가 자리를 잡은 건
8만6960명 중 3명을 만났다. 오랜 만에 옛 정을 주고 받으며 어젯(25일) 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참고로 8만6960명은 23일부터 몰아친 폭설과 강풍으로 제주에 발이 묶였던 제주체류객 인원이다. 국토교통부가 공식 집계한 수치다. 대학시절 선·후배 사이인 그 네 명은 저녁을 같이 하며 아스라이 옛 추억으로 빠져 들었다. 감사의 마음도 잊지 않았다. “항공기를 타지 못한 덕(?)에 소중한 시간이 만들어졌다”며 함박 웃음꽃도 피웠다. 천재지변으로 가지 못한 상황이니 “오늘 자리는 하늘이 만들어줬다”며 천지신명에게 감사도 드렸다. 그 세 사람은 지난 22일 오후 제주로 왔다. 1박2일 일정이 4박5일 일정으로 뒤바뀌면서 세 사람은 애초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23일 밤께엔 월요일 출근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이다. 너무도 초라한 인간이란 존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음과 아울러 자연의 힘을 다시 깨달았다는 ‘득도’(?)의 언사가 서슴 없이 나왔다. 그 제주체류객 세 명은 그래서 “기왕 이렇게 된 것”이란 마음을 다잡고 렌터카
‘정치낭인’이란 말이 있다.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가 일본군대와 정치낭인들을 앞세워 대한제국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 이후 널리 알려진 말이다. ‘낭인(浪人)’이란 마땅한 일자리가 없거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놀고 있는 사람이다. 말 그대로 백수다. 정치판에서 이들은 한마디로 정치판을 유랑하는 인사들이다. 이 선거판 저 선거판을 기웃거린다. 지방선거든, 국회의원 총선이든, 대선이든 가리지 않는다. 어느 선거판이든 ‘이권’(利權)이 눈에 보이거나, 아니면 그 선거판에서 무언가 역할을 했을 때 지위 등의 자리를 보상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이 ‘정치낭인’들의 움직임은 민첩하고 부산하다. 특별한 신념이 있거나 아니면 공적인 목표를 갖고 선거에 임하는 것이 아니란 게 대체로 이들 정치낭인들의 공통된 특성이다. 물론 정치낭인들의 경우에도 두 부류가 있다. ‘정치브로커’ 역할을 하며 스스로의 안위를 보장받고 장차엔 ‘지위’까지 보상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적극적 낭인’이 있는 반면 원하지 않지
▲ 양성철/ 발행.편집인 지금으로부터 13년여 전인 2002년 1월 중순. ‘일본의 제주도’로 불리는 일본 열도의 최남방 현 오키나와로 갔다. 그 때는 제주도가 ‘국제자유도시’ 간판을 내걸기 직전이었다. 1995년부터 같은 전략을 추진한 오키나와의 실태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탐라국처럼 류쿠(琉球)란 독립국의 평화교류 전통을 부각, 한·중·일 동북아 3국의 요충지에 자리했던 지정학적 강점을 염두에 둔 오키나와의 전략이 ‘국제도시’였다. 일주일 여 현지 실태를 취재하며 얻은 결론은 결코 우리가 밀리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었다. 이유는 선점(先占)에 있었다. 그 시절 제주는 4년여 전인 1998년 세계섬문화축제를 연 지역이었다. 한 달간 25개국 27개섬이 참가한 ‘섬들의 문화올림픽’ 향연은 최소한 한·중·일 3개국 섬 지방정부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시아·미주·유럽 등 5대양 6대주 섬들을 모두 제주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획이었다. 오죽했으면 섬문화축제가 처음 열릴 무렵 일본 오키나와현의 오타 마
▲ 양성철/ 발행.편집인 이 정도면 자부심을 가져도 될 듯하다. 조마조마한 눈으로 지켜봤지만 기우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나 늘상 그렇듯 세련됨이 부족하고 2%는 커녕 10%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그 의혹이 눈길도 이번엔 거둬들여야 겠다. 이달 28일 중국 하이난(海南)섬 하이커우(海口)시 컨벤션센터. 3일간의 일정으로 개막한 해양관광박람회 현장은 903만 하이난 인구를 실감케 했다. 드넓은 전시공간을 둘러보며 밀려든 인파에 시달렸다. 하지만 제주관광홍보관에 다다르기 전까지 가설은 ‘그래 봤자’였다. 한 마디로 아니었다. 우리 홍보관은 아시아권 어느 지역이 설치한, 더 솔직히 말하면 단연 그 현장에서 최고였다. 최고의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고, 규모는 가장 컸으며 색채는 녹색과 청색으로 제주를 상징, 가장 세련된 느낌으로 눈 앞에 다가왔다. 제주관광공사가 중심을 잡고 제주테크노파크(TP)와 민간기업이 각을 잡은 우리 홍보관은 분명 흥행돌풍이었다. 솔직히 자부심이 들었다. 인파는 넘쳤고, K-POP 공연까지 곁들이며 관람객의 혼을 쏙 빼놓는 ‘질주’의 현장을 가만히 지켜봤다. 말로 형언하
