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나 정계, 사업에 발붙이려면 신용(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입신처세의 근본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BC770~BC476), 제(齊) 영공(靈公)(★)은 후궁의 후비들에게 남장을 시키기를 즐겼다. 남자 모자를 씌우고 남자 장화를 신겼으며 남자 장식물을 패용하도록 하였다. 그런 풍조가 시작되자마자 윗사람이 하는 대로 아랫사람이 따라하면서 전국이 여자가 남자 옷을 입는 조류가 형성되었다.
영공은 백성이 궁정을 따라하는 것을 무척 싫어해 각급 관리에게 엄금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모든 거리, 시장, 마을에서 남자 의복을 입은 여인이 발각되면 덧저고리를 찢어버렸고 띠를 잘라버렸다. 남장하는 풍조를 여러 차례 금지했으나 근절되지 않았다.
영공은 화가 치밀어 안자(晏子)(★★)에게 물었다. “과인이 명령을 내렸는데도 백성은 어찌해 거역하는가? 금지하든 말든 근절되지 않고 있으니 말이요.”
안자가 말했다. “왕이시여. 궁정에서는 장려하고 궁 밖에서는 금지하는 것은 문 앞에 소머리를 매달아놓고 말고기를 파는 것과 똑같습니다. 온 나라의 여인에게 남자 의복을 입지 못하게 하려면 먼저 궁정의 여인에게 남자 옷을 입히지 않으면 됩니다. 궁정에서 남자 옷을 입는 여인에게 벌을 내린다면 백성이 어찌 감히 그러하겠습니다. 한번 실험해 보십시오.”
영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노라” 대답하였다.
금령이 반포되고 1개월도 채 안 됐는데 제나라 내 어디에서도 남자 옷을 입은 여인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신용이라는 것은 분명 명석한 자들의 유희다.
춘추시기, 제후국끼리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어느 해, 제(齊)나라는 연전연패하고 있었다. 경공(景公)(★★★)이 다급해져서 국면을 전환할 수 있는 유능한 인물을 찾아 나섰다.
경공은 안영(晏嬰)의 추천을 받아 전양저(田穰苴)(★★★★)를 장수로 임명하기로 결정하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전선으로 나아가 적을 맞아 싸우라고 명했다.
전양저는 원래 하급 관리에 불과하였다. 그가 경공을 배알한 후 간절하게 한 가지 청을 드렸다. “군왕이시여. 신은 여태껏 비천한 지위에 있었습니다. 지금 왕께서 한 번에 신을 군졸 사이에서 발탁해 장군 지위를 하사했으나 신은 병사들이 신의 말을 듣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백관이 나를 믿고 따르지 않는 것은 신이 지위가 낮고 권한이 적기 때문입니다. 청컨대 왕께서 존귀한 대신을 파견해 신의 감독관으로 삼으셔서 사기를 북돋아 주소서.”
경공은 “그거 좋은 방법이구나” 말하며 자신이 아끼는 신하 장가(莊賈)를 함께 출정하도록 하였다.
전양저와 장가는 다음날 점심에 군문 밖에서 회합해 출발하기로 약속하였다. 이튿날 전양저는 일찍부터 군대를 인솔해 군문 밖에 도착해 대오를 정리하고 장가를 기다렸다. 그런데 장가는 저녁 무렵이 돼서야 어깨를 으쓱거리며 군문에 도착하였다. 전양저는 화내면서 질책하였다. “장 대인께서는 어찌 이렇게 늦게 오시는 것이오.”
장가는 경공의 총애를 받는 신하인지라 줄곧 교만을 떨었는데 조그마한 관직에 있던 전양저를 어찌 안중에 두겠는가. 오만하게 대답하였다. “친우들이 송별연을 베풀어줘서 몇 잔 더 마셨더니…….”
전양저가 말했다. “목하 적군이 침입해 대왕께서는 음식도 드시지 못하고 침불안석이십니다. 군사들은 변방에서 전쟁을 치루며 목숨을 내놓고 있는 판국에. 백성의 목숨이 지키지 못할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그런데도 당신은 주연을 열어 군법을 위반했으니…….”
