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족대표 추도사가 첫 순서도 인상적 나는 지난 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2‧28사건 69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변하는 2‧28’을 목격하게 되었다. 오는 5월 취임하는 총통 당선인은 2‧28사건의 재규명을 선언했고, 유족들은 이에 호응하는 분위기였다. 또한 기념식에 참석했던 현직 총통은 전격적으로 면담을 요구하는 유족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돌발적인 상황인데도 진지하게 경청하는 총통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문득 대한민국과 4‧3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제주4‧3과 흡사하다는 대만 2‧28사건이 69주년을 맞았다. 그 기념식이 2월 28일 오전 10시부터 2‧28국가기념관 야외정원에서 시작되었다. 한국 5‧18기념재단 이사인 나는 차명석 이사장과 함께 주최 측인 2‧28사건기념기금회 초청으로 이 행사에 참석했다. ▲5‧18기념재단 차명석 이사장(오른쪽)과 함께 기념식에 참석한 필자. 기념식은 유족 대표, 주최 측인 2‧28사건기념기금회 이사장, 총리 격인 장산정(張善政) 행정원장, 국가원수인 마잉주(馬英九
기존의 폭동, 토벌 정당성 그대로 답습 2004년 7월, 보수단체가 낸 헌법소원 못지않게 국방부가 발행한 『6‧25전쟁사』 파문도 논란거리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편찬한 이 책에 제주4‧3을 ‘무장폭동’으로 기술하는가하면 오류와 왜곡사례도 수두룩해서 큰 파장이 일어난 것이다. 국방부는 6‧25전쟁에 관한 정부 공식 역사서로 1967년부터 13년간에 걸쳐 『한국전쟁사』(전 11권)를 발간한 바 있다. 국방부는 『한국전쟁사』 발간이 오래 전에 있었고, 미국과 구소련, 중국 등에서 새로 발굴한 문헌자료와 학계의 연구 성과, 참전용사 4,000명의 증언자료 등을 반영해서 모두 18권의 『6‧25전쟁사』를 새로운 각도로 쓴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 첫 권으로 ‘전쟁의 배경과 원인’을 발간한 것이다. ▲ 2004년 ‘전쟁의 배경과 원인’이란 제목으로 발간된 『6‧25전쟁사』 제1권. 그런데 이 책에 제주4‧3을 ‘무장폭동’으로 표기했다는 문제 제기가 4‧3관련단체로부터 나왔다. 4‧3위원회
4‧3특별법부터 문제 삼기 시작 제주4‧3이 오늘의 위상을 갖게 되기까지 많은 수난과 시련, 도전과 응전이 있었다. 4‧3진영은 2000년 4‧3특별법 쟁취를 시작으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법정보고서를 통해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란 새로운 규정 획득, 대통령의 사과, 국가기념일 지정, 화해와 상생이란 슬로건 개척 등 수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반해 일부 보수단체들은 이런 변화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면서 극렬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수구적 냉전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력은 과거 ‘공산폭동’으로 규정되어 지하에 갇혀있던 4‧3이 새로운 햇살을 받고 재조명되는 데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온갖 훼방, 폄훼활동을 전개했다. 그 시발은 4‧3특별법의 제정부터였다. 극우 보수단체들은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목적인 4‧3특별법 제정자체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대 사건으로 간주했다. 2000년 4월 6일, 보수 인사와 예비역 장성 출신 등 15명이 제주4‧3특별법이 위헌이라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
꿈 같은 ‘대통령 사과’ 현실로 2003년 10월 15일 4‧3진상조사보고서가 최종 확정되자 그 다음 화두는 대통령의 사과로 모아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미 대선 과정에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결과 국가권력의 잘못이 드러나면 사죄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또 대통령 취임 직후에 청와대 참모들에게 정부 차원의 입장 표명 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대통령 사과가 실현될 가능성은 높았다. 이 업무를 맡은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구체적인 작업을 하고 있음도 감지됐다. 제주4‧3에 대한 국가원수의 사과라는 꿈같은 목표가 현실로 다가서자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날 유족들과 만났던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1988년 4‧3취재반장을 맡은 이래 많은 유족들을 만났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우리들에게 그들 유족들의 청원은 한결같이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을 옥죄는, 붉은 색으로 칠해진 이념적 누명을 벗기는 방안은 무엇일까. 우리 취재반은 이심전심으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그 결과를 토대로 국가의 사과를 받아내는 것으로 목표를 설정하게 됐다.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1997년
