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장자를 죽여 신에게 제사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고대에 새 벼가 익은 후 사람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감히 먼저 먹지 못했다. 반드시 ‘첫 벼’로 농사의 신에게 헌제를 올렸다. 이런 풍습이 퍼져나가 장자를 죽여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확산됐다고 본다. 옛 서적에는 그런 잔인하면서 괴이한 풍습을 “장자를 죽임으로써 동생들을 많이 낳게 한다”고 하였다. 원시시대 부녀자의 사유 방식은 다음과 같다. “장자를 죽여 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신령이 즐거워해야 만이 그녀에게 더 많은 자녀를 하사해준다.” ‘첫 벼’로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첫 아이를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더 많은 자녀를 낳게 해준다는 관념이다. 이는 “신(神)이 먼저 향유하여야 한다”는 몽매한 의식의 연장인 셈이다. 이것은 현재에도 남방의 소수민족에게 남아있는 처녀의 동정을 깨뜨리는 것을 가장 금기시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숫처녀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뿐 숫처녀와는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 기이한 관념의 풍습이 아닌가? 숫처녀의 신성함을 깨뜨릴 수
‘자살 굴’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더 기이한 현상이 하나 있었다. 모친 시신을 먹거나 모친을 버리는 습속이다. 중국 고대에 농경은 여자에게서 시작되었다. 여인이 농사를 발견했다고 한다. 풍작을 바라는 마음에서 부녀자는 자신을 위하여 많은 금기(禁忌)를 만들었다. 신령의 뜻을 존중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에서다. 모계 씨족사회에서 노동력을 상실한 늙은 부녀자들 역시 씨족에게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일종의 “모친의 시신을 먹는” 풍속이 일시 유행하였다. “무술을 모방(模擬巫術)해” 노인의 농사 경험을 자손들 몸으로 전이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런 단계를 벗어난 후에는 ‘모친을 유기’하는 풍속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늙은 부녀자를 깊은 산중에 보내 대자연 속에서 스스로 알아서 살아가게 만들었다. 이는 전술한 ‘자살 동굴’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런 풍속은 잔혹한 자연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한 당시 인류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에는 가장 도덕적이었을 수도 있다. 둘째, 남편은 ‘산후조리’하고 산부는 밭에 나가
고대 중국, 특히 광대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의 지역에는 듣기에 황당하기 그지없으나 당시 인류의 사유방식으로는 논리적이라 볼 수도 있는 괴이한 풍속이 많다. 노인 ‘자살 굴’, 남자 ‘산후조리’, 모친을 먹거나 버리기, 큰아들을 죽여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남매 통혼 등이 그것이다. 첫째, 노인 ‘자살 굴’ ‘자살 굴’이라고 했으나 ‘죽게 내버려두는〔寄死〕 갱(窯)’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전설 속의 고려장과 같은 행태를 자행하였던 갱과 같은 동굴을 말한다. 중국어로는 죽음의 갱이라는 ‘자사요(自死窯)’, ‘기사굴(寄死窟)’, ‘노인동(老人洞)’이라고 한다. 산 절벽이나 관목 총림 중에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동굴을 만들어 노동능력을 상실한 늙은이를 방치하였던 장소를 가리킨다. 그런 굴은 염진하(鹽池河, 단강구〔丹江口〕시 서남부에 위치해있는, 도교 성지 무당산〔武當山〕 남쪽 기슭, 동쪽으로는 백양평림업관리〔白楊坪林叢管理〕 지역과 경계하고 서쪽으로는 관산〔官山〕과 이어져 있
중국의 배갈은 증류 가공 방법으로 만드는 알코올 농도가 비교적 높은 음용하는 술을 말한다. 현재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량주로 우리나라의 일반 소주와 다르다. 중국에서는 배갈에 대해 ‘백주(白酒)’란 통일된 용어를 쓰고 있지만 ‘소주(燒酒)’, ‘백간(白干)’, ‘고량주(高粱酒)’ 등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배갈의 과학적인 명칭은 ‘증류주(蒸溜酒)’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배갈은 ‘白干’에서 유래했다.[본 문장에서는 배갈과 소주라는 용어를 혼용해 쓴다] 중국은 언제부터 술을 증류했을까? 자체 발명했는가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 전래됐는가? 이 문제에 대해 학계에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역사적으로 중국 배갈의 기원 문제에 대해 대체적으로 동한(東漢), 당(唐), 송(宋), 그리고 원(元) 대에 비롯됐다는 네 가지 설이 있다. 그중 동한이라는 설은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내편内篇』과 『후한서後漢書·신선전神仙傳』에 기록된 일단의 문자를 근거로 하고 있다. 초가(草家) 위에서 불을 붙여
