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문인들의 취미를 얘기할 때 사람들은 ‘금기서화(琴棋書畵)’ 네 가지를 생각한다. 이것은 고대 문인들의 상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외에 ‘휘파람’도 중국 고대 문인들의 취미 중 하나였다. ‘嘯(소)’라 하는데 ‘취성(吹聲)’(『설문』)으로 우리가 흔히 부는 ‘휘파람’이다. ‘휘파람’은 고대 문인 명사들의 사랑을 받았다. 위진(魏晉) 시대는 휘파람을 부는 풍조가 성행해 명사가 되기 위해 갖춰야할 아취(雅趣)였다. 완적(阮籍)은 위진 시기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명이었다. 완적이 휘파람 불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벽돌에 새겨진 그림뿐만 아니라 역사서에도 기록돼 있다. 『진서․완적전』에 소문(蘇門)에서 손등(孫登)을 만났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완적이 손등과 학문을 논하려 했지만 손등이 응하지 않자 “완적은 휘파람을 불고 물러났다. 고개를 반쯤 내려왔을 때 난(鸞)새와 봉황의 소리가 들렸다. 산골짜기에 메아리쳤다. 손등의 휘파람 소리였다.” 이렇게 보면 손등의 &lsq
‘위진풍도(魏晉風度)’를 ‘위진풍류(魏晉風流)’라 하기도 한다. 중국 위진 시대 명사들의 품격과 도량을 지칭하는 말이다. 당시 위진 명사들의 주정주의(主情主義)적 특성을 잘 반영한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고대 문인이 즐겼던 ‘풍류’의 경지를 이해하려면 위진(魏晉) 시기의 문인들, 특히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이야기해야 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위진 시기의 청담(淸談)과 유명한 청담가들에 대한 기록이 많다. 이는 3, 4세기 ‘풍류’를 신봉하는 인물들을 묘사했다. 유영(劉伶)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유영은 늘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한다. 어떤 때는 방에서 알몸으로 있기도 했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그를 놀리자 유영은 ‘나는 하늘과 땅을 집으로 방을 속옷으로 하거늘 당신은 어찌하여 나의 속옷으로 들어오는 것인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영은 쾌락을 추구했지만 일상적인 것을 초월했다. 이런 초월성을 가지고 있고 도가학설의 양심(養心), 즉 현심(玄心)을 가진 자는 반드시 쾌락에 대해 묘한 감상 능력을 가지고 있어 우아
도연명(陶淵明 : 365-427)의 자는 원량(元亮), 이름은 잠(潛)이다.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오류(五柳)선생이라 칭하기도 했다.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의 남서 시상(柴桑) 사람이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州)의 좨주(祭酒)가 됐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했다.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팽택현(彭澤縣)의 현령 직을 사임한 후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쓰고 향리의 전원으로 퇴거했다.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경생활을 영위해 가난과 병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62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생애를 마쳤다. 후에 그의 시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 칭했다. “진(晉)나라 태원(太元) 연간, 무릉(武陵)이란 곳에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작은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홀연히 복숭아나무 숲에 들어서게 됐다. 숲은 강의 양쪽 기슭 안쪽으로 수백 걸음에 걸쳐 이어져 있었고 잡목 하나 없었다. 향기로운 풀이 싱싱하고 아름다웠으며 떨어지는 꽃잎이 어지러이 나부끼고 있었다. 어부는 무척 기이하게 여겨 다시 앞으
사마염(司馬炎 : 236-290)은 사마소(司馬昭)의 아들이요 사마의(司馬懿)의 손자다. 265년 아버지가 죽자 진왕(晉王)과 상국(相國)의 자리를 물려받고 부조(父祖)가 다진 세력에 힘입어 위(魏)나라 원제(元帝)의 선양을 받아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고 진(晉)나라를 세웠다. 역사에서 말하는 서진(西晉)이다. 280년 남아 있던 오(吳)나라의 항복을 받아 천하를 재통일했다. 점전법(占田法), 과전법(科田法)을 제정하고 세법으로서 호조식(戶調式)을 공포했다. 사회적으로는 세족(勢族)이 가난한 백성을 압박하는 귀족제의 모순이 강화됐고 북방 이민족의 침입도 시작됐다. 위나라가 종실(宗室)을 너무 억압해 왕실을 고립시키면서 실패를 자초했던 사실을 거울삼아 일족을 국내 요지의 왕으로 봉하고 병력을 맡겼는데, 이는 아들 혜제(惠帝) 때에 ‘팔왕(八王)의 난’이 일어나는 원인이 됐다. 태시(泰始) 9년 사마염은 조서를 내린다. 공경(公卿) 이하 대신들 집안에 결혼 연령이 된 소녀들은 먼저 입궁해 간택에 참가하지 않으면 결혼을 할 수 없도록 했다. 이듬해 간택 대상의 범위를 경성 내외의 부상(富商)과 궁중 관리들에게 까지 확대했다. 더욱 황당한
