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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0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사리(舍利)는 범어 ‘Garlra’의 음역이다. 원래 부처의 신골(身骨)을 뜻한다. 이후에 고승이 열반해 화장한 후 만들어진 구슬 모양의 것을 가리키는 말로도 썼다. 불탑(佛塔)에 사리를 봉양하는 것 이외에 부처와 관련된 모든 것을 불교도들은 성물이며 성스러운 자취로 여겨 불탑에 공양한다. 그래서 사리탑에는 불발탑(佛髮塔), 불발탑(佛鉢塔), 불아탑(佛牙塔) 등이 있다. 부처의 사리는 부처를 믿는 상징이다. 그리고 신골사리 외에 부처님의 교설인 불경이 법사리(法舍利)로 신봉돼 신골사리와 함께 불탑(佛塔) 속에 봉안되었다. 부처님의 신골을 진신사리(眞身舍利), 불경을 법사리, 고승의 사리를 승사리(僧舍利)라 하여 구분하고, 승사리를 봉안하는 곳은 부도(浮屠)라고 하여 뒤에 와서는 불탑과 다른 형태로 만들었다.

 

사리는 인도에서 기원했다. 중국 불경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486년(동남아 불교도들은 일반적으로 기원전 545년으로 보고 있다. 중국과는 59년의 차이가 난다)에 있었던 일이다. 부처가 여러 제자를 데리고 바이샬리를 떠날 때 이미 중병이 들어 있었다. 마지막에 말라국의 도성 쿠시나가르에 도착해 강가에서 목욕했다. 사라쌍수 가운데서 오른쪽 손으로 바치고 옆으로 누우셨다. 후에 모든 와불상(즉 열반상)은 모두 이런 자세를 한다. 그날 저녁 마지막 불제자 바라문 학자 수바드라를 접견한 후 부처는 열반에 들었다. 부처의 제자들은 당시 풍습에 의거 부처의 유체를 화장했다. 마가다국과 석가족 등 8국은 부처의 사리를 여덟 등분해 자신들의 땅에 탑을 세우고 봉안했다. 그중 마가다국은 보리가야에 일부를 봉안했는데 기원전 3세기 아소카왕이 꺼냈다.

 

 

 

 

법문사(法門寺)는 중국의 유명한 고찰이다. 섬서(陝西)성 부풍(扶風)현 북쪽 약 10킬로미터 법문(法門)진에 위치해 있다. 사찰 내에는 명나라 만력(萬曆) 13년(1585)에 중건하고 민국 28년(1939)에 보수한 13층 8각 전탑 1좌가 있다. 1981년 8월 장맛비 등에 의해 쓰러졌다. 법문사가 언제 건축됐는지에 대해 전설이 많다. 북위(北魏), 북주(北周) 시기에는 아소카왕 탑이라고 불렀다. 인도의 아소카왕이 건축한 팔만사천 탑 중에 하나라고 전한다.

 

아소카왕은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국왕이다. 기원전 271년에 즉위했다. 일생 동안 정벌정쟁을 벌였다. 칼링가 왕국 전쟁 중에 10만여 명을 도살하면서 흘린 피로 강을 이루었다고 한다. 만년에 칼을 내려놓고 불교에 귀의해 불교 전파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불교 경전 기록에 의하면 아소카왕은 여러 귀신들을 동원해 부처 사리를 가지고 와 하루 만에 팔만사천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 승려는 중국 내지에 10여 좌의 탑을 아소카왕의 탑에 귀속시켰는데 법문사 탑이 그 중 하나다.

 

사실 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때는 동한(東漢) 명제(明帝) 시기라는 게 일반적인 통설이다. 아소카왕이 불탑을 만들었다는 전설과는 3세기나 차이가 난다.