1700여 년 전, 삼국(三國)시대 촉(蜀)나라 승상 제갈량(諸葛亮)이 목우유마(木牛流馬)를 발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목우유마는 어떤 모양의 운송 도구였을까? 고래로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면서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역사의 기록을 먼저 보자. 『삼국지·제갈량전』에는 “제갈량은 교묘한 생각에 뛰어났는데, 기존의 활을 개조한 연노(連弩)라든가 목우유마 등은 모두 제갈량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기록돼있다. 또 “건흥 9년(231) 제갈량이 다시 기산으로 나왔는데 목우를 이용해 군량미와 말먹이를 운반하였다”, “건흥 12년(234) 봄, 제갈량의 무리들이 야곡으로부터 나와 유마로 짐을 운반하였다”고 돼있다. 이 기록을 보면 ‘목우유마’는 분명 제갈량이 발명한 것이고 서로 다른 두 가지 운송 도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 중 목우가 먼저이고 유마는 나중에 발명된 것이고. 배송지(裴松之)의 주에서 인용한 『제갈량집』에는 목우유마의 제작법을 상세하게 인용하고 있다. 이로써 역사상 제갈량은 확실히 목우유마를 제조하고 응용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근현대에 전기를 발명함으로써 조명 기술이 대대적으로 개선되었다. 길고긴 어두운 밤에 고대 중국인들은 어떻게 ‘조명’의 문제를 해결했을까? 1968년 하북 만성(滿城)의 서한(西漢)시기 두관묘(竇綰墓)에서 주작동등(朱雀銅燈)이 발굴되었다. 높이 30센티미터, 지름이 19센티미터였다. 주작이 고개를 들고 꼬리를 치켜세운 모양이다. 부리는 등반을 물고 있고 발은 반룡을 딛고 날개를 벌려 날아가려는 형태다. 등반은 원형으로 홈이 파져있으며 세 부분으로 나뉘어있고 각각 1개의 못이 박혀있다. 중국 고대 전설 속 주작은 백조의 왕이다. 춤을 잘 추는 신령성과 고귀한 생활 습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길함을 준다고 돼있다. 한(漢)나라 때 주작은 4신 중 하나로 도기, 동경에 자주 등장하며 석묘의 묘비에도 자주 등장한다. 죽은 자를 보호하는 신물이요 길상의 징조를 나타낸다고 보았던 것이다. 주작을 닮아 묘의 주인이 신선이 되거나 일찍 하늘나라로 올라가기를 바랐던 소박한 소망을 담아 나타낸 것으로 본다. 이런 주작동등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예술 조형에 감탄하거나 그것이 지니는 내용에 감동받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ldquo
한혈마(汗血馬)는 전설 속의 신비롭고 최상의 능력을 보유한 기이한 말을 가리킨다. 피와 같은 땀을 흘리며 바람처럼 빨리 달린다고 전해온다. 여러 왕공 귀족들은 그 말을 구하기 위하여 천금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한(漢) 무제는 그 말을 구하기 위하여 원정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새벽 6시, 해가 서서히 뜨며 밝아올 때 북경의 연룡(燕龍) 경마장의 마방은 벌써 떠들썩해졌다. 일꾼들이 매일 첫 번째로 하는 일, 마방 정리가 시작되었다. 그중 조마사가 가장 분주하다. 그는 막 중국으로 수입된 말 3필을 책임져야하기 때문이다. 몇 개 월 후 그중 한 필을 경매시장에 내놔야한다. 현재 경매최저가격이 100만 인민폐에 달하고 최종 경매가격은 중국 말 경매사상 가장 비싼 가격에 낙찰될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이 말의 원산지는 멀고먼 중앙아시아 국가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으로 국제적으로 공인된 이름은 아칼 테케(Akhal Teke)다. 중국인은 그 말에 전기적인 색채가 농후한 명칭, 한혈보마(汗血寶馬)라 붙였다. 현재 전 세계에 3000여 필밖에 없고 그중 2000여 필은 투르크메니스탄에 있다. 그 나라의 국보다. 그렇다면 한혈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천 년 동안 논쟁을 벌이고 있는 문제 두 가지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아시는가? 문물 발굴에 따라 계속해서 의문을 던지면서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첫째, 『손자병법』은 82편인가 아니면 13편인가? 둘째, 『손자병법』은 손무(孫武)의 작품인가 아닌가? 손자(孫子)의 이름은 무(武)다. 손무자(孫武子)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국 고대 군사전문가요 병가(兵家)의 창시자다. 제(齊)나라 낙안(樂安, 현 산동 박흥〔朴興〕 북쪽, 일설에는 혜민〔惠民〕이라고도 한다) 사람이다. 생졸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략 기원전 6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활동했다고 전한다. 손무는 원래 제나라 전(田) 씨의 후예다. 전란을 피해 떠돌아다니다가 오(吳)나라에 이르러 오왕에게 중용된다. 오나라를 개혁해 강국으로 만들었다. 오나라는 손무의 도움으로 서쪽으로 강국 초(楚)나라를 치고 남쪽으로 월(越)을 정복했으며 북으로는 제(齊)와 진(晉)을 위협할 정도로 강한 제후국이 되었다. 그때가 오나라의 전성기였다. 손자 일생에 있어 후세에 남긴 최대의 공헌은 그의 군사관련 저작 『손자병법』이다. 중국에 현존하는 최초, 최고의 병법 걸작이다. 여태껏 ‘병경