중국 한족 사찰에는 일반적으로 네 분의 보살을 모신다. 문수사리(文殊師利), 보현(普賢), 지장(地藏), 관세음(觀世音)이다. 불경에서는 관세음을 대자대비 보살이라고 한다. 고난에 시달리는 백천만억 중생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그 이름을 염송하기만 하면 “관세음보살이 즉시 그 소리를 듣고 해탈할 수 있다”는 데서 연유했다. 일반인의 마음속에 보살은 거의 남성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유독 관음보살만은 중국에서 ‘娘娘(낭랑, 여신)’으로 불린다. 왜 그럴까? ‘娘娘’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원칙대로라면 ‘낭랑’이라 불리기 때문에 분명 여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가 경전의 소개에 따르면 관음은 육관음, 칠관음, 삼십삼관음 등 총체적 명칭 외에 불교 중 현교(顯敎)의 일파에서는 아미타불의 제자로 여기고 있으며 밀교(密敎) 일파에서는 아미타불의 좌우에서 모시는 협사(脇士)로 여기고 있다. ‘제자’든 ‘협사’든 모두 여성에 대한 칭호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관점에서는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관음상은 대략 남북조시대에 시작돼 당나
중국 역사상 많은 황제들은 독실하게 불교를 믿었다. 불교에 귀의한 황제와 비(妃)도 한 둘이 아니다. 가장 유명한 출가 황제는 청나라 순치(順治) 복림(福臨)이다. 중국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武則天)도 비구니로 지낸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북조(北朝) 중후기 100여 년간 제후 17명이 출궁해 비구니가 된 것처럼 중국 불교역사상 전무후무하고 기이한 현상은 없다. 불교는 동한(東漢) 명제(明帝) 때 낙양(洛陽)으로 전래되기 시작해 한나라 말기 조위(曹魏) 시기에 하남(河南) 지역에 초보적으로 전파됐다. 서진(西晉) 16국시기에 빠르게 전 지역으로 전파돼 흥성하게 되고 북위(北魏) 시기에 극성하게 됐다. 당시 탁발규(拓跋珪)는 외숙 모용수(慕容垂)의 도움을 받아 대국(代國)을 세우고 나중에 위(魏)라 개칭해 북위 왕조의 창시자가 됐다. 이후 외숙과 전투 중 어렵사리 우위를 점했고 또 군대를 이끌고 남하해 연조(燕趙, 현재 북경[北京], 천진[天津] 북부와 산서[山西], 하남[河南] 북부, 내몽고[内蒙古] 남부의 하북[河北] 지역을 포함한다) 지역을 공략했다. 연조는 중원지역으로 비교적 문화가 발달돼 있었고 풍속과 자연환경이 탁발 씨의 대막 초원
화타(華佗 : ?-208), 자는 원화(元化), 패(沛)의 초(譙, 현 안휘성 박[亳]현) 사람으로 한나라 말기의 의학자다. 화타(華佗/華陀)는 ‘선생’이라는 뜻의 존칭을 붙여 부르던 것이 이름으로 알려진 것이며 부(旉)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동봉(董奉), 장기(張機)와 더불어 한나라 말기에 출현한 ‘건안(建安) 삼신의(三神醫)’로 불리며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중국 주(周) 나라 때의 전설적인 의사 편작(扁鵲)과 더불어 명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져 왔다. 의술에 정통해 내과, 외과, 산부인과, 침구 등 여러 분야에 능통했으며 특히 외과에 뛰어났다. 그가 처음 사용한 마취제인 ‘마비산(麻沸散)’은 고대 외과수술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가 만든 ‘오금희(五禽戱)’는 양생과 관련된 의료 체조로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데 있었다. 저술이 있었다고 하나 이미 산실됐다. 조조(曹操)가 치료하라고 불렀는데 거절하자 조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신의라 불리는 화타는 동한(東漢) 말기