장가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당신, 너무 우쭐대지 마시오. 장군이 된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나를 훈계하는 거요.”
전양저는 약함을 전혀 보이지 않고 호되게 꾸지람하였다. “군법을 위반하면 무슨 죄에 해당하는가?”
곁에 있던 사기관(司旗官)[사기(司旗)는 제사예의(祭祀禮儀)의 직무, 사기관은 제사예의를 관장하는 무관]이 대답하였다. “참형에 처합니다!”
기고만장하던 장가의 머리가 곧바로 잘려나갔다. 전양저는 깃대에 매달아 군의 모든 장병에게 보여주는 신용의 표본으로 삼았다.
전양저의 거동은 전군을 진동시켰다. 장병들은 고개를 숙이고 귀를 늘어뜨리듯이 그의 지휘에 순순히 복종하였다.
몇 개월 후 적을 패퇴시킨 후 군사를 이끌고 개선하자 제 경공은 친히 마중 나왔고 나중에 그를 대사마(大司馬)에 앉혔다.
이것은 권신의 머리를 도구로 삼아 군중에 신용을 세운 사례다. 손무(孫武)가 오나라 왕의 총비 두 명의 머리를 가지고 군위를 세웠던 일과 판에 박은 듯 똑같다. 삼국시대에 조조(曹操)는 자기의 머리카락을 이용해 장병들을 믿게 만드는 도구로 삼았던 경우도 있다. 이런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옛사람들은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손상시키지 않는” 도리를 굳건히 믿었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스스로 몸을 손상시키는 것과 진배없어 불효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조조가 장병을 거느리고 출정해 보리밭 옆을 행군하게 되자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보리를 훼손시키지 마라. 명령을 위반할 때에는 사형에 처할 것이다.” 기병들은 장군의 군령이 무겁기가 산과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연달아 말에서 내려 보행하였다. 어떤 때에는 쓰러진 보리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였다.
그런데 조조가 탄 말이 승상의 체면을 깎을 줄 누가 알았으랴. 조조가 탄 말이 갑자기 보리밭으로 뛰어 들어가 보리를 훼손시켜 버렸다. 조조는 형법을 관장하는 주부(主簿)에게 법에 따라 자신에게 죄를 물으라 하였다.
주부는 전전긍긍하며 감히 직접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춘추(春秋)』에 기록된 도리를 가지고 답했다. “고귀한 사람에게는 형벌을 실제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법령을 제정한 인물이 스스로 법을 어겼는데 어찌 부대를 옳게 통솔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나는 군대를 이끌고 있는 장군이라 자살할 수는 없으니, 내 스스로 처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게나.”
조조는 칼을 뽑아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낸 후 땅위에 놓으면서 사형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옛사람들은 머리카락은 부모가 준 것이라 손상시킬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었다. 조조는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으로 참수하는 것을 대신하였다. 자기에게 엄격하게 징벌하는 것이요 타인에게 믿음을 주는 책략이었던 셈이다.
이외에 믿음을 얻으려면 고민과 지모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실력도 필요하다. 현대의 은행 신용제도를 가지고 얘기해보자. 여태까지 은행에 돈을 빌려보지 않은 사람의 신용은 제로다. 은행에 땡전 한 푼도 없는 사람은 고액 대출을 받을 수 없다. 희한하기는 하지만, 대출신용이 가장 좋은 사람은 늘 은행에서 큰돈을 빌리는 사람이다. 그의 승낙은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빌린 돈을 갚고 갚은 후 다시 빌리고. 차례대로 되풀이하면? 그래야 신용이 있게 된다. 신용을 얘기하자면, 원래 믿지 못하는 사람을 믿게 만들려면 온갖 지혜를 짜내 여러 가지로 고심해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 믿음이 있고 없고는 어디에 있는가? 방원의 도(方圓之道)에 있다 :
“믿음이 있고 없고 ; 믿음을 얻는 것과 저버리는 것, 나뉨이 어디에 있을까? 방원(方圓)에 있다.” 방원(方圓)의 방(方)은 규구(規矩, 법칙)요 틀(框架, frame)로 사람됨의 근본이다 ; 원(圓)은 원만(圓滿, 원통圓通)이요 노련(老鍊)으로 처세의 도리다. 방(方)이 없으면 세상에는 규칙이 없게 되고 약속이 있을 수 없다 ; 원(圓)이 없으면 세상에는 부하(하중)가 너무 심하여 스스로 감당[자리自理]할 수 없다. 사람됨과 처세에는 방(方)할 때는 방해야 하고 원(圓)할 때는 원해야 한다. 방 밖에 원이 있고 원 안에 방이 있다. 방원은 안과 밖에서 서로 비호(안팎으로 서로 도움)하여야 사회가 비로소 조화롭게 된다. 인생은 자고로 방원에 있다.(『方圓之道』) “방은 땅이요 원은 하늘이다.”