6개월간 수정의견 376건 들어와 제주4‧3위원회는 진상조사보고서를 의결하면서 6개월 이내에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타나면 추가 심의를 거쳐 보고서를 수정한다는 조건부를 달았기 때문에 수정의견 제출기간을 설정해서 공고했다. 즉 2003년 5월 1일부터 9월 28일까지를 의견 수렴기간으로 정한 것이다. 이에 앞서 4월 말에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5백부를 발간, 관련 기관‧단체 등에 배포했다. 본문만 실었음에도 보고서는 582쪽 분량으로 두툼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4‧3진상조사보고서는 모두 3차례 간행됐다. 2003년 2월말에 초안이 나왔고, 4월말에 조건부 진상보고서가 인쇄됐다. 그리고 수정의견을 반영한 최종본이 그해 12월에 발간된 것이다. ▲ 4‧3진상조사보고서는 모두 3차례 간행됐다. 초안과 조건부 진상보고서, 최종 보고서 등이다. 그해 9월 말까지 모두 20개 기관‧단체‧개인으로부터 376건의 수정의견이 접수됐다. 예상했던 대로 새로운 자료나 증언에 의한 수정의견은 별로 없었다. 기획단이나 위원회 회의에서 치열하게 논의됐던 성격 규정이나 용어에
진보·보수 막론하고 중앙언론 크게 보도 2003년 3월 29일, 비록 “6개월 동안 수정의견을 받는다.”는 조건부 단서가 달렸지만, 4‧3위원회에서 진상조사보고서를 채택하자 중앙언론들이 일제히 이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중앙지들은 4‧3사건 발생 55년 만에 정부 차원의 첫 종합보고서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고, 특히 국가공권력에 의한 주민 희생 등 인권침해 여부를 규명하는데 역점을 뒀다는 점에서 평가받고 있다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3월 31일자 『한겨레신문』은 “해방공간에서 이념갈등이 개입된 유혈사태에 대한 정부 차원의 첫 공식보고서라는 의의를 지닌다.”, 『중앙일보』는 “국가공권력에 의한 불법사건으로 규정했다”, 『동아일보』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으로 규정했다”고 보도했다. 또 『경향신문』은 “4‧3 와중에 희생됐다는 이유로 ‘빨갱이’이라고 손가락질 받아온 희생자 유가족들의 반세기 신원을 해주려 했음을 명확히 했다
나종삼 전문위원 “제주출신 편향적 집필” 주장 2003년 3월 24일, 고건 총리가 주재하는 4‧3진상조사보고서 심의 소위원회에 당초 회의 참석 대상자가 아니었던 국방부 출신의 나종삼 전문위원이 출석했다는 것은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국방장관이 강력히 요청했고 총리실에서 수용했다는 걸 알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시 진상조사보고서 집필 업무를 총괄했던 나를 공격하고, 보고서 심의를 원천적으로 무력화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진상조사보고서 초안이나 그 심의 과정이 불신을 받는다면, 그 다음 상황은 어떤 파장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나는 문제가 간단치 않다고 생각하고, 회의 직전 박원순(현 서울시장) 기획단장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박 단장은 “알았다”면서 회의장에 들어갔다. 예상했던 대로 회의 서두에 조영길 국방장관이 나서서 나종삼 전문위원이 발언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고건 총리가 이를 받아들였다. 나 위원은 보고서 집필 과정에서 수석전문위원인 내가 전횡을 일삼았고, 제주 출신 전문위원들 중심으로 편향적인 집필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자신이 수정의견을 제출했는데도 수석전
목차안 심의부터 격론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작성 기한이 정해져 있었다. 4‧3특별법에 위원회 구성 후 2년 이내에 자료 조사를 한 뒤 6개월 이내에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4‧3위원회가 2000년 8월에 출범했기 때문에 이를 기준점으로 한다면 늦어도 2003년 3월 이내에 보고서를 완성해야 했다. 보고서 작성의 임무를 맡은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은 기획단장 선임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2001년 1월에야 겨우 출범할 수 있었다. 5개월 가량을 까먹은 것이다. ▲ 2001년 8월 4‧3평화공원 예정지를 방문한 4‧3위원회 및 기획단 위원들 기획단은 2003년 2월 진상조사보고서 초안이 작성될 때까지 모두 12차례 회의를 갖는 등 숨 가쁘게 움직였다. 정부 관계부처 국장급 공무원과 민간인 전문가 등 15명으로 구성된 기획단은 전문위원실에서 작성한 진상조사 대상 선정에서부터 증언조사 계획과 국내외 자료조사 계획 등을 심의했다. 또한 자료 관리 데이터베이스 개발과 자료집, 증언집, 법령집 발간계획 등도 논의했다. 실질적인 진상조사 등은
