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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2)

신용은 개인의 미덕이기에 어떠한 공리(功利)도 포함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과연 옳은 판단일까? 아니다. 생활의 방법과 목적이 섞갈린 판단이다. 틀려도 한참 틀린 생각이다.

 

삼국시대에 유비(劉備)가 조조에게 의탁한 적이 있다. 조조(曹操)는 유비를 예주목(豫州牧)에 임명하였다. 어떤 모사가 조조에게 말했다. “유비는 뛰어난 재능이 있고 원대한 계략이 있어 인심을 얻고 있습니다. 관우(關羽)와 장비(張飛) 같은 장수는 만 명이 당해 내지 못할 정도로 용감무쌍합니다. 그들은 유비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유비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고 책략 또한 헤아리기 매우 힘듭니다. 옛사람이 이르길 ‘하루라도 적을 놓아두면 몇 세대가 지난 후손까지 화가 된다’(『左傳·僖公33年』)고 하였습니다. 지금 일찌거니 그를 제거하지 않으시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입니다.”

 

조조가 고개를 끄덕이다 곽가(郭嘉)(★)에게 의견을 물었다. 곽가가 말했다. “그 관점도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시작됐는지 말하려 합니다. 승상께서 지금 군대를 일으킨 목적이 무엇입니까? 백성을 위하여 잔악한 나쁜 세력을 뿌리 뽑기 위함이 아니옵니까? 진정으로 믿음을 가지고 천하의 호걸을 불러 모으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승상께서 공훈을 세우고 업적을 쌓는 데에 보탬이 되고자 하심이 아닙니까? 유비는 영웅이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니 승상께 몸을 의탁하였습니다. 이때에 그를 죽이시면 후환은 능히 제거할 수는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보다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시기했다는 오명을 짊어지게 됩니다. 만천하의 영웅이 실망하게 됩니다. 승상께 의탁하고자 하였던 인재들이 놀라 달아나게 됩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승상께서는 누구와 함께 천하를 평정하시겠습니까? 안전하게 되느냐 위험하게 되느냐 하는 고비가 됩니다. 승상께서는 이해득실을 고려하셔야만 합니다.”

 

조조가 말했다. “좋은 말이오!”

 

물론 조조도 유비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다. 유비는 가슴에 천하를 품고 있어 나중에 자신과 천하를 놓고 다툴 수밖에 없음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권고를 받아들였다. 천하 영웅의 마음을 얻으려고 유비를 머물게 하였다. 조조는 그랬다. 믿음(신용)을 아이들 놀이로 여기지 않았다. 천하에 신용을 잃을 일을 하지 않았다. 인품이 고상해 그렇게 했다는 말이 아니다. 인품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무엇 때문에 그랬는가? 영웅호걸을 모아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만들려고 그랬다. 효과적으로 천하를 호령하려고 그랬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조조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철저히 파악하고 있었다. 타인을 속이는 것이 한번 뿐이라 할지라도 지불하여야하는 대가는 만회할 방법이 없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齊)환공(桓公)(★★)은 귀국해 즉위한 후 관중(管仲), 포숙(鮑叔), 습붕(隰朋)(★★★) 등 현인을 임용해 나라를 다스리면서 군사 실력을 증강시켰다. 제나라는 점차 강대해지자 주변 나라를 병탄하기 시작하였다.

 

제 환공 5년에 환공은 노(魯)나라를 치도록 파병하였다. 노나라의 장공(莊公)(★★★★)은 대장 조말(曹沫, 생졸 미상)을 보내 응전하도록 했으나 연전연패하였다. 장공은 겁을 집어먹고 영토를 할양해 화친을 추구하였다. 환공이 동의해 쌍방이 가(柯, 현 산동 아阿현)에서 회맹하였다.

 

 

제환공과 노장공이 자리에 앉아 담판을 벌일 때 조말이 갑자기 비수를 꺼내들고 제환공을 협박하였다. 제환공의 좌우가 일시에 아연실색해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관중이 감정을 가라앉히고 조말에게 물었다. “당신, 무엇을 하려는 게요!” 조말이 답했다. “제나라는 강하고 노나라는 약하오. 당신들은 강함을 가지고 약자를 능멸한 것이요. 우리 노나라 토지를 강점하려는 것은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는 게 아니오! 나는 지금 그 토지를 돌려달라고 하는 것이오.”