★ 제(齊) 영공(靈公, ?~BC554), 시호는 ‘제환무령공(齊桓武靈公)’이다. 성은 강(姜), 여(吕) 씨, 이름은 환(環), 제나라 경공(頃公)의 아들로 춘추시기 제(齊)나라 국군(國君)으로 BC518~BC554 동안 재위하였다. 영공이 재위하는 기간에 명재상 안약(晏弱), 안영(晏嬰) 부자가 연이어 보정(輔政)해 나랏일이 깨끗해졌다. 영공은 남장한 여자를 좋아했는데 안영이 간언해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영공이 즉위한 초기에는 진(晉)을 패주로 존중했는데 나중에 진의 지배에 벗어나 천하를 쟁패하려 하였다. 영공 24년에 다섯 차례나 노(魯)나라를 정벌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영공 27년에 진나라는 제나라가 진나라에 반기를 들려고 노나라를 침략했다는 이유로 노(魯), 송(宋), 위(衛), 정(鄭), 조(曹), 거(莒), 주(邾), 등(滕), 설(薛), 기(杞), 소주(小邾) 등 12 제후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공략했으나 영공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적을 막으니 대패해 돌아갔다.
★★ 안영(晏嬰, ?~BC500年), 성은 희(姬, 일설에는 子), 안(晏) 씨, 자는 중(仲), 시호는 ‘평(平)’, 역사에서는 ‘안자(晏子)’라 부른다. 이유(夷維, 현 산동山東 고밀高密시) 사람으로 춘추시기 유명한 정치가, 사상가, 외교가이다.
★★★ 제(齊) 경공(景公, ?~BC490), 성은 강(姜), 여(吕) 씨, 이름은 저구(杵臼), 영공(靈公)의 아들이요 장공(莊公)의 동생으로 춘추시기 제나라 군주다. 대신으로는 초기에 상국에 최저경봉(崔杼慶封)이 있었고 나중에 상국 안영(晏嬰), 사마양저(司馬穰苴), 양구거(梁丘據) 등이 있었다. 경공은 치국에 열정적이었지만 향락을 탐하기도 하였다.
★★★★ 전양저(田穰苴, 생졸 미상), 사마양저(司馬穰苴)라 부르기도 한다. 춘추말기 제(齊)나라 사람으로 전완(田完, 진완陳完)의 후예이며 제나라 전(田) 씨 가족의 지서(支庶)다. 강상(姜尚)의 뒤를 잇는 저명한 군사전문가로 일찍이 군대를 이끌고 진(晉)과 연(燕)을 패퇴시켰다. 대사마(大司馬)에 봉해져 후세 자손들은 사마(司馬) 씨라 불렀다. 나중에 경공(景公)이 헐뜯는 말을 믿고 전양저를 면직시켰다. 억울함에 병이 나 죽었다. 전해지는 사적은 많지 않으나 군사 사상에 미친 영향은 크다. 당(唐) 숙종(肅宗) 때 전양기 등 역사상 군공이 탁월한 10명을 무성왕(武成王)묘에 모셔 무묘(武廟) 십철(十哲)이라 칭했다. 송(宋) 휘종(徽宗) 때 전향저는 횡산후(横山侯)에 추존되고 송 무묘(武廟) 72장군 중 한 명에 랭크되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