초선(貂嬋)은 소설 『삼국연의』 속의 인물이다. 경국지색을 지녔다고 묘사돼 있다. 원래 사도(司徒) 왕윤(王允)의 가희였는데 왕윤을 도와 나라를 위해 도적을 없애는데 자원했다. ‘연환계(連環計)’를 이용해 동탁(董卓)과 여포(呂布)를 이간시키고 끝내 여포의 손을 빌어 동탁을 주살한다. 초선은 중국 역대 ‘4대 미인’ 중 한 명이다. 초선의 아름다움은 ‘폐월(閉月)’이라 칭한다. 그녀는 자신의 자색을 이용해 각 파의 정치인들과 교제하면서 많은 영웅호걸들을 좌절시켰다. 중대한 정치 투쟁에 참여하면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여인이 어디서 왔는지 아직까지도 분명하지 않다. 첫 번째 관점은 이렇다. 초선은 왕윤 집안의 가희였다는 것이다. 『삼국연의』의 묘사에 따른 것이다. 왕윤은 한나라 헌제(獻帝)의 사도였다. 태사(太師) 동탁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제거하려 했지만 마땅한 방책을 마련하지 못해 매일 고심했다. 그의 심복인 가희 초선이 그 사실을 알고 “제가 쓰임이 있다면 만 번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왕윤은 &
조식(曹植 : 192-232), 자는 자건(子建), 초(譙, 현 안휘성 박[亳]현) 사람이다. 재능이 넘쳐났고 시문에 뛰어나 아버지 조조(曹操)의 사랑을 받았다. 진왕(陳王)에 봉해졌다. 조조가 죽은 후 형 조비(曹丕)의 질투에 의해 뜻을 펴지 못했다. 진사왕(陳思王)이라고도 불린다. 위의 무제 조(操)의 아들이며 문제 비(丕)의 아우로 그들 셋을 삼조(三曹)라 한다. 건안문학(建安文學)의 중심적 인물들로 ‘문학사상의 주공(周公)·공자(孔子)’라 칭송받았다. 맏형과 태자 계승문제로 암투하다가 29세 때 아버지가 죽고 형이 위나라 초대 황제로 즉위한 뒤, 정치적으로 평생 불우하게 지냈다. 그의 재주와 인품을 싫어한 형 문제(文帝)는 거의 해마다 그를 새 봉지(封地)로 옮겨가 살도록 강요했다. 그는 엄격한 감시 하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며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 마지막 봉지인 진(陳)에서 죽었다. 어느 날 연회석상에서 형 문제가 일곱 걸음을 걷는 사이에 시 한 수를 짓지 못하면 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자 “콩을 삶기 위하여 콩대를 태우나니, 콩이 가마 속에서 소리 없이 우노라. 본디 한 뿌리에서 같
삼고초려(三顧草廬)는 『삼국연의』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간절하게 현인을 찾던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이 자기를 도와 사업을 완성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세 번이나 제갈량의 집을 찾아가 자신과 함께 해달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로 현자나 재능이 있는 사람을 찾아간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유비의 삼고초려는 현자를 간절히 구하고 인재를 중용하는 본보기가 됐다. 삼고초려에 관해서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역사서에도 기록돼 있고 제갈량 본인도 이야기 했고 『삼국연의』에도 묘사돼 있다. 당시 유비는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어 인재를 급히 구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이치상 삼고초려는 가능한 일이다. 『삼국지․제갈량전』에 유비와 제갈량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 기록돼 있다. 유비가 신야(新野)에 주둔하고 있을 때 서서(徐庶)가 유비를 보고는 뛰어난 인물임을 알아차렸다. 서서는 유비에게 “제갈량은 현명한 자로 와룡(臥龍)입니다. 그를 만나보시겠습니까?”라고 했다. 유비는 “당신이 그를 데리고 와 보십시오”라고 하자 서서는 “그 사람을 만나러 갈 수는 있으나 그를 여기에
마속(馬謖 : 190-228), 자는 유상(幼常), 삼국시대 양양(襄陽) 의성(宜城, 현 호북성 의성) 사람이다. 촉한(蜀漢)의 장군으로 제갈량의 신임을 받았다. 건흥(建興) 6년(228)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략할 때 선봉에 섰다가 명령을 어겨 가정(街亭)에서 대패했다. 감옥에 갇혔다가 병사했다. 일설에는 제갈량에 의해 참수됐다고 하기도 한다. 가정(街亭)을 잃은 패배는 신기묘산(神機妙算)을 갖춘 제갈량 일생 중 가장 실망스런 전투였다. 당시 촉나라는 위나라를 치기 위해 북벌을 감행하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전국을 통일할 모양을 갖추었다. 제갈량은 마속에게 선봉을 맡으라고 하면서 2만 5천의 정예병으로 가정(현 감숙성 장랑(莊浪)의 동남쪽)을 수비토록 했다. 요충지인 가정을 반드시 지켜 적군이 통과하지 못하도록 재삼재사 당부했다. 그런데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길을 막는 방어진지를 구축하지 않고 산 위에 진을 쳤다. 위나라 군대는 산세를 이용해 산을 포위하고 물길을 막은 후 파죽지세로 쳐들어갔다. 막을 길이 없자 마속은 패잔병을 이끌고 철수하면서 가정을 빼앗겼다. 마속의 실패는 북벌 중 가장 중요한 전투의 패배였다. 가정 전투의 패배로 제갈량은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역사서에 제갈량은 “팔척장신으로 마치 송백처럼 용모는 매끈하면서도 컸다”고 했고 ‘출중한 재능’과 ‘웅대한 도량’을 겸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