사람들은 진시황이 6국을 멸하고 통일제국을 만들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들을 실행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중, ‘분서갱유(焚書坑儒)’는 가장 잘 알려진 사실이요 잔혹한 역사임도 알고 있다. 그런데 ‘분서갱유’는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도대체 진시황은 왜 갱유를 자행했는가? 그리고 갱유한 수는 몇 명일까? 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함양궁(咸陽宮)에서 유생(儒生)을 위하여 대대적으로 주연을 베풀었다. 연회석상에서 많은 유생들이 모여 분봉제分(封制)를 실시하여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왕관(王綰), 박사 순우월(淳于越) 등은 분봉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반면 승상 이사(李斯) 등은 군현제(郡縣制) 실시를 주장하면서 순우월 등이 “지금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옛것을 배운다”, “옛것을 얘기하면서 지금을 해친다”고 공격하였다. 최종적으로 진시황은 이사의 견해를 지지하고 이사의 ‘분서’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진기(秦紀, 진나라 사서), 의약
한비(韓非, BC 약280~233), ‘한비자(韓非子)’라 칭하기도 한다. 기원전에 출생한 한국(韓國) 화하족(華夏族) 중의 귀족으로 전국시대 말기 걸출한 사상가요 철학자이며 산문가이다. 이러한 역사적 인물이 어떻게 역사적 현안이 됐을까? 도대체 한비자는 어떻게 죽었을까? 한비, “형명(刑名) 법술(法術)학을 좋아하였다.” 나중에 한비자라 칭한다. 이사(李斯)와 동문으로 순자(荀子)의 제자다. 당시 한국은 국력이 약하여 이웃나라가 업신여겼다. 한비는 여러 차례 한왕(韓王)에게 부강의 계책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분(孤憤)』, 『오두(五蠹)』 등 체계적인 문장을 썼는데 나중에 『한비자(韓非子)』에 수록하였다. 진왕(秦王) 영정(嬴政)이 한비의 문장을 읽고 높이 평가해 주위 사람들에게 “과인이 이 사람을 만나 같이 노닌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만남이 너무 늦었음을 한탄하는 말이리라. 그러나 한비가 진나라로 간 후 진왕이 말한 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옥에 갇히고 얼마 없어 죽임을 당한다. 그가 어떤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는지 서한 이후 각기 다른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9~104), 서한 광천(廣川, 하북 경현〔景縣〕 광천진 대동고장촌〔大董故莊村〕)사람으로 사상가, 정치가, 교육가, 유심주의철학가, 금문경학자이다. 한 경제(景帝) 때 박사가 돼 『공양춘추(公羊春秋)』를 강술하였다. 한 무제(武帝) 원광(元光) 원년(기원전 134), 무제가 조서를 내려 치국방략을 널리 구하자 동중서는 유명한 「거현량대책(擧賢良大策)」에서 계통적으로 “천인감응(天人感應)”, “대일통(大一统)” 학설을 주창하면서 유학을 중국의 정통사상으로 만들어 이천 년 동안 영향을 끼쳤다. 그 학설은 유가 종법사상을 중심으로 음양오행설이 섞여있다. 신권(神權), 군권(君權), 부권(父權), 부권(夫權)을 함께 엮어 제제신학(帝制神學) 체계를 이루었다. 중국 학생들은 역사 교과서를 통해 동중서(董仲舒)가 백가를 파출하고 유학만을 숭상하는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했다고 배운다. 당시 한무제(漢武帝)가 유술(儒術)과 형명(刑名) 법술(法術)을 결합시켜 통치수단으로 삼았다고, 그리고 후대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고. 그런데 “파출백가,
노자(老子)는 도교의 시조다. 그의 사상은 중국 이천 년 동안 영향을 끼쳤고 지금까지도 끄떡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교학파의 지성선사(至聖先師) 공부자(孔夫子)도 그에게 가르침을 구했다고 전해온다. 그렇다면 노자는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하다. 사실, 중국 역사에서 노자는 많은 역사적 미스터리를 남겼다. 특히 그가 출관(出關)했다는데, 그 사실을 캐보자. 역사 기록을 보면 노자는 만년에 청우(靑牛)를 타고 천하를 유람했다고 한다. 도교학설을 강설하면서 철리를 논했고 서역(西域)을 개화시켰다고 한다. 먼저 청우란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원명은 ‘판각청우(板角靑牛)’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둥근 뿔이 아니라 판과 같이 생긴 뿔을 가진 청색 소다. 과연 그럴까? 청우란 상고(上古)의 상서로운 동물 ‘시(兕)’다. 이름과 모양이 ‘우(牛)’일뿐 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兕’는 소처럼 생겼고 검푸르며 판각(일설에는 이마에 난 독각이라 하기도 한다)이라 하였다. 천하가 태평성대일 때 세상에 나온다고 한다. 태상노군(太上老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