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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톺아보기] 당신은 입도(入島) 몇 대? (1) 유배인 중 유일한 임금 '광해군'

 

현대 도시인의 필수 버킷리스트인 ‘한달살이’ 메카 제주는 조선 시대 유배의 섬이었다.

 

유배(流配)는 죄인을 귀양 보내던 형벌이다. 유배인을 귀양 보낼 때는 죄가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원근(遠近)의 등급이 있었다. 등급에 따라 2000리, 2500리, 3000리 밖으로 적소(謫所)를 정했다. 따라서 제주는 서울에서 3000리, 바다 한가운데 섬이라 가장 중죄인들이 유배를 오는 곳이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200여 명 가까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들 중에는 임금 자리에서 축출된 광해군을 비롯해 역모 사건에 휘말린 왕족부터 송시열, 김정희, 박영효, 김윤식 같은 정계 및 사림의 거목들과 제주 여인과의 러브스토리로 유명한 조정철까지 다양하다.

 

이 중 일부는 후손을 남겨 제주 입도 조(祖)가 되기도 했다. 제주 여인과 가정을 이뤄 자손을 낳거나, 유배를 올 때 가족들이 같이 와서 정착한 경우다.

 

폭군이면서 개혁가, 개혁가이면서 폭군, 이처럼 양극단의 역사적 평가를 받는 광해군은 500년 동안 제주에 유배를 온 유배인 중 유일한 임금이다. 광해는 폐위된 후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병자호란 발발 다음 해인 1637년 제주로 유배를 왔다.

 

폐위된 임금 광해군은 도착지도 달랐다. 조선 시대 유배객들은 보통 전라남도 해남, 강진 등에서 출발하여 제주시 화북 포구 또는 조천포구를 통해 제주에 왔다. 1637년 6월 6일 광해군을 태운 유배선이 ‘어등포’(구좌읍 행원리)에 입항했다. ‘어등포(御登浦)’란 임금이 제주 땅을 처음 밟은 곳이라는 의미다.

 

옛 유배인들은 추자도를 거쳐 제주로 오다가 관탈섬이 보이면 갓을 벗어 옷깃을 여몄다고 한다. 이제는 쓸모없게 된 관복을 모두 벗고 평민 옷차림으로 환복했다. 그래서 관탈섬(冠脫島)이라 했다.

 

광해군은 제주로 내려오는 내내 사방을 천막으로 가려 버렸기 때문에 관탈섬을 보기는커녕, 아예 밖을 볼 수 없었다. 배가 제주도에 도착한 후에야 천막을 거두고 경호를 맡은 별장 이원로가 "이곳은 탐라, 제주”라고 하자 광해군은 매우 놀라 “어째서 여기에! 왜, 어째서!”라고 되풀이 말하며 개탄했다고 한다.

 

요즘 제주에서 가장 ‘핫플레이스’라는 행원에는 관광객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2006년 세워진 광해군 기착지 표석 주변만은 아주 한산하다. 하긴 관광객들만이 아니라 제주 사람들도 이런 사연을 아는 이는 드물다. 사실 그럴만한 이유도 충분했다.

 

제주로 온 광해군의 유배 생활은 늘 살얼음을 걷는 분위기였다. 일거수일투족 모두 감시 대상이다. 언제 암살을 당할지 모를 상황으로 광해는 최대한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이 제주에 유배를 왔었다는 사실이 심지어 제주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광해군이 제주 성에 위리안치된 후에는 병사들이 탱자나무 가시울타리 주변을 지켰다. 이뿐 아니라 광해군은 여러 모욕과 암살의 위험을 견디며 쓸쓸히 남은 생을 보냈다. 자신을 감시하는 장수가 윗방을 사용하고, 자신은 아랫방에 거처하게 하는 모욕도 참았다. 시중드는 나인이 그를 ‘영감’이라며 놀려도 말 한마디 않고 묵묵히 견뎠다. 심지어 독살당할까 두려운 나머지 한여름에도 펄펄 끓인 물만 마셨다고 한다.

 

제주에 온 지 4년 4개월 만인 1641년 음력 7월 1일 67세 나이로 조선 제15대 왕 이혼(李琿)은 세상을 떠났다. 음력 7월 1일, 제주에는 반드시 비가 온다. 광해가 숨을 거둔 그해 1641년은 제주에 극심한 가뭄이 왔다. 장례 이후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해서 제주 사람들은 지독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를 ‘광해우(光海雨)’라 부른다.

 

“7월 초하룻날이여, 대왕 관(어붕)하신 날이여, 가물다가도 비 오람서라(칠월 초하루는 대왕이 돌아가신 날, 가물다가도 비가 내리더라!)”라고 제주 민요에도 나온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정책특보를 역임하고,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을 지냈다.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제주지식산업센터 센터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오달진 근대제주』(2019), 『오달진 제주, 민요로 흐르다』(2021), 『제주의 화전생활사』(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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