1980년대 이야기다. 대입시험을 준비하느라 여느 고3생 처럼 여념이 없었다. 공부해야 할 과목이 많았지만 그 시절 국사과목이 유독 재미가 있었다. TV드라마에 나오던 사극을 떠올리며 정말 흥미진진하게 국사책을 탐독했다. 나름 성적도 좋았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했다. 서슬 퍼런 공안정권이 집권할 때였다. 대학가는 연일 집회·시위로 시끄러웠다. 하지만 솔직히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보단 태어나 처음으로 밟은 서울 땅이 나에게 던져준 충격이 더 관심사였다. 지금 세대들은 우스운 얘기지만 정말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강’(江)을 처음 만났다. 나고 자란 제주섬에선 강을 볼 일이 없었다. 물론 기차가 그리 길고 큰 지 처음 알았다. 더욱이 서울역 앞에 우뚝 선 초고층 빌딩들을 올려보며 초라한 스스로를 알았다. 모든 게 어리둥절하고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래도 대학생 아닌가? 대학 동기들은 물론 함께 서울로 진학한 ‘제주촌놈’들과 어울릴라 치면 단연 그 시절 정국(政局)이 화제가 됐다. 함께 눈물을 흘리며 “민주주의여 만세~”란 노래도 불렀다. 하지만 감성만으로 그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명색이 대학생인데 ‘지적 수준’을 높여야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우위를 뽐
▲ 양성철/ 발행.편집인 시절은 1990년대 초반. 서울의 한 경찰서 골방이다. 시험을 치르고 어렵사리 한 언론사에 입사, ‘수습기자’ 신분으로 사건·사고현장을 누비고 다니던 때였다. 지금 청년세대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휴대폰은 없었다. ‘삐삐’로 불리는 무선호출기가 유일한 긴급 통신수단이었다. 선배 기자의 수시 호출에 즉각 즉각 응답을 해야 하니 취재현장에서도, 잠을 잘 때도, 식사 중에도 언제나 전화기 주변이 선택장소다. 목욕탕에 가서도 카운터에 삐삐를 맡겨두고 가슴 졸이며 시간을 때웠다. 그런데 사고를 쳤다. 그 시절 석간이던 그 신문의 편집시스템에 맞춰 새벽 5시부터 움직이다보니 어느 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5개월여 수습기자 생활을 하다보니 지칠 대로 지쳐버린 것이다. ‘20 CALL'이란 메시지가 호출기에 떴다. 선배가 스무 번이나 날 찾았던 것이다. 민망하기 보단 오히려 절망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기를 들었다. 수화기에선 분노한 선배의 목소리에 이어 그 나이 무렵 들어본 적이 없는 질책과 타박을 받았다.
▲ 양성철/ 발행.편집인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나름 관덕정이 중요한 장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광복절에 그것도 ‘야스쿠니’란 단어가 등장하니 일단 눈이 돌아갔을 것이다. 게다가 일장기도 등장한다니 우선 욕부터 나왔을 것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15, 16일 이틀간 제주시 관덕정에서 열릴 예정이었다가 돌연 취소된 권철 사진작가의 ‘야스쿠니-군국주의의 망령’ 사진전 이야기다. 문제는 한 언론사의 보도에서 시작됐다. '도민사회 술렁‘ ’역사 우롱‘ ’조상님도 분개‘ 등의 표현이 사용됐다. 하지만 관덕정을 “3·1절 발포사건 등 중요한 항일운동 장소”라고 생각하는 정도의 무지라면 사실 의제설정은 커녕 거론할 가치는 없었다. ‘3·1절 발포사건’은 해방 후인 1947년 3·1절을 맞아 관덕정에서 기념행사가 열렸지만 시위로 돌변하면서 우리 경찰과 충돌, 경찰의 발포로 수명의 사상자가 생긴 사건이다. 결국 48년 4·3사건으로 비화된 전주곡이자 도화선이었다. 우리 경찰의 발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