 

 

 

 

법문사와 ‘진신 보탑’은 어느 시기에 세워졌는가? 문헌 기록에 의하면 춘추 말기, 동한 말기와 북주라는 세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법문사의 북위 천불비(千佛碑)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법문사 탑은 북위 효문제(孝文帝) 태화 연간(477-499)에 건조되었다. 그때 ‘아소카왕사’, ‘아소가왕탑’이라 불렀다. 부처 손가락 사리를 봉안해 중국 4대 불교성지의 하나가 되었다. 북주 무제(武帝)가 훼불(毁佛)할 때 법문사와 탑은 파괴되었다. 수나라 문제 양견(楊堅) 인수(仁壽) 원년(601)에 천하 31주(州)에 부처 사리탑을 건조하라 명령했는데 법문사도 그 중의 하나다. 당 태종 정관 5년(631)에 지하궁전을 건축하고 사탑을 건조하기 시작하면서 법문사가 흥성하는 서막이 되었다. 당 중종은 경룡(景龍) 4년(710) 법문사를 ‘성조무우왕사(聖朝無憂王寺)’로 이름을 바꾸라 조서를 내리고 사리탑을 ‘대성진신보탑(大聖眞身寶塔)’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진신보탑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법문사탑 지하궁전에서 출토된 유물은 크게 2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부처 손가락 사리 4과, 하나는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봉헌한 물품이다. 봉헌한 물품은 금은동 철기, 자기, 유리기, 주보옥기, 칠목기, 석질기(石質器), 잡기, 그리고 대량의 방직물과 화폐이다. 이 불교 성물은 양쪽 터널에 세워진 석비의 뒷부분 이외에 전, 중, 후 실에서도 모두 출토되었다. 부처 사리를 저장한 아소카왕탑(전실), 영실 장막(중실), 8중 보함(후실 내)을 중심으로 규칙적으로 배치돼 있었다. 모두 당나라 황실이 봉양한 물품들이라 수량도 많고 고급품이었다. 새겨진 문장의 내용도 풍부하고 희귀한 보물들이었다.

 

불교 경전의 기록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의 손가락 사리는 고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이 불교를 선양하기 위해 불탑을 세우고 석가모니 사리를 봉안할 때 중국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발굴된 부처 사리는 모두 4과였다. 1과는 ‘진골’이고 3과는 ‘영골(影骨)’이었다. ‘영골’은 불가에서 진신을 보관하고 공양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복제품으로 진골과 똑 같은 작용을 한다. 부처 손가락 사리 4과는 당나라 제왕이 봉안한 진품으로 겨우 남아 있는 세계에 몇 안 되는 부처 사리다.

 

 

 

 

지금까지 발굴된 몇 좌의 보탑 밑 지하궁전의 자료를 보면 북위시기에 사리를 넣었던 용기인 유리병, 바리때는 석함 속에 놓여 있었다. 그때는 아직 지하궁전이 발견되지 않았던 시점이라 탑 아래의 다진 땅 속에 직접 안치했다. 수나라 때에는 일반적으로 병이나 단지 등에 사리를 봉안했지만 수 문제 명령으로 건립된 사리탑에는 전문적으로 사리를 담기 위해 금이 칠해진 구리함이 제작됐다. 외면은 석함으로, 석함에는 사천왕과 불제자 등을 새겼다. 축소된 지하궁전이라 할만하다.

 

당나라 때에 오면 사리 매장 제도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긴다. 묘실과 같은 형태의 지하궁전이 정식으로 출현하였다. 그리고 금관 은곽을 사용해 사리를 담았다. 한족화 형식이 완성되는 변화라 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아무리 늦어도 무측천(武則天) 때에 이미 완성되었다. 이는 법문사와 관련이 있다. 당나라 석도선(釋道宣)의 『집신주탑사삼보장통록』의 기록에 의하면 현경(顯慶) 5년(660) 3월에 법문사에서 사리를 취하여 낙양 궁으로 봉양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무측천은 사리를 위해 금관 은곽을 만들었는데 수십 근이나 나갔고 조각이 아름다웠다고 기록돼 있다.

 

 

 

 

법문사 불사의 흥성은 당 왕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제왕들은 부처 사리를 7번이나 영접하고 봉안하였다. 사리를 봉안할 때마다 사원에 막대한 재물을 하사하면서 사찰 건축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여러 번 증축하면서 당대의 법문사의 규모는 최고조에 달했다. 사찰의 승려도 5000여 명에 달했다. 사찰의 영역이 확대되고 전당이 휘황찬란했으며 진신보탑도 장관을 이루었다. 관중뿐만 아니라 중국 전체에서도 이름 난 불교도량이었다. 실로 국가급 불교 사원이었다. 심지어 장안 통치 중심이 되었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당대 사회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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