 

군신의 상황을 본 환공은 노나라 토지를 전부 돌려주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조말은 비수를 버리고 회담장을 나왔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환공은 우레와 같이 펄쩍 뛰며 노발대발하였다. 관중이 차분히 환공에게 권했다. “지금 우리는 제후들 면전에서 타인에게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을 했습니다. 작은 이익을 탐하여 천하의 제후를 잃는다면 우리는 피동적인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고립무원이 될 수 있습니다. 침략해 얻은 땅을 돌려주는 것만 못합니다. 이 기회에 천하 제후의 신임을 얻으십시오. 우리 제나라의 신용과 명예를 세우시면 됩니다.”

 

환공은 관중의 권고를 받아들여 전쟁에서 승리해 얻은 토지를 모두 노나라에 돌려주었다. 이때부터 제나라의 위엄과 명성이 크게 높아졌다. 여러 제후국도 제나라를 따르게 되었다.

 

환공은 신용과 명예를 준수해 작은 이익을 버리고 전체를 돌봤다. 여러 제후의 신임을 얻어 마침내 춘추오패(春秋五霸)(★★★★★)의 하나가 된다. 국가나 회사만 그럴까? 개인도 마찬가지다. 사업을 성공시키려면 실력에 의지하는 것 이외에 신용과 명예를 강구하여야 한다. 믿음으로 사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이익을 얻으려고 대국을 소홀이 해서는 안 된다.

 

★ 곽가(郭嘉, 170~207), 자는 봉효(奉孝), 영천(潁川) 양적(陽翟, 현 하남河南 우주禹州) 사람이다. 동한 말기 조조 휘하의 유명한 모사다. 곽가는 원래는 원소(袁紹)의 부하였으나 나중에 조조에게 의탁하고 조조가 중국 북방을 통일하는 데에 공을 세워 관직이 군사제주(軍師祭酒)까지 올랐고 양정후(陽亭侯)에 봉해졌다. 조조가 오환(烏丸)을 정벌할 때 병을 얻어 32세에 죽었다. 시호는 정후(偵侯)다.

 

★★ 제(齊) 환공(桓公, ?~BC643), 성은 강(姜), 여(吕) 씨, 이름은 소백(小白), 춘추오패(春秋五霸)의 우두머리, 상고시대 오패(五霸) 중 한 명, 진(晉) 문공(文公)과 더불어 ‘제환진문(齊桓晉文)’으로 병칭된다. BC685~BC643 재위하였다. 춘추시대 제나라의 제15대 국군(國君)이다.

 

★★★ 습붕(隰朋, ?~BC644), 성은 강(姓), 제(齊)나라 공족(公族) 출신이다. 춘추시대 유명한 제나라 대부(大夫)로 붕(朋) 씨의 비조(鼻祖)다. 제나라 장공(莊公)의 증손자이다. 관중(管仲), 포숙아(鲍叔牙) 등과 함께 제 환공을 보좌해 제나라 흥성에 기여하였다. 습붕(隰朋)은 일찍이 군대를 이끌고 진(秦)나라 군대와 연합에 진(晉)나라의 내전을 안정시키고 혜공(惠公)을 옹립하였다. 관중이 위중해지자 자신을 대신하도록 추천하였으나 관중과 같은 해에 죽었다.

 

★★★★ 노장공(魯莊公, BC706~BC662), 성은 희(姬), 이름은 동(同), 춘추시기 노나라 제16대 군주다. 노(魯) 환공(桓公)과 정처 문강(文姜)의 적장자이다.

 

★★★★★ 춘추오패(春秋五覇), 중국 춘추시대 5인의 패자(覇者)를 일컫는 말이다. 제국(諸國) 혹은 제후(諸侯) 사이에 맺어지는 회합이나 맹약을 회맹(會盟)이라 하며 회맹의 맹주(盟主)가 된 자를 패자라고 한다. 춘추오패는 춘추시대 5인의 패자를 일컫는 말로 오백(五伯)이라고도 한다. 『순자(荀子)』에 따르면 오패는 제(齊)나라 환공(桓公), 진(晉)나라 문공(文公), 초(楚)나라 장왕(莊王), 오(吳)나라 합려(闔閭), 월(越)나라 구천(勾踐)을 가리킨다.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이나 오나라 부차(夫差)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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