행방불명 희생자 5천여명에 달해 2000년 3월 13일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4‧3행불유족회)가 창립됐다. 그날 제주시 신산공원 옆 제주관광민속관 공연장에 모인 행방불명인 유족 400여 명은 “4‧3 당시 정당한 재판절차 없이 생명을 빼앗긴 이들에 대한 법적 명예회복과 4‧3 진상규명을 위해 치열한 활동을 할 것”을 선언했다.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 창립대회 이날 창립대회에서 공동대표 김문일‧박영수‧송승문‧이중흥‧한대범과 감사 강성열‧김영훈이 선임됐다. 행불유족회는 4‧3 당시 집단학살 암매장지로 예상되는 제주비행장(정뜨르)을 비롯한 학살터에 대한 자료조사와 시신 발굴 작업을 벌이겠다고 밝혀 관심을 끌었다. 4‧3 당시 희생자 중에는 ‘시신 없는 희생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군법회의 등을 거쳐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다가 6‧25가 터지면서 대부분 집단 처형됐다. 군 당국의 선무공작에 따라 “살려 준다”는
뉴욕타임스, 1개면 전체 4‧3기사로 서울 종로구 경복궁 옆 4‧3중앙위원회 사무실에 매일 출근하면서 진상조사를 한창 진행 중이던 2001년 10월 24일, 자료 조사차 미국에 파견되었던 전문위원 장준갑 박사로부터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 뉴욕타임스」 홈페이지에 실린 제주4‧3 관련 보도기사 장 박사는 “오늘 「뉴욕타임스」에 제주4‧3 진상조사와 양 수석 인터뷰 내용이 1개면 전면에 대문짝처럼 보도됐다.”고 알려왔다. 다소 흥분된 어조였다. 그날 「연합뉴스」는 워싱턴 강일중 특파원의 기명 기사로 “NYT(뉴욕타임스), 제주4‧3사태 진상규명 노력 소개”란 제목 아래 이 내용을 타전했다. 「연합뉴스」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최근 한국과 미국에서 반세기 전 제주4‧3사태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한 노력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24일 소개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948~49년 당시 제주도 전체 인구의 10%가
무장대 출신 찾아 일본으로 4‧3위원회 진상조사팀은 증언조사를 하면서 제주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군 장교 출신자 못지않게 반대진영에 섰던 무장대 경력자 발굴에 신경을 썼다. 토벌대나 무장대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관련자들의 증언이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장대 경력자들을 국내에서 찾기는 힘들었다. 한때 ‘반공’을 국시로 내세울 만큼 완고한 반공체제의 정치환경에서 그들이 발붙일 곳은 없었다. 그들을 찾기 위해서는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사태를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진상조사팀은 일본 현지 조사 과정에서 몇몇 무장대 경력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삼룡(도쿄 거주)이다. 나와 김종민 전문위원으로 구성된 일본 조사팀은 2002년 7월 도쿄 한 호텔에서 일흔아홉 살의 그를 만났다. 제주도청 공무원이었던 그는 4‧3 발발 때에는 남로당 제주도당 정치위원의 신분으로,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함께 대정면 신평리에 있던 도당 아지트에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가 밝힌 무장봉기 결정 과정은 이렇다. 신촌회의서 12대 7로 무장봉기 결정 1947년 3‧1 발포
20명으로 진상조사팀 꾸려 4‧3위원회는 2000년 8월 진상조사 작업을 벌일 전문위원 공개채용을 실시했다. 어렵게 인원수를 확보한 전문위원 5명을 선발하는 절차였다. 이 공모에 모두 9명이 응시해 그해 10월에 5명이 최종 선발됐다. 합격자는 김종민(전 제민일보 4‧3취재반 기자), 나종삼(전 국방군사연구소 전사부장), 박찬식(전 제주4‧3연구소 연구실장‧문학박사), 양조훈(전 제민일보 편집국장), 장준갑(전 미 미시시피 주립대 강사‧철학박사)이었다. 나는 전문위원실 업무를 총괄하는 수석전문위원에 임명됐다. 실질적인 진상조사팀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곧이어 전문위원의 업무를 보좌할 조사요원 채용절차에 들어갔다. 이 역시 국회의원 당선자 등이 행자부장관과 담판을 벌여 조사요원 정원 20명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공채를 하려고 보니 보수가 너무 낮게 책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보수로는 우수한 전문 인력을 확보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차라리 채용 인원을 줄이더라도 보수를 높여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보수 문제 때문에 조사요원 숫자를 15명으로 줄여 채용했다. 그해 